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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영남춤축제, 원형성과 동시대성의 아름다운 공존: 장순향과 한정미, 2인을 소중히 기록하다

영남춤축제가 잘 끝났다(2023.7.14.-8.12). 축제가 끝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축제에 대한 여운이 길다. 지난해 ‘한국의 탈춤’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기념해서, 개막공연과 폐막공연의 주제는 탈춤이었다. 



비범한 개막공연, 평범한 폐막공연


개막공연 <야류별곡–달의 시간으로 사는 마을>(정신혜 안무, 연출)은 고정 레퍼토리가 되어도 좋겠다. 현재 국립국악원은 전국에 네 곳이다. 서울의 국립국악원 본원과 함께, 남원의 국립민속국악원, 진도의 국립남도국악원과 국립부산국악원이 있다. 국립국악원의 공연작품은 매우 아쉽게도 재연되는 작품이 적다. 매체의 프리뷰에 매우 떠들썩하지만, 진심으로 리뷰를 쓰고 싶은 작품은 거의 없었다. <야류별곡>은 평단과 대중에게 모두 호평 받은 작품으로, 지난 십여 년간 본 4개 국립국악원의 공연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았다.


폐막공연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세 지역의 탈춤을 보는 자리로, 강릉단오제보존회(1967년 지정), 양주별산대놀이(1964년 지정), 봉산탈춤(1967년 지정)을 국립부산국악원 연악당(대극장)에서 순차적으로 보여주었다. 탈춤의 원형적 모습을 알려주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탈춤 특유의 역동성이나 현장성이 별반 느껴지지 못했다. 야외공연이 아닌 무대공연으로 보여준다면 좀 더 고려할 것이 있었어야 했다. 조명이나 음향, 대사나 음악, 연희자의 등퇴장과 동선(動線) 등이 좀 더 세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한국전통춤판, 고려해야 할 것들 


‘한국전통춤판’은 영남춤축제가 해를 거듭하면서 ‘축제의 꽃’이 된 느낌이다. 특히 올해는 전통음악그룹 ‘판’의 음악을 바탕으로 해서 매우 완성도 높은 춤판이 펼쳐졌다. 모두 우수한 기량을 발휘한 것은 분명하나, 한국전통춤판을 보다 키우기 위해선 비판적인 시각도 필요해 보인다. 다음 사항은 앞으로 축제를 준비하면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궁중춤의 질적 향상과 홀춤화 


궁중춤(정재)의 수준 향상이다. 민속무용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역량이 아쉽다. 이들보다 궁중무용을 더 잘 추는 춤꾼들이 떠올랐다. 온나라전통춤경연대회에서 입상한 여러 춤꾼이 기억난다. 그들은 한국전통춤판에 왜 참여하지 않았을까? 한국전통춤판에서 궁중춤과 민속춤의 균형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과 같은 상태가 계속된다면, 마치 정재가 ‘구색 맞추기’가 될 소지가 있다. 과감하게 궁중춤을 포기하거나, 오히려 영남춤축제 안에서 국악원 무용수들의 초청 형식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정재의 발전을 위해선, 선정의 기준을 정재의 독무에 한정하는 것도 풀어야 할 숙제다. 앞으로도 계속 정재의 독무는 춘앵전과 무산향에 한정된다면, 참여의 폭이나 참여자의 수준은 계속 문제가 될 수 있다. 


궁중정재도 시각에 따라서 홀춤(독무)으로 만들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은가? 처용무도 그렇고, 가인전목단도 그렇고, 지금 시대에 꼭 군무로 추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과감한 사고의 전원을 통해서, 궁중무용의 레퍼토리도 홀춤으로 공연하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 앞으로 한국전통춤판이 ‘정재의 홀춤화’에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



마당춤의 레퍼토리 확장과 탈춤의 수용


마당춤도 아쉽긴 하다. 레퍼토리의 확장 면에서도 그렇고, 무대에서의 연희적 측면에서도 그렇다. 현재는 북을 가지고 와서 무대에서 논다. 전라도지방의 북춤이나, 경상도지방의 북춤을 홀춤 형태로 무대에서 연행한다. 관객의 반응은 꽤 좋다. 그러나 이를 착각하면 곤란하다. 승무와 살풀이춤와 같은 정적인 공연 후에, 이러한 동적인 무대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뜨거울 수밖에 없다. 

