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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를 기대한다: 명무에서 新명무로–9인 남성 전통춤전

대한민국 최초 남무(男舞) 공연은 언제 열렸나? 1993년 11월 16일, 호암아트홀에서 펼쳐진 ‘전통명무 7인 무대’가 처음이다. 7인은 누구였나? 춘앵전의 이흥구, 동래한량춤의 김진홍이 출연했다. 당시 전통춤의 ‘빅5’라 할 수 있는 5인의 명무를 한자리에서 본다는데 화제가 집중됐다.


전통춤 5인방: 조흥동, 채상묵, 국수호, 정재만, 임이조


이 날, 5인의 명무는 각각 어떤 춤을 추었나? 조흥동의 태평무, 채상묵의 승무, 국수호의 태평산조, 정재만(1948-2014)의 허튼살풀이, 임이조(1950-2013)의 살풀이춤이 펼쳐졌다. 이 공연의 큰 의미는 무얼까? 해방 이후 전통춤을 이끌어온 무용가를 뒤이은 세대의 춤맥(脈)을 확인했다. 조택원(1907-1976), 김천흥(1909-2007), 한영숙(1920-1989), 박금슬(1922-1983), 강선영(1925-2016), 이매방(1925-2015), 송범(1926-2007), 김진걸(1926-2008)의 춤을 정통으로 잇는 7인의 무용가의 건재(健在)함을 확인했다.


20세기 명무전 vs. 전통명무 7인 무대


‘전통명무 7인무대’는 명무전(名舞展)과 어떻게 다른가? 1978년 12월 8일, 서울예고 강당에서 열린, 무용학자 정병호(1927-2011)가 회장을 맡은 한국전통무용연구회가 주최한 공연에서 ‘名舞展’을 타이틀로 내건 최초의 공연이다. 이미 지방에서도 명무전이란 용어가 등장한 공연이 있긴 했다. 그러나 명실상부한 명무전의 효시는 바로 이 공연이다.


당시 명무전은 한국 사회의 전반적 맥락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나? 1970년대 한국은 산업국가로 성장한다. 이른바 ‘근대화’의 과정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전(前) 근대에 대한 연민이 상대적으로 커졌다. 월간 <뿌리깊은 나무>가 기획 연재한 『숨어 사는 외톨박이』(1977년) 단행본이 나왔다. 정치권 혹은 제도권에서의 ‘새마을 운동’과 ‘근대화’의 반작용으로, 문화권 혹은 비제도권에서는 ‘근대 이전의 전통’ 또는 ‘근대 이전의 민속’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민중’에 대한 존재와 그들의 문화적 성과를 주목하게 되었다. ‘명무전’도 이와 같은 맥락과 연관된다. 지금은 ‘명무전’ 또는 당시 명무의 예술적 가치를 매우 존중하지만,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숨어있는’ 또는 ‘살아남은’ 전통 또는 민속에 대한 가치에 대한 주목과 연관된다. 당시의 명무전에 출연한 인물들은 예술성을 충족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보다는 명무의 춤을 잔존문화(殘存文化; surviving culture)로 보는 시각이 더 우세했다.


한국전통무용연구회가 효시가 된 명무전은, 이후 서울시립무용단과 국립무용단에서 명무전을 통해서 활기를 띠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명무전은 이제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으며, 이제 더 이상 명무를 ‘잔존문화’의 영역에서 바라보지 않았다. 당시의 춤꾼들은 이제 배워서 이어가야할 춤유산이라는 생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들어선 특정 몇몇 개인의 열정과 노력으로 명무전은 이어졌다.


그러함에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명무전에 출연한 분들이 대단했다. 그들을 통해서 과거 한국춤의 맥을 확인하고, 그들을 통해서 이후 한국춤의 외연이 확정된 건 분명하다. 그러나 ‘무대에서 완성도가 높은 춤’을 선보인 명무는 많지 않다. ‘춤을 저렇게도 출 수 있구나’, ‘저렇게 춰도, 그게 우리춤의 한 맥(脈)으로 볼 수 있겠구나’, ‘저런 사위를 바탕으로 새로운 전통춤이 나올 수 있겠다’ 등 스스로 여러 생각을 오갔다.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우리의 무용계는 극장무용에만 치중했다. 명무전은 그동안 우리가 익숙하게 길들어진 ‘극장무용과 전혀 다른’ 안방춤, 대청춤, 마당춤의 가치를 일깨웠다. 그러나 다시금 분명하게 짚어야 할 건, 명무전의 춤 중에는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예술적 완성도, 하나의 춤으로서의 논리적 완결성은 채워지지 않았다는 점은 솔직하게 짚을 필요가 있다.


