지난 7월 16~17일 부산 민주공원 중극장에서 Dance Project EGERO(대표 강건, 이하 ‘에게로’)의 5번째 정기공연 <수구루지>(안무·연출 이용진)가 무대에 올랐다. 지난 공연들과 다르게 <수구루지>는 ‘오락 무용’을 표방한다. 에게로의 설명에 따르면 <수구루지>는 ‘처음 보지만 낯설지 않은 이야기, 동서양 이야기들이 그림과 판소리, 전통 연희와 어우러진 오락 무용’이다. ‘오락(娛樂)’은 사전적 의미로 ‘재미를 즐기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재미를 위한 춤이라지만 ‘오락 무용’이란 단어가 친근하지는 않다. 아마 ‘오락’이란 단어가 ‘예능’이나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라는 단어에 밀려 거의 쓰이지 않기 때문이지 싶다.
생각해보면 종교·의례적 목적 말고는 대부분 춤을 즐기기 위해 춘다. 그러니 ‘오락’은 춤의 중요한 기능이다. 민속춤에는 여전히 ‘오락적’ 요소가 남아 있지만, 이른바 창작 춤(현대무용, 한국 무용)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오락’을 위한 춤은 특별한 주제 없이 동작을 위한 소재 정도면 충분하다. 이에 비해 창작 춤은 주제가 필요하다. 주제는 하나의 창작 춤이 지향하는 바이고 춤은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 여기에서 춤은 오락성이 대부분 제거된 상태로 예술로 불린다. 예술의 속성에도 오락성, 즉 즐거움을 위한 것이 있지만, 많은 예술가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에게로의 <수구루지>가 오락 무용을 표방한 것으로 의도했든 아니든 춤이 잃어버린 본래의 가치 중 하나를 찾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수구루지>는 여러 이야기가 얽힌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이야기인 셈이다. 여기에 들어 있는 이야기의 면면을 살펴보자, 에게로의 다른 작품인 <사자 who>에서 <북청 사자놀음> 부분, <별주부전>, <빨간 망토>, <수영야류 제3과장>, <심청전>, <오즈의 마법사>, <크리스마스 캐럴(스크루지)> 등이다. 자신들이 창작한 작품을 비롯해 소설, 판소리, 탈춤을 망라했다.
<수구루지> 이야기는 에게로의 전작 <사자 who>의 말뚝이에서 시작한다. 양반의 허세와 모순을 까발리던 말뚝이 집안이 세월이 흘러 말뚝이 3세에 이르렀다. 자수성가한 말뚝이 3세는 조상 말뚝이가 사회 권력층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하던 자세를 잊고, 아랫사람을 업신여기며 오만하고 돈만 밝히는 속물이 됐다. 구두쇠 스크루지와 닮은 ‘수구루지’가 된 것이다. 어느 날 수구루지 말뚝이 3세는 비서 한 명만 데리고 해외여행을 떠났다가 비행기 사고로 이름 모를 숲에 떨어진다. 이 숲은 온갖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사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장소이다.
숲에서 셀카를 찍으며 놀고 있던 토끼가 추락한 수구루지와 비서를 발견하고 심봉사(심청전의 심학규, 수영야류의 등장인물이 겹친)와 함께 기절한 두 사람을 깨운다. 여기서부터 빨간 망토, 별주부, 애착 인형과 그것을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오덕후 박사 일행이 동행하면서, 각자의 소원을 풀어 줄 무녀가 사는 오주산으로 향한다. 수구루지 일행의 소원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들의 떠들썩한 동행은 여러 에피소드를 만들고, 수구루지는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용선을 탄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수구루지가 비행기 안에서 꾼 꿈이었다.
이런 시끌벅적한 이야기에 맥락을 만들어 끌고 나가는 방식은 판소리와 무성영화다. 소리꾼이 판소리 형식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간결한 애니메이션이 그것을 보충한다. 마치 무성영화에서 동영상 중간에 자막 화면이 비치고, 소리 없는 영상 속 인물의 말과 감정을 변사가 대변하는 방식과 같다. 관객은 힘들여 이야기를 따라갈 필요가 없다. 말과 그림으로 이야기 진행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출연자들의 움직임은 마치 슬랩스틱 코미디나 무언극의 움직임처럼 과장되었다. 이런 움직임은 기존 춤 작품이 가진 무게와 진지함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로 보인다. 오락성을 위한 연출은 작품 전체에서 고루 드러나는데, 그렇다고 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도입부에 <사자 who>를 끌어들인 부분에서 남성 3인무가 춤 맛을 어느 정도 보여주었고, 몇 차례 출연자 전체의 군무를 보태 자칫 놓칠 수 있었던 춤을 유지했다. 춤이 조금 더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연출이 의도적으로 춤을 절제한 듯하다.
춤 언어가 상대적으로 약해도 <수구루지>는 오락 무용을 표방하면서, 친근한 이야기의 줄거리와 주인공들을 동원했다. 이러다 보니 무용이지만 연극적 성격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극적 성격이 두드러질 때 필요한 연출이 아쉽다는 점이다. 춤 동선과 연극 동선은 다르다. 연극에서 블로킹(blocking, 동선 제한, 행동선 만들기)은 무대에서 배우의 위치를 정하고 공간 이동을 시킴으로써 정지된 무대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기술적인 작업을 말한다. <수구루지>는 소리꾼의 해설을 춤꾼이 이미지화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판소리는 소리꾼이 직접 사설과 너름새를 하지만, <수구루지>는 너름새를 춤꾼이 대신한다. 이 경우 춤꾼의 동작 이미지는 말의 내용이기 때문에 일종의 대사이다. 그래서 출연자들의 관계를 알려주고 대사 이미지를 강조할 수 있는 섬세한 블로킹이 필요하다. 특히 후반부에 소리로만 존재했던 소리꾼이 등장해 극을 정리하는 장면에서 블로킹이 절실했지만, 연출이 놓친 것 같다. 그 결과 무대가 전체적으로 어수선하고, 산만해 보였다. 이런 부분은 작품의 완결성에 영향을 끼친다.
최근 부산 춤판에는 소설을 모티브로 한 몇몇 작품이 있었다. 어떤 작품은 원작을 충실하게 춤으로 해석하였고, 또 어떤 작품은 원작의 재해석을 선택했다. <수구루지>가 보인 방식은 해체에 가깝다. 해체는 다시 원작으로 환원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수구루지>는 여러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뒤죽박죽 섞어 나중에는 원작을 가늠하기도 힘들 지경까지 끌고 간다. 그 과정에서 원본 이야기가 결여한 것을 드러내고, 현실 사회의 부조리를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또한 권선징악이나 개과천선이라는 결말을 섣불리 내세우지 않는다. 오락 무용 <수구루지>의 시도에는 오래된 새로움이 녹아있다. 탈춤의 세계관이 지금 여기의 경쾌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것이다. 비록 연출 면에서 고민할 지점이 많지만, ‘오락’을 표방한 허를 찌르는 시도는 부조리가 널려있는 현실을 외면한 채 추상과 정념에 몰두하는 기성 춤 계를 향한 경쾌한 도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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