 

실제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입춤, 한량무 등의 여성과 마찬가지로, 마당춤으로 참여하는 남성춤꾼의 기량도 더 높아지길 기대한다. 여성들의 안방춤이나 대청춤에 대조되는, 남성들의 마당춤을 살리기 위해서도 레퍼토리의 확장이 필요하다. 지금과 같이 북춤 또는 상모돌리기 등 농악을 기반으로 한 춤뿐 아니라, 탈춤도 적극 수용하는 할 지점에 와 있다.


탈춤에서 대사를 배제하고 홀춤 중심의 공연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실제 해방 후 김천흥이란 무용가가 무용계에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바로 혼자 추는 탈춤을 통해서였다. 또한 요즘 연희전공자들이 홀춤 형태의 탈춤공연을 자주 하고 있고, 이것이 관객들의 좋은 반응을 이뤄내고 있다. 이번 영남춤 축제가 탈춤을 주제로 개폐막공연을 했듯이, 한국전통춤판에서도 앞으로는 탈춤을 수용할 단계에 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전통춤판도 발전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한국전통예술의 가(歌), 무(舞), 악(樂), 희(戱)가 균형적으로 발전하면서 풍성해질 것이다. 


그리운 하보경(河寶鏡)옹 “수양버들 일렁이듯, 뻣뻣한 곳이 없어야”


영남춤하면, 영남지역의 마당춤하면, 하보경 (河寶鏡, 1906.8.24.-1997.12.2.)이다. “하보경춤의 특징은 장대하고 든든한 체격에 활기 있고 기운찬 신명을 끌어내는 순박한 농부의 건강한 모습으로, 자연의 품안에서 섭리대로 살아가는 꾸미거나 과장시킨 것이 아닌 풍요로운 멋과 의젓함이 깃들어 있다.” 하보경 옹이 활동했던 당시, 밀양백중놀이에서의 그의 춤을 보고 누군가 이렇게 평한 바 있다. 


하보경 옹은 생전 이렇게 말했다. “수양버들 일렁이듯 한 군데도 뻣뻣한 곳이 없어야 해.” 이번 영남춤축제의 ‘한국전통춤판’에 마당춤으로 무대에 오른 인물은 물론이고, 영남춤축제에서 마당춤과 관련한 참가자들에게 너무도 해주고 싶은 말이 이것이다. 하보경 선생은 춤을 출 때의 몸은 ‘수양버들’과 같아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을 내 식대로 옮긴다면, ‘몸에서 힘을 빼는 것’이다. 영남춤축제에 오른 많은 춤꾼 중엔 때론 의욕과잉(意欲過剩)으로, 때론 수련부족(修練不足)으로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가기도 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춤꾼 스스로가 자신의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간 것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때론 어떤 춤꾼은 그렇게 추는 춤이 매우 잘 추는 것으로 알고 착각하면서 추는 모습도 발견하게 된다. 


하보경 옹은 말했다. 몸을 수양버들처럼 만들어 놓으면 “그 다음엔 장단만 알면 걸음만 걸어도 춤이 된다”고 말했다. ‘부드러움의 극치’가 이런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양반춤이 나오고, 범부춤이 나오고, 북을 둘러메면 북춤이 된다고 했다. 마당춤으로 한국전통춤판에 참여한 춤꾼이 참으로 명심하고 명심해야 할 말씀이다. 


한국전통춤판, 역차별은 없는가?


세세하게 보면 아쉬움이 있는 건 분명하나, 한국전통춤판에 등장한 춤꾼들은 모두 될 만한 사람이 됐고, 출 만한 사람이 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참가자의 소속을 가린 블라인드 심사다보니, 결과적으로 특정한 무용 동인들이 다수 참가한 결과를 낳았다. 그들이 모두 역량을 갖추고 있기에 뭐라 할 순 없겠으나, 혹시 상대적으로 4개 국립국악원의 단원은 역차별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국립국악원, 국립부산국악원, 국립민속국악원, 국립남도국악원 단원들이라면 오히려 원 내에서의 군무 공연이 아닌, 개인의 자격으로 참가하는 홀춤에 더 목말라 할 것으로 짐작된다. 내년에는 역량을 갖춘 국립국악원 내부의 실력자가 한국전통춤판에서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해주길 기대한다.