1990년대 ‘명무전’이 한국춤 공연의 한 형태로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전통명무 7인 무대’의 무대의 의미는 단순히 ‘남성’무용가의 공연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여기서 춤춘 7인을 통해서 모두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완성도와 완결성’을 갖췄다는 걸 확인했다. 이들이 춤을 추는 무대에서, 마치 후광(後光)처럼 아우라(aura)가 느껴졌다. 아우라란 ‘예술의 원작이 갖는 신비한 분위기나 예술의 유일성’을 뜻한다. ‘전통명무 7인 무대’에선 7인의 명무를 통해서 ‘인체로부터 발산되는 영혼적인 에너지’가 객석에도 전달되었다고 느꼈다면, 과거에 대한 과장 또는 미화라고 여길까?


명무 vs. 新명무


시댄스를 통해서 선보인 ‘명무에서 新명무로’는 올해가 세 번째로 ‘9인 남성 전통춤전’이었다(2023.9.14. 서울남산국악당). 여기서는 ‘新명무’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 굳이 따져 볼 생각은 없다. 학자나 평론가의 대부분은 자신들에 의해서 개념과 범주가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오산이다. 예술적인 개념은 실제 공연이나 작품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더 많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예술 생태계가 평론가 또는 학자의 의도 또는 바람대로 진행되는 건 결코 아니다. 예술에 있어서는 오히려 ‘현장’에서 일정 기간 축적된 결과물을 통해서 하나의 개념이 형성되고, 그것이 하나의 중요한 ‘현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할 때, 이런 ‘현장과 현상 사이’에서 설립된 신조어가 하나의 개념 또는 범주로 정착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 명무라는 개념에 준(準)해서 ‘新명무’를 파악하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고 본다. 만약 시댄스에서 3년을 계속해온 ‘新명무’ 공연이 10년에 이르게 되고, 이 기획의 밑바탕에서 관통하고 있는 일관적 흐름이 있고, 그것이 춤계에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면, 이전 시대의 ‘명무’와 다른 ‘新명무’는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新명무’라는 타이틀로 공연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新명무’는 무엇이며, 이것이 ‘기존한 명무와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오히려 더욱 분명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나 이 글은 가치중립적 입장에서 쓰는 평문인 관계로 ‘新명무’라는 용어는 자제하겠다. 대신 ‘춤꾼’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해서 그들(新명무)의 춤을 보다 객관적으로 다소 냉정하게 바라보겠다.


사유 vs. 여유


일단 ‘9인 남성 전통춤전’을 보면서, 춤꾼들을 두 개의 유형 또는 흐름으로 가를 수 있었다. 한쪽은 사유(思惟)요, 또 한쪽은 여유(餘裕)였다. 사유에 해당하는 춤꾼은 안덕기, 이중규, 황재섭, 정혁준이요, 여유에 해당하는 춤꾼은 김현태, 박영수, 김승일, 김용철이다. 사유와 여유의 이분법에 해당하기 어려운 춤이 있다. 최병재는 모호하다. 사유와 여유, 그것을 다 품고 있거나, 그 중간에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국춤계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를 대입한다면, 사유가 정중동(靜中動)이라면 여유는 동중정(動中靜)이다. 정중동의 춤에서는 에너지의 응집(應集)이 느껴졌다. 동중정의 춤에서는 에너지의 발산(發散)이 느껴졌다.


‘동중정의 발산형’의 춤에선 현장에서는 에너지를 발산하는 춤이 박수를 더 많이 받는 게 사살이지만, ‘정중동의 응집형’은 상대적으로 두고두고 음미할 수 있는 춤이다. 정중동은 아이디어(idea) 지향이라면, 동중정은 이미지(image) 지향이었다. 정중동은 ‘죔’이 강했고, 동중정의 춤은 ‘품’이 강했다. 죔이 긴장이라면, 품은 이완이다. 이런 두 부류의 특성을 전제로 해서, 그들의 춤을 개별적으로 살피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김현태 지게춤


김현태는 춤에서 촌부(村夫)가 되었다. 끼가 충만한 촌부였다. 그의 지게춤은 재미있었다. 많은 걸 보여주었다. 보여주려는 의도가 강하게 느껴졌다. 과거 이런 춤의 원형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볼 수 있었다. 일의 현장을 놀이의 현장으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엔 하나의 과정이 있었다. ‘쉼’이다. 일을 하다가 휴식을 취하는 과정(모습)을 담아냈다.


