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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무용 무대에 상륙한 ‘개화기 트렌드’ - 경기도무용단 〈경합(競合)_The Battle〉


 

화사하다. 어여쁘다. 사랑스럽다. 디자이너 정구호가 연출은 물론 무대세트와 의상, 소품, 조명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전체적인 비주얼 디렉팅을 담당한 경기도무용단의 〈경합(競合)_The Battle〉 첫인상이다. 

송혜교 주연의 영화 <황진이>(2007)에 미술감독으로 참여한 것을 계기로 기생과 권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정구호는 경기도무용단과의 협업에서 권번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제안했고, 이미 올해 1월에도 수원권번 출신 독립운동가 김향화를 조명하는 뮤지컬 <향화>를 서울예술단과 공동제작한 바 있는 경기아트센터에서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권번, 일제강점기의 아이돌 사관학교

 

정구호는 기생의 교육기관이었던 권번이 오늘날 아이돌 연습생들을 훈련시켜 데뷔시키는 연예기획사와 역할이 비슷하다는 데 착안해 권번에서 벌어지는 예비 기생들의 훈련과 경쟁을 무대 위로 올렸다. 무용극을 표방하지만 서사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작품은 권번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예비 기생들의 하루를 보여주는 1막과 고된 수업을 마친 뒤 기분 전환차 교사들의 눈을 피해 권번을 빠져나간 두 주인공 연희와 초희가 장터에서 우연히 젊은 선비들과 마주치며 곧 시작될 풋풋한 사랑을 예고하는 2막, 그리고 연희와 초희가 교사들 앞에서 최고의 예기를 뽑는 경합에 나서는 3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 <스캔들>(2003) 이후 가장 맥시멀한 무대가 되리라던 정구호의 장담대로 무대는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향연>에서는 붉은색 대형 매듭을, <산조>에서는 거대한 운석 모양의 구조물을 작품의 중심 모티브로 제시했던 그가 <경합>에서 선택한 전통 소재는 한옥의 나무 문살이다. 무대의 앞뒤, 양옆에 배치된 문살은 <향연>의 매듭처럼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다양하게 변주된 모습으로 무대를 채우며 움직임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정구호는 전통 문양을 사용하되 색감에서는 파격을 입혔는데, 문살은 물론 권번 교사들이 예비 기생들을 가르치는 공간인 단이나 기생들이 수업 교보재로 메고 나온 장구에 이르기까지 무대와 소품의 기본 색조는 화사한 핑크색으로 통일되어 있다. 이 핑크색 무대가 연상시키는 것은 그가 연출의 변으로 아이돌 연습생들의 오디션 경쟁을 이야기한 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듯이 <프로듀스 101>이나 <아이돌학교>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들이다(엠넷에서는 지난 8월부터 새로운 걸그룹 오디션 프로그램인 <걸스플래닛999: 소녀대전>을 시작했고, 11월에는 <방과후 설렘>이 방영을 앞두고 있다).

 

 

 

화사한 핑크톤 무대와 조화를 이루는 의상은 적록(赤綠)을 주된 색채로 해 극이 전개될수록 색조가 짙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1막에서는 연분홍과 연록색 속치마를 입고 등장한 예비 기생들은 2막에서는 좀 더 짙은 색감의 저고리와 쓰개치마를 입고 등장하며, 3막의 경합 장면에서는 채도 높은 붉은색과 진초록의 공연 의상(붉은색은 춘앵무, 진초록은 구음검무)을 입어 한 사람의 예인으로 완성된 기생의 모습을 보여준다. 색조의 변화와 함께 기생들이 의상을 하나씩 덧입어가는 동안 예인으로서의 성장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정구호는 프로그램북에 실린 연출 의도를 통해 이 같은 의상 콘셉트를 마리 앙투아네트로 대표되는 로코코 스타일과 조선시대의 만남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도입부에서도 주인공 마리를 합스부르크 왕가의 어린 공주로 등장시켰다가 점점 더 풍성한 드레스를 입으며 프랑스 왕비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더불어 한복의 고유한 특징이기도 한 겹쳐 입기의 멋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영리한 연출이라 할 수 있다.