2023영남춤축제는 영남춤, 라운드테이블(8.8. 예지당)을 마련해서, ‘대한민국 전통춤의 향방과 영남춤 60년’을 회고했다. 세 가지 주제 중 ‘영남춤과 부산무용협회 60년’을 제 2주제로 삼았다. 진지하고 진솔한 얘기가 오고 가고, 앞으로 영남춤 발전을 위해서 큰 밑거름이 될 것임을 기대한다. 그런데 나와 같은 외부자의 시선에서 보면, 부산무용계에서 회자되고 있는 ‘영남춤’ 혹은 ‘부산무용’과 관련된 인물들을 보면 제한적이어서 아쉬움이 크다. 부산 지역을 기반으로 한 무용가에서 거명되어야 할 인물은 더 없는 것일까?



황무봉과 부산무용


영남춤 또는 부산무용을 얘기할 때, 황무봉(黃舞峰, 1930.10.27.-1995.7.8.)은 매우 중요하다.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태어났다. 중학교(5년제) 때 발레를 배웠고, 이시이바쿠((石井漠)의 춤을 알게 되었다. 1946년에 귀국 후, 외가 고성에 잠시 정착했다. 황무봉에게 큰 영향을 준 무용가는 장추화(張秋華, 1918-?, 월북)로, 그의 문하에서 당시 신흥무용을 익혔다. 이 시기엔 서울서 활동하는 많은 남성무용가와 교류했다. 


‘개천예술제’는 황무봉이란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49년 정부수립을 기념하기 위해 개천절에 시작되었는데, 원래 이름은 ‘영남예술제’였다. 1950년엔 한국전쟁의 발발로 축제가 진행되지 못했고, 1953년 ‘산조’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황무봉류 산조춤’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 시기 황무봉은 진주에서 무용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전통춤에 더욱 눈을 뜨게 되었다. 황무봉 춤과 전통의 연결에는 외가가 있는 고성도 영향을 주었다. 황무봉이 고성오광대에 영향을 받았다. 또한 고성오광대를 춤(동작)으로 정리하는데, 그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시절 김수악(金壽岳, 1926-2009)을 통해 권번춤 내지 교방춤도 배웠다. 제10회 개천예술제(1959)는 당시 문총(文總) 진주지부가 주최했고, 황무봉과 최희선(崔喜仙, 1929-2010)이 무용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부산무용계에 황무봉이 등장한 것은 1956년이다. 당시 그는 부산과 진주를 오고 가면서 활동했다. 스물일곱의 그는 먼저 부산예술학원에서 무용을 지도했다. 이듬해 1957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황무봉 예술무용연구소를 개소했다. 매년 개인무용발표회를 개최하는 등 열성을 보였다. 황무봉은 특히 어린이무용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1959년 12월 31일, 대영극장에서 ‘황무봉아동무용반’ 공연이 있기도 했다. 황무봉이 전통에 눈을 뜬 계기를 제공한 사람은 한영숙(韓英淑, 1920-1989)이다. 1960년대에는 한영숙을 부산으로 초청해, 강습과 공연을 이어갔다. 그의 전통춤이 더욱 깊어지는 시기였다. 


잘 아는 바대로 부산시립무용단이 창단(1973년)될 수 있었던 것은 황무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창단 10년이 되었을 때, 당시 대한민국은 ‘KBS 이산가족 찾기’가 이슈! 비극적인 현실을 낳은 동족상잔의 6·25를 재조명해 보는 작품을 황무봉이 구성, 안무하였다. 황무봉의 몇몇 작품은 부산무용사는 물론 한국무용사에서 비중 있게 기록되어야 한다. 