노동요(勞動謠)가 있다면, 노동무(勞動舞)도 존재할 수 있을 거다. ‘일노래’란 개념과 범주가 확실한 것처럼, ‘일춤’이란 개념과 범주도 정해질 수 있다. 이렇게 ‘일춤’이 정착했을 때, 그건 탈춤 등으로 대표되는 ‘마당춤’과 전혀 다른 성격과 춤맥 또한 정착될 수 있다. 김현태의 지게춤에서는 그런 가능성을 보았다.


대개 노동요 등은 집단적 공연형태를 지향했는데, 이렇게 노동무(일춤)를 홀춤으로 정착시키는 것은 매우 신선한 접근일 수 있다. 돌이켜보면, 1960년대에 이런 노동무 형태를 보기도 했었는데, 따져보면 오히려 춤이 예술화되고 무형문화재 종목 속의 춤이 강조되면서, 이러한 형태의 춤맥은 끊어졌다는 말도 가능하다. 김현태를 통해서 다시금 1960년대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일춤’의 형태가 다시금 새롭게 살아나길 바란다.


이번 김현태의 지게춤에 사용된 음악은 남도민요인 <농부가>와 <자진 농부가>였다. 일반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 노래와 김현태의 춤은 잘 어울렸다. 그런데 만약 김현태가 ‘경상도’라는 지역성을 강조하고 싶다면, 이 노래는 그다지 권하고 싶지 않다. 농부가는 전라도 지방의 음악적 특색이 가장 많이 표출되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이중규 나뷔야 청산가자


이중규는 춤에서 단원((檀園))이 되었다. 탈속(脫俗)의 김홍도(金弘道, 1745-1806?)였다. 조선의 풍속화를 통해 춤을 만들어가는 이중규의 연속적인 작업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그림 속의 광경뿐만 아니라, 그림의 문장도 춤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깊이도 느껴졌다.


이 춤은 분명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중규 춤의 밑그림이 된 것은 송화영이다. 그는 언뜻 송화영의 춤같이 보였다. 어떤 측면에서 송화영의 화려함이 이중규의 소박함으로, 송화영의 관능(官能)적 측면을 배제하고, 이중규의 관조(觀照)적 측면이 부각된 것을, 나는 오히려 더 높이 평가하고 싶다.


단원의 <포의풍류도(布衣風流道)>가 춤의 배경. 포의(布衣), 곧 베로 지은 옷의 소박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춤은 일반적으로 꼿꼿한 자세로 춤을 추는 것이 보통인데, 마치 노년의 단원처럼 구부정한 모습으로 춤을 췄다. ‘신로심불로’의 전통이 있는 한국전통춤에서 속세를 버린 노년을 그려낸다는 건 익숙하다. 이중규가 춤으로 그려낸 시기는 장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그 중간 정도로 짐작된다.


그의 춤이 독특한 한 세계를 그려내고자 하는 의도는 분명했다. 노랫가락과 창부타령을 바탕으로 한 경기민요(김보성)와 함께 춤이 잘 흘러가는 건 분명했으나, 춤에서의 ‘포인트’가 느껴지진 않았다. 여기서 포인트라는 건, 춤 속에서의 어떤 중요한 한 부분을 뜻한다. 이중규는 상황과 정서를 잘 그려낸 것을 넘어서서 ‘플러스알파’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이 춤이 갖는 탈속적 경지가 더 깊게 정착될 것 같다.


안덕기 한량무


안덕기는 춤에서 한량이 되었다. 한량(閑良)같지 않은 한량이었다. 오히려 별감(別監)에 가까운 한량이었다. 안덕기의 춤을 나는 내심 별감무(別監舞)라고 부르려 한다. 이건 그의 춤에 대한 상찬(賞讚)이다. 안덕기 자신도 이 춤을 ‘별감무’라는 이름으로 보다 발전시켜주길 희망한다.