 

경기도무용단 상임안무가인 최진욱과 협력안무가 정보경이 함께 작업한 안무는 교방굿거리, 장구춤, 민살풀이, 구음 검무, 춘앵무, 화관무 등을 극의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있다. 하지만 극의 중심인물들이 권번에 소속된 예비 기생들로 설정되어서인지 춤의 매력은 기대만큼 크지 않다. 작품의 대미를 장식하는 경합 장면에서 춘앵무와 화관무를 적절히 섞은 홍팀의 춤과 이에 대적하는 청팀의 구음 검무가 펼쳐지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춤은 권번에서 교사들이 예비 기생들을 가르치는 장면에 배치되어 춤을 춘다기보다 지도받은 춤을 따라 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해당 춤의 진수를 맛보았다고 할 만한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춤에 포커스를 맞추어 공연을 감상한다면 작품의 메인 무대는 오히려 몰래 권번을 빠져나간 예비 기생들과 선비들의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터로 볼 수 있다. 권번에서의 수업 장면만으로는 남성 단원들의 활용폭이 제한되어 남성들의 춤을 보여주기 위해 삽입된 이 에피소드는 장터에서 펼쳐지는 남사당패의 풍물과 버나 등의 공연은 바깥세상을 구경하러 나온 기생들에게 신선한 경험과 선비들과의 만남을 위한 계기를 제공하기 위한 막간극이지만 특유의 흥으로 무대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작품에서 가장 신나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절로 어깨가 들썩거려지게 만드는 흥겨운 남사당패의 움직임이 지나가고 나서 찾아오는 것은 주객전도의 아쉬움이다. 

 

 

 

암울한 일제강점기를 대신하는 화사한 개화기 트렌드

 

몇 년 전부터 패션업계와 식품업계를 중심으로 복고를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한 제품을 출시하며 ‘뉴트로’라는 이름의 마케팅을 전개하고 있는데, ‘개화기’는 이러한 뉴트로 트렌드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키워드 중 하나다. 영화 <암살>(2015)이나 <아가씨>(2016),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2018)이 흥행에 성공한 뒤 이른바 ‘개화기 콘셉트’의 의상을 대여해 입어보거나 그 시대에 유행했던 소품과 인테리어와 함께 사진을 찍는 등의 행위가 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며 이 같은 콘셉트를 내세운 의상 대여점이나 사진 스튜디오가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유행을 놓치지 않고 롯데월드에서는 지난 2019년 개화기를 주제로 한 축제를 기획해 선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개화기 트렌드’는 2010년대 중반 <암살>의 성공을 계기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드라마 <경성스캔들>(2007)이나 영화 <모던보이>(2008) 등과 같이 암울한 시대를 살아간 청춘들의 이야기를 콘셉트로 ‘시대’보다 ‘청춘’에 방점을 찍은 작품들이 등장했을 때부터 이미 싹이 움트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점점 더 상업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개화기 마케팅’은 대체로 모던걸과 모던보이의 화려한 패션이나 당대 부유층의 인테리어 스타일에만 초점을 맞추며 이 같은 라이프스타일이 가능했던 계층이 친일파 조선 귀족이거나 내지인이라 불렸던 일본인 부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지우고 오히려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맥락을 왜곡하고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권번 소속으로 활동한 기생들의 역사적 맥락을 지운 것은 이 <경합>도 마찬가지다. <경합>에는 줄거리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 위함인지, 권번 기생들의 주요 고객이었던 조선 귀족이나 일본인 고위관료들의 존재는 등장하지 않는다(앞서 언급한 수원 권번 기생 김향화는 자신을 따르는 어린 기생들에게 “조선사람 불효자식한테는 술을 따라도 왜놈에게는 술 주지 말고 권주가 부르지 말아라”라는 당부를 한 바 있는데, 이는 권번 기생의 주요 고객이 일본인이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를 의식한 듯 정구호는 기생의 삶을 다룬 기존의 작품들이 어둡고 비극적인 정조를 띠는 경우가 많지만, <경합>에서는 예비 기생들이 권번에서 교육받으며 최고의 예인이 되어가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으니 걸그룹 콘서트나 TV프로그램을 보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무대를 즐겨달라고 당부했다.