부산무용의 개척자: 박성옥과 장홍심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황무봉이 부산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1956년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부산무용은 어떠했을까? 어떤 단체 또는 누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을까? 박성옥(朴成玉, 1908-1983)과 장홍심 (張紅心, 1914-1994)이 아주 중요하다. 


일제강점기의 박성옥은 청년 음악학도로 ‘고악(古樂)의 수재(秀才)’로 불렸다. 가야금연주자로 이름을 알렸고, 독특한 악보를 만들어 화제가 되었다. 최승희 무용의 반주자로 활약했고, 최승희 무용의 반주에 필요한 악기를 연구하다가 산조아쟁을 제작하게 되었다. 신무용에 처음 등장한 산조아쟁(소아쟁)은 이후 여성국극에서 매우 중요한 악기로 성장하였다. 박성옥에 의해서 그렇게 시작됐으며, 여성국극의 주인공이 죽는 비극적인 장면엔 어김없이 아쟁이 등장했다. 


해방 후, 1948년엔 여성국극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여성국악동호회가 주최한 <햇님과 달님>(김아부 작)의 음악감독이 박성옥이다. 1949년 <햇님과 달님>은 부산서도 공연했는데, 이즈음 박성옥은 부산에 정착한다. 그는 부산의 학교를 순회하면서 국악기 등을 소개하여 큰 인기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보도한 국악기 제작 및 국악연구의 一人者(일인자)인 朴成玉氏(박성옥씨)의 시내 각 중등학교 순회 연주는 교직원 학생들의 절찬 중에 어제 폐막하였는데 학부형과 일반 국악애호가들의 요청에 따라 곳 공회당에서 2일간 일반 공개를 가지리라는데 일시는 미정이라 한다.“ 

(1949.12.23. 부산일보) 

박성옥은 1949년, 장홍심은 1951년에 부산에 정착했다. 장홍심은 한국근현대무용사에서 불운한 예술가였다. 장홍심은 함흥권번에 입적(1925년)한 후, 1930년대 초반 조선권번으로 이적한다. 1934년 한성준과 장홍심은 서로를 알아본다. 한성준은 장홍심의 출중한 기량을 알게 되고, 춤의 기획자이자 안무자이자 연출자라고 할 수 있는 한성준은 장홍심을 통해서 자신의 ‘조선무용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음을 확인한다. 


조선무용과 관련해서 여러 활동을 해 온 한성준은 1937년 12월 28일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발족한다. 이 시절 한성준의 양팔의 역할을 한 인물이 이강선(‘이선’이라고도 함)과 장홍심이다. 이강선은 장홍심보다 연배가 위인데, 둘은 팽팽한 라이벌 관계였다고 전해진다. 


이외 중요한 인물을 더 꼽는다면 권오봉이다. 한성준의 대표작인 <태평무>와 <신선무> 등에서 이강선, 장홍심, 권오봉은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38년과 1940년, 한성준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공연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세 사람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훗날 한성준의 춤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 한영숙(1920-1989)과 강선영(1925-2016)이다. 


장홍심은 불운한 예술가였다. 한성준 타계 후,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고, 최승희 등과의 인연으로 한때 인기를 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에서 장홍심의 활동은 제약이 많았다. 한국전쟁기에 부산에 정착했고, 그 시절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매방과의 인연 속에서, 그녀의 삶도 달라졌다. 이매방은 더 유명해졌지만, 장홍심은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부산에서의 박성옥과 장홍심은 모두 여성국극과 인연이 있다. 박성옥은 음악을 담당했고, 장홍심은 안무를 담당했다. 조선권번(朝鮮券番) 출신의 김소희와 장홍심은 일찍이 서로 인연이 있었다. 한국전쟁기 여성국극은 부산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끈다. 김소희와 박귀희는 장홍심을 여성국극의 안무자로 발탁해서 활동했고, 이런 인연을 시작으로 이매방도 이후 여성국극의 안무를 하게 된다. 


