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가가 처음 이름을 걸고 작품을 관객 앞에 내놓는 일은 벅찬 경험이자 엄청나게 부담이 되는 일이다. 무용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일은 수많은 스텝과 출연자와 함께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안무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구현하도록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은 절대 만만하지 않다. 안무자는 한계를 느끼기도 하고 심지어 좌절감도 맛본다. 박광호는 40대의 중견 무용가로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하다가 10여 년 전부터 울산으로 활동 기반을 옮겼다. 그는 수많은 작품에 주·조연으로 출연했다. 다른 안무가들이 박광호를 찾았던 이유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 그의 기량이 한몫했지만, 그가 참여하는 작품은 연습 과정부터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동료들이 힘든 연습을 견딜 수 있게 독려하고 분위기를 즐겁게 만든다. 이는 작품 완성도에 큰 영향을 끼친다. 안무자가 할 수 없는 부분, 안무자가 없을 때도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하고도 그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 남의 작품에서 맡은 역할보다 더 많은 일을 했던 그가 드디어 자기 이야기를 춤으로 내어 보였다. 아무리 춤을 오래 추었다고 해도, 첫 춤판을 이제야 올리는 것이라, 영화로 말하면 입봉이 늦은 중고 신인이 된 것이다. 지난해 11월 21일 울산아트홀 마당 무대에 올린 ‘박광호의 춤 <버라이어티> (안무 박광호. 출연 윤혜진, 김은지, 이재준, 윤현정, 한지영)’는 인정받는 한 무용가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공연이었다. 일기장에 삶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우화적인 비유가 가득했다. 우화는 풍자와 교훈이 담겨있어야 하는데, <버라이어티>에서 박광호는 스스로 풍자의 대상이 됨으로써 작품의 진정성을 높여주었다. 또한 교훈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관객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열린 결말을 보여주는 것으로 갈음했다. 이 과정은 유쾌하고도 진지했는데, 그가 동료들에게 보여 주는 태도와 다르지 않았다. 뭔가 대단한 의미가 숨어 있는 듯이 포장하지 않았고, 평소의 태도를 그대로 반영했다.
작품은 ‘1장(part. 1) 내면의 파도’, ‘2장(part. 2) 돈굿(Don’t Good)‘, ’3장(part. 3)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등 모두 3장으로 구성되었는데, 박광호가 춤추며 살아온 시간을 간결하게 정리한 것이다. 3장의 서사는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고 1장과 2장이 맞물리고, 다시 2장과 3장이 일정 부분 맞물리기도 한다.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칼로 자르듯 구분할 수 없으니 비록 세 장으로 구분하긴 했어도 서사가 섞이는 것은 당연하다. 영원한 사랑, 우정, 행복이란 것이 있다고 믿었던 젊은 시절. 그 믿음은 관계가 넓고 깊게 얽히면서 흔들리게 된다. 1장 내면의 파도는 이 과정을 담았다. 흔들린 믿음은 삶의 다양성, 곧 버라이어티한 관계의 파도를 탔다. 2장 돈굿은 명예나 돈을 부러워하기도 했던, 그렇지만 그것이 결국은 바른길이 아니었다는 깨달음을 얻은 역정이다. 3장은 믿음과 흔들림을 모두 겪은 후 자신을 돌아보고, 만들어진 길이 아닌 자기의 길을 걸어가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박광호의 여정을 조금만 확장하면 우리가 모두 지나온 길과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목 <버라이어티>는 ‘다양하다’라는 뜻이다. 삶의 다양성 자체를 뜻하기도 하고, 춤추면서 살아온 다양한 경험과 지금 그가 하는 여러 일을 뜻하기도 한다. 공연 포스터에 보이는 허리에 감은 여러 색의 천 끝에 놓인 북, 노트북, 갓과 부채, 건반은 그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상징하는 사물이다. 박광호는 춤추는 일 외에 무용 음악을 작곡하고 편곡하는데도 남다른 재능이 있다.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하게 일과 취미를 즐긴다. 그는 첫 개인 춤판에서 이 모두를 담고자 한 것 같다. 어느 하나 소홀히 할 것이 없다 보니 할 말이 많아졌다. 박광호만이 아니라 대부분 첫 공연에서 안무자는 보여주고 싶은 내용이 많고, 그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욕구를 누르고, 이야기를 3장으로 압축해 나름대로 가지치기했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 안무자는 무용수들을 넓게 활용한다. 무용수 다섯 명은 주변 상황이거나, 자신의 반영 혹은 내면의 표현이었으며, 자신과 대립하는 환경이 되기도 했다. 또한 소극장 무대에서 물리적 장치 없이 무용수만으로 상황을 만들고, 상징과 은유로도 이용한다. 또한 중요한 지점에서 본인이 등장해 이 작품이 자신의 이야기임을 분명히 한다. 무용수들의 기량은 안무자의 의도를 충분히 소화할 만큼 좋아서 작품이 걸림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다만, 무대가 좁아 춤 에너지를 충분히 발산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조명 활용 면에서도 고민의 흔적이 보였는데, 군무에서 대립이나 조화에 조명을 비중 있게 이용하였다. 한편, 소극장 무대의 한계는 이러한 섬세한 조명 활용에 조금은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소극장 공간은 양날의 칼이다. 작은 공간은 활용이 편해 동선을 짜기에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다른 한편으로 물리적으로 좁아 춤과 서사적 공간을 확장하기 어렵다. 이런 문제 때문에 소극장 무대에서 작품 구성은 섬세할수록 좋다. <버라이어티>는 공간의 장단점이 반반씩 점유한 공연이었다. 그런데 장점은 당연해 보이는 경우가 많고, 단점은 더 크게 보인다. 그래서 <버라이어티>가 담아내려는 이야기에 비해 공간의 비율이 맞지 않았던 점이 장점보다 더 크게 부각되어 보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이 좀 더 필요해 보인다.
결론은 심각하지 않았다. 진행하고 있던 서사에서 조금 떨어져 관조하는 느낌으로 진지하지만, 담담하게 열린 앞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앞선 시간의 유쾌함과 경쾌한 분위기를 모두 포용하면서도 결코 가볍거나 경솔해 보이지 않고, 그저 또 다른 버라이어티 속으로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버라이어티한 삶에서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흔들리면서 기우뚱한 균형을 찾는 일이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흔들리지 않는다면 무슨 재미로 살 것이며, 굳이 살아갈 일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여서 살아가고, 살아 낼 수 있는 것이다. 밝아 보이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길을 담담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에는 희미한 불안이 묻어 있었다. 불완전하고 흔들리는 일이 절대 달라지지 않을지라도 끊임없이 ‘경로를 재탐색’하며 나아가야 하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운명을 수긍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버라이어티>는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자기 삶의 이야기를 풀어낸 한 무용가의 실존적 고민의 이미지이다. 박광호가 재탐색한 경로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무용가 박광호를 좇는 관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으면 좋겠다. 인간은 타자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글_ 이상헌(춤평론가)
사진제공_ 박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