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에서부터 김설진, 김보람, 이경은 안무가
힙합(hip hop)에는 자유로움과 젊음, 역동성이 넘쳐난다. 20세기 후반 미국 문화를 강타한 이래로 전 세계로 번져나간 힙합 문화는 젊은이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비트가 빠른 리듬에 맞춰 자기 생각이나 일상의 삶을 이야기하는 랩, 레코드의 스크래치, 아크로바틱한 격렬한 동작의 브레이크 댄스가 가미된 새로운 감각의 힙합은 다양한 부문에서 보다 자유롭고 즉흥적인 하나의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이런 힙합의 정신과 스타일을 반영한 국립현대무용단의
첫 무대는 김설진의 <등장인물>이었다. 함께 작업하는 창작그룹 ‘무버’의 멤버들이 출연해 조용한 듯 하면서도 위트 있는 연출과 독특한 움직임 어휘로 눈길을 끌었다. 마치 스님들을 연상시키는 의상과 초반의 경건(?)했던 분위기와 다르게 힙한 철제 목걸이를 하고 분절된 움직임을 보이는 4명의 무용수들(김설진, 서일영, 김기수, 김봉수)은 각자의 얘기들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 춤으로 만들어낸 각자의 이야기는 자신 삶의 주인공인 각 등장인물들의 자유분방하면서도 일정 부분 그림같은 장면들을 담았다. 특히 김설진이 배우를 겸하고 있는 영향인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등 곳곳에 숨겨진 이미지들은 의도된 스틸컷으로 연출력을 발휘했다. 여기에 얼트 일렉트로닉 듀오 '해파리' 멤버인 최혜원이 창사가 포함된 춘앵전을 비롯해 다양한 음악을 접목시켜 조화를 이뤘다. 김설진 특유의 역동적이고 파워플한 모습보다는 다소 절제된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춤이나 춤이나>ⓒAiden Hwang
현재 대중들에게 가장 어필하고 있는 김보람의 무대는 화려하고 파격적인 것을 예상했다면 여기서 벗어나 움직임에 가장 충실했다. <춤이나 춤이나>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김보람은 작업 초기에는 ‘춤의 의미’를 묻는 일에서 시작했으나 춤에 반드시 의미부여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 춤의 원초적인 근원에 집중했다. 집요하게 움직임에 파고든 그의 작업은 6명의 무용수(공지수·서보권·성창용·유동인·조영빈·조혜원)들이 쉴틈 없이 이어지는 움직임의 연결로, 각자 다른 신체가 완성해내는 신체 이미지로 공간을 메웠다. 앞선 김설진의 무대가 드라마틱했다면 김보람의 무대는 춤의 에너지에 공감된 순간이었다. 가장 긴 러닝타임으로 후반부에 밀도가 떨어지긴 했지만 동일하게 사운드 디자인을 맡은 최혜원이 MBC라디오 프로그램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에 소개된 음원들의 재배열해 향수를 자아내며 힘을 더했다. 음악으로 사용된 소리는 ‘베틀 노래’ ‘멸치잡이 소리’ ‘밭가는 소리’ ‘물푸는 소리’ 등 우리 향토민요와 감탄사, 무의미한 흥얼거림, 읊조림 등 다채로웠고 전통적인 소리와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의 힙한 움직임이 반어적으로 합을 이뤘다.
피날레를 장식한 이경은의 <브레이킹(BreAking)>은 현대무용수 5명(김미리, 임재홍, 김영은, 김현주, 김동주)과 스트리트 댄서 3명(고준영, 김지영, 박지원)이 함께 이뤄낸 가장 안정적인 무대였다. 장르의 벽을 깨고 스스로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던 안무자의 의도는 상상과 놀이로 세상을 재구성하는 개개인의 모습을 통해 무대 위로 소환되었다. 또한 국악 기반 포스트 록밴드 ‘잠비나이’의 멤버 이일우와 이충우, 이준이 만들어낸 청각적 자극은 완성도에 기여했다. 코로나 상황에서 대면의 칸막이로 존재하는 여러 크기의 투명판은 하나의 장벽이며 개체 사이의 거리감을 담은 효과적인 오브제였다. 무용수들은 넓게 확장된 무대를 오가며 이 판을 서로 사이에 두고 그 위에 올라가 불안정한 경계를 표현했다. 브레이킹이라는 단어의 뜻과 달리 힙합과 현대무용이 분리된 채 각자의 춤으로 상생하며 안정된 무대를 만들었다는 것이 역설적이었다. 종횡무진하며 공간을 휩쓰는 힙합의 에너지와 이에 비해 다소 정형화된 이미지를 만드는 현대무용의 결합은 두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 확장되었다.
이번 국립현대무용단의 신작 <힙합(HIP合)>은 실력을 검증받은 세 명의 중견 안무가들이 자신들의 안무력을 보여줄 수 있는 공연이었다. 국악과 현대무용, 스트리트댄스라는 이질적인 장르가 어우러져 융복합 공연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한편, 세 장르의 ‘힙(HIP)’한 ‘합(合)’이라는 공통의 콘셉트로 저마다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한 세 안무가를 조명할 수 있었다. 또한 이미 매스미디어에 의해 여러 장르를 접한 관객들에게 세 장르의 협업은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효과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아이디어에 비해 구현된 실제가 어딘가 완전한 충족감을 주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따라서 현대무용계를 대표하는 세 안무가가 국립현대무용단의 정체성에 더욱 기여하는 순간을 기대해 본다.
글_ 장지원(무용평론가)
사진제공_ 국립현대무용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