장홍심은 삶의 인연 등의 어려움 속에서, 부산을 등지고 서울에 정착(1967년) 한다. 장홍심이 서울의 정착에 큰 역할을 해준 인물이 판소리명창 박초월이다. 장홍심은 박초월국악연구소에서 무용을 전담했다. 한국영화 <춘향>(1968년, 김수용 감독, 홍세미 신성일 주연)의 스크롤에도 이름을 올렸다. 판소리 인간문화재 박초월이 창 지도를 하고, 직접 출연을 했고, 장홍심이 안무를 담당했다.

 

부산무용협회(釜山舞踊協會) 1회공연


1950년대 박성옥은 충무동 3가에서 무용연구소를 운영했다. 10여 년 간 그는 부산무용의 중심이 되었다. 여기서 그는 어린이무용에 치중해서 ‘대한어린이무용단’이란 공연단을 조직했다. 훗날 리틀엔젤스와 같은 형태의 공연이 이미 1950년대에 부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거다. 


1949년 부산에 정착한 박성옥이 십여 년 간 부산에서 했던 활동은 매우 소중하다. 부산의 국악과 무용 관계자라면 잘 알아야 하고, 또한 그 흐름의 의미를 짚고 지금이라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이어갈 필요가 있다.


1959년 12월 9일 그 첫 번째 막을 올린 HLKU의 방송문화제는 1960년 두 번째를 맞이했다. 당시 신문에서는 국악과 관련한 박성옥의 활동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KU는 이제 만 1년 8개월 동안의 향상을 밑바탕으로 있는 그대로의 내용을 백만 청중에게 공개하게 되는데, 여기서 잠시 그 프로 진행내용과 스탭, 캐스트 등을 훑어보기로 한다“고 하면서, “박성옥씨가 이끄는 국악민요반주로 이용태 「프로듀서」가 담당한 「민요강산」인데 이「프로」에선 한국고전무용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박성옥무용연구소는 김백봉 무용연구소 부산지부가 되어서 1960년 5월 26일 개소했다. 박성옥은 이후 서울로 이주해서, 선화어린이무용단(리틀엔젤스)의 창단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박성옥은 부산무용협회의 창단공연이 있기 전부터, 개인공연을 하면서 역량을 과시했다. 1954년 12월 20일 부산일보에서 그의 공연을 다루고 있다. 박성옥을 “10세 전후의 어린이들을 악무(樂舞) 양도(兩道)로 잘 지도해 낸 박성옥의 훌륭한”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기사를 옮기면 이렇다. 


“「모던·땐스」가 현저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 할지라도 「조선적」 전통의 미를 계승하는 고전무용은 그것대로 시대적 예술성을 지니고 있는 귀중한 민족문화이다. 이것은 옳은 전수자와 옳은 계승자 없이는 그 고유성을 존속시킬 수 없으며 그 전통을 시대의식과 시대감정에 반영시켜 현대화할 수도 없다. 이번 고전악무 양도에 일가를 이룬 박성옥이 주재하는 「대한음악무용연구소」가 제1회 신작무용발표회를 가졌다는 것은 첫째 금년을 통해서 부산서 공연된 최초의 단 한 번의 무용발표회였고 둘째로 10세 전후의 어린 세대의 무용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큰 것이다.

제1부 소품집에서는 「옥적(견우직녀)」(김혜성)은 안무가 약해서 모티-후가 잘 살지 못하였고 무용은 부단한 연마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했으며 「고독」(조숙자)은 기품 있는 후오-ㅁ이 좋았고 「정아애사」(유설옥)는 유의 착실한 기교와 표정이 내용을 잘 살렷다. 중국여성인 유의 조선춤도 좋았다.

군무 「무용의 생태」(전원)는 조선무용의 체계화가 약하고 인도무용 「다부라의리즘」(전원)은 몇몇 멘버- 외는 잘 맞지 않았다.

양무 「들장미」(강민자) 「부채춤」(옥명혜)은 귀엽고 개성을 살린 작품이었다. 「가면무」(정귀분)는 정의 태연한 태도 대담한 포-즈가 무대를 잘 살렸다.

소품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북춤」(표영옥)이었다 세련된 테크니크과 끝까지 밀고 가는 기력은 훌륭한 것이었으며 일가를 이룬 무용가의 무대를 보는 것과 같은 감흥을 자아냈다. 김은 전도유망한 소질 있는 어린 무용가다.