 

기생을 양반 남성들의 노리개가 아닌 전문 예술인으로 재조명하려는 시도는 조선시대 명기 황진이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장미희 주연의 1986년작 영화와 하지원 주연의 2006년작 드라마가 대표적이다. 드라마 <황진이>는 대중에게 익숙한 시서화(詩書畵)에 능한 황진이가 아닌 춤꾼으로서의 모습을 재조명하며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게다가 라이벌 구도는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성공을 보장하는 코드 중 하나다. 특히 사극에서는 드라마 <대장금>(2003)의 성공 이후 앞서 언급한 드라마 <황진이>(2006)나 <선덕여왕>(2009) 등 여성들의 우정과 경쟁을 그린 작품들이 뒤이어 제작되며 라이벌 구도의 흥행 불패를 증명한 바 있다. 

 

그러니 정구호가 기생들의 이야기를 남성의 노리개로 살아야 했던 여성의 수난기나 시대와 불화하다 스러져간 예술가의 그것이 아니라 기생들이 우정과 사랑과 경쟁 속에 성장하는 청춘드라마로 제안했을 때, 더욱이 권번 명문으로서의 자부심을 간직한 수원이라는 도시에 위치한 경기아트센터가 이 제안을 거부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장르가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뮤지컬이 아닌 대중화에 목말라 있는 무용, 그것도 가장 고루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한국무용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작품의 무대가 1910년대 권번으로 명확히 설정되면서 <경합>은 그 시절 ‘경성’이라는 도시명으로 집약된 화려함만 취하고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했던 역사적 배경은 지워버리는, 앞서 언급한 ‘개화기 트렌드’에 올라탄 작품이 됐다. 2019년 정동극장 기획공연으로 올려진 뮤지컬 <낭랑긔생>이 한남 권번 소속 기생이었던 강향란의 삶을 모티브로 해 가상의 권번인 한동 권번을 배경으로 기생들의 욕망과 갈등, 성장을 밝은 톤으로 다루면서도 기생들이 예술에만 전념할 수 없었던 식민통치의 엄혹함과 그 아래서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향란의 동료와 연인의 모습을 함께 그림으로써 설득력을 얻은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드라마 <경성스캔들>은 ‘퓨전 로코 사극’이라는, 당시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콘셉트를 통해 항일무장투쟁과 로맨스를 결합시키며 ‘경성’을 문화트렌드의 주요 키워드로 만드는 출발점이 됐다.) 

 

청춘드라마가 된 <경합>의 작품의 분위기는 배정혜 안무의 <춤, 춘향>을 현대의 청춘로맨스로 리메이크한 국립무용단의 <춘상>과 상당히 흡사하다. <춘상> 역시 정구호가 연출과 의상, 무대미술을 맡아 조선 후기라는 배경을 지우고 시대를 현대로 옮겨 졸업파티에서 만난 두 남녀가 집안의 반대와 오해 속에 엇갈림을 반복하다 마침내 다시 만나 변치 않는 사랑을 확인하는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춘상>에서는 조선 후기라는 배경이 지워지며 신분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나 춘향에 대한 변학도의 수청 요구가 모두 사라진 것과 달리(이러한 각색에 대한 의견은 분분할 것이나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경합>은 1910년대 일본이 만든 명칭인 ‘권번’을 배경으로 남겨두면서도 일제강점기라는 당대 현실은 지워버리는 선택적 각색으로 의문을 발생시킨다. 당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독립운동에 투신하거나 다 친일 부역에 앞장선 것은 아니니 시대적 공기를 지워도 작품의 전개에는 별 지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결과적으로 <경합>은 무용 무대에서도 개화기 마케팅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또 하나의 ‘정구호표’ 히트 상품을 예고했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경기도무용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