제2부 무용극 「토끼전」은 꿈과 같은 동화의 세계를 그려냈고 등장하는 어린이들도 자기 배역을 즐기며 개성을 살려서 잘 협조했다.

전 곡목을 통하여 무대에 특이한 감흥을 자아낸 것은 박성옥 김옥진 이병성 3인의 무대 뒤에 숨은 아악기의 탁월한 연주였다. 조명은 대체로 좋았으나 센터의 효용의 적은 것은 유감이었다. 의상 미술은 좋았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것은 10세 전후의 어린이들을 악무 양도로 잘 지도해 낸 박성옥의 훌륭한 과능과 정열인 것이다. 지성과 감성이 육체를 구사하면서 창조하는 무용예술의 세계에 젊은 세대의 훌륭한 계승자들이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갈려고 애쓰고 있는 그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박성옥의 대한무용연구소 vs. 장홍심의 동양무용연구소


1951년 부산에 정착한 장홍심도 큰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1953년 부산 초량에 동양무용연구소를 개소한다. 박성옥이 어린이 레퍼토리를 새로 계발했던 반면에, 장홍심은 오히려 성인의 레퍼토리를 어린이들이 수용해서 또 다른 인기를 얻었다. 장홍심의 가장 큰 장기인 ‘검무’와 함께, 동양무용연구소 출신은 어린이일지라도 모두 승무에 잘 춰서 화제가 되었다. 


부산지역에서 ‘부산무용협회’라는 명칭으로, 처음으로 공연을 한 것은 1955년이다. ‘송년예술무용제’라는 제목으로 펼쳐진 공연으로, 부산일보 주최로 영남극장에서 열렸다. ‘부산무용협회 1회공연 (釜山舞踊協會 一回公演)’이라는 제목에, ‘항도(港都)서 처음 보는 성전(盛典)’이라는 부제가 붙었고,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번 본사에서는 재부 무용계의 정수를 망라하여 금년도 「송년 예술 무용제」를 가지기로 하였습니다. 이번의 무용제는 부산무용협회의 제1회 공연을 겸하는 것으로서 항도 초유의 향기로운 무용제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본사에서는 사계에 관심을 둔 인사는 물론 그밖에도 널리 각 가정에 진실한 무용의 훈향을 전하기 위하여 「대한음악연구회」의 천재적인 어린이 연구생들의 묘기도 아울러 공개하기로 하였아오니 기필코 만도 인사들의 기대에 상부할 것으로 확신하는 바입니다. 무용제의 요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최 부산일보사, 후원 부산예술문화협회

◈시일 12월 21·22일 양일간 낮=3시부터 밤=7시부터

◈장소 영남극장

◈출연자 김선화, 장홍심, 정막, 박성옥, 김기출, 조숙자, 이정원, 강애자, 정순이, 김정분

◈기타 대한음악무용연구생 동양무용연구생

1960년까지 부산무용의 연구소가 장홍심의 동양무용연구소와 박성옥의 박성옥무용연구소였다면, 1961년부터는 박성옥의 역할을 황무봉이 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1961년 부산시청회의실에서는 황무봉 무용연구소와 장홍심의 동양무용연구소가 함께 출연을 해서 공연을 하게 된다. 


2023 영남춤축제의 한국전통춤판에서 딱 하나를 선정한다면 다섯 번에 걸친 춤판의 대미를 장식한 장순향의 살풀이춤이요, 한국춤 안무가전에서는 단연 〈사자 The Lion〉이다.



장순향이 살려낸 ‘살풀이춤의 원형성’


장순향의 살풀이춤을 보고, 부산출신의 춤꾼 강주미는 “어머니의 어머니, 사랑스럽고 소박하면서도 크나큰 춤을 만나 가슴 벅찬 무대”라고 평했다. 장순향이 춘 살풀이는 요즘 시각으로 보면 고제(古制) 살풀이로, 살풀이춤의 원형이 이렇다. 머리부터 의상까지, 모두 그렇다. 실제 1970년대까지 전국의 여러 지역에서 추는 살풀이춤은 이런 모습이었다. 전문가들이 추는 춤도 그러했거니와,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추는 살풀이춤 또한 그러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식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이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는 춤이다. 


장순향은 김애정의 살풀이춤을 잇고 있다. 김애정은 명창이자, 명무이다. 여성명창으로서는 드물게 적벽가를 잘 부르는 명창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마산 남선권번 출신인데, 군산 소화권번으로 이적하면서 다양한 기예를 만나게 된다. 판소리, 가야금병창은 물론, 승무 검무 살풀이춤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 김애정이다. 김애정이 어떤 인물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넘어서서, 앞으로 더욱 밝혀내서 글을 써야하지 않을까 싶다. 


한정미가 춤으로 풀어낸 ‘탈춤의 동시대성’

 

영남춤축제의 ‘한국춤 안무가전’에서의 감동은 한정미 안무의 〈사자 The Lion〉이다. 한국의 전통예술과 관련한 창작작품들을 볼 때의 상투성이 1도 없는 작품이었다. 

  

우리는 ‘전통예술의 동시대성’을 때론 너무 쉽게 얘기한다. 전통예술을 포함한 전통성을 간직하면서도, 이 시대와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에 대한 화두는 전통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의 즐거운 고민거리임에 틀림없다.


한정미는 확실하게 ‘탈춤의 동시대성’을 찾아냈다. 전통탈춤에서의 사자의 이미지를 잘 포착했을 뿐더러, 그것을 무대에서 잘 구현해냈다. 봉산탈춤이라는 전통을 가져와서, 탈춤을 매개로 해서 ‘동시대성’을 공감하게 하고 있다! 


봉산탈춤의 ‘사자춤’ 과장을 가져와서, 무용적으로나, 무대적으로나 모두 잘 풀어냈다. 사자춤의 이미지를 가지고, 이 시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무용적인 이야기를 관객들이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어떤 창작춤에서는 이미지는 있으되, 그것이 이야기와 연결이 되지 않아서 아쉽고, 어떤 춤판에서 스토리텔링은 비교적 좋으나, 그것이 뚜렷한 이미지와 연결되어 아쉬운 경우가 대부분인데, 한정미는 ‘이미지’와 ‘이야기’를 잘 결합할 줄 알았다. ‘사자’라는 전통적인 이미지를 가져와서 ‘The Lion’이란 이야기를 술술 잘 풀어내고 있었다. 


한국의 전통예술 특유의 놀이성과 제의성을 적절하게 융합할 줄 알았다. ‘사자’를 다중의 의미로 설정하고 있는 듯 보였는데, 특히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서의 사자를 설정하면서, 사자를 관객들이 보는 입장에 따라서 저마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고 있었다. 이런 다의(多義)적인 형태가 무척 마음에 들었으며, 마치 영화라고 치면 ‘열린 결말’과 같이 관객들이 작품 속에 파고들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렉처콘서트, 올해가 개론이라면, 내년은 각론이길


이번 2023 영남춤축제에는 ‘춤음악, 렉처콘서트 <즉흥>’(7.22, 국립부산국악원 연악당)도 있었다. 이에 대한 국립부산국악원의 내부적 반응은 좋은 것 같다. 춤과 음악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만큼, 춤과 음악의 상호관련성에 대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어 보인다. 강연은 한성준을 중심으로 한영숙, 강선영, 김숙자, 이매방의 춤, 지영희와 성금연의 춤반주음악에 관해서 정리한 내용이었다.


한성준과 연관된 춤 중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춤인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에 관해서 다루고 있는 것이 렉처의 특징이자 한계였다. 앞으로 한성준의 춤을 제대로 이해하는 위해선 이런 세 종목에서 벗어나야 한다. 2023년 올해의 렉처콘서트가 개론 또는 총론적인 성격으로 본다면, 앞으로는 좀 더 심화(深化)된 내용을 통해서 연구와 연행을 통섭(統攝)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길 바란다. 한성준의 춤에 관한 기록을 바탕으로 해서 앞으로는 자료에 근거한 상상력으로 한성준의 무대춤이 새롭게 재연되길 바란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국립부산국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