우선 ‘지금의’ 한량무를 보자. ‘지금의’ 한량무는 1960년대 이후의 한량무의 흐름을 잇고 있으면, 홀춤이다. 그렇다면 ‘원래의’ 한량무는 무엇인가? 한성준이 처음 만든 한량무는 4인의 춤이다. 스토리가 느껴지는 춤이고, 한성준의 춤 레퍼토리 중에서 가장 대중성이 있는 춤이고, 한성준 자신이 이 춤은 외국인이 보아도 이해하기 쉬운 춤이라고 했다.



한성준 안무의 한량무


1938년 5월 2일, 부민관(현, 서울시의회)에서 선보인 한량무는 4인의 춤이다. 기생 2인과 함께 한량과 대감이 대비되는 춤이었다. ‘늠실늠실한 풍채’의 한량과 ‘재치있는 자태’의 별감이 비교되면서, 이 둘이 ‘서로 훌륭한 쌍벽’을 이뤄야 하는 춤이다. 두 명의 기생은 조역으로, 이 두 사람을 바라보거나, 두 사람 사이에서 갈등하는 역할이다.


1930년대의 시각으로 지금의 한량무를 보면, 한량은 존재하되 별감은 사라진 ‘반쪽짜리’ 춤이다. 그간 한량의 이미지는 참 잘 계승되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에서 남성무용가의 한량춤은 이미 ‘완성도와 완결성’을 가지는 춤으로 정착되었고, 그런 한량무의 수효는 이미 포화일지 모르겠다. 따라서 기존의 명무의 춤을 바탕으로 한 한량무는 이미 신선미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모방적인 측면을 넘어서서 창조적인 측면으로 도달하기 힘들다.


안덕기의 대감무?!


안덕기라는 춤꾼이 의식한 것은, 나는 그의 춤에서 대감무를 보았다. 다소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말한다면, 한량은 상체를 많이 쓰고 들뜨는 느낌이고, 대감은 하체가 안정감이 있고 진중한 모습이어야 한다. 예악(禮樂)에 근거한다면, 대감은 예(禮)에 해당하는 격조(格調)이고, 한량은 악(樂)에 해당하는 흥취(興趣)가 특징이다. 한량무는 ‘굳건한 기상’이 느껴지는 춤이 아니다. 오히려 그건 춤은 ‘대감무’라고 해야 더 맞다. 이건 찬사다.


국립국악원에서 오래도록 진중하게 격식이 살아있는 춤을 추어온 안덕기답게, 앉아서 시작한 안덕기의 춤에는 품격이 느껴졌다. 내 눈에 비친 안덕기의 춤은, 지나치게 도포 자락을 휘날리면서 추는 한량무는 아니었다.


실제 삶 속에서 그러하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을까? 그의 춤에서 ‘한가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규범적인 틀 속 안에서 자신만의 멋을 유지해가는 별감(別監)에 더욱 합당했다. 조선시대로 돌아가자면, 안덕기의 풍모(風貌)는 장원서(掌苑署), 봉상시(奉常寺), 장악원(掌樂院)의 관료와 닮았다. 그의 춤이 대감무가 되길 원하는 입장에서, 그의 춤이 그간의 ‘한가함’과는 다른 ‘특별함’을 드러내주길 바란다.



박영수 학춤


박영수는 춤에서는 백학이 되었다. 어떤 백학이었을까?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고 하고 싶지 않은 학이었다. 이 또한 상찬(賞讚)이다. 어느 순간 높게 날기보다는, 그래서 스스로 만족하거나 때론 지키기보다는, 언제나 ‘일정한 높이를 유지하면서’ 날아가는 흰두루미의 안정감 또는 일상성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냥 학춤이 아닌, ‘박영수’의 학춤이 되기 위해서는 역시 ‘플러스 알파’에 대한 고민이 있어 보인다. 무형문화재 종목에서의 학춤을 ‘잇는’ 측면에서는 매우 우수하지만, 이 시대에 가져와서 자기정체성을 더욱 드러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종목의 특성’을 ‘잇는’ 측면 이상으로, ‘자신의 존재’가 ‘있는’ 학춤으로 거듭나면 더욱더 금상첨화가 될 것 같다.



정혁준 여백


정혁준은 춤에서 시인이 되었다. 고뇌와 번뇌를 거부하는 시인이었다. 몰입보다는 관조를 아는 시인이었다. 정혁준은 춤을 통해서 시인 변영교가 된다. 춤꾼으로 얘기대로 변영교의 시 ‘여백’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누구는 비었다 하고 누구는 찼다고 한다. 누구는 허하다 하고 누구는 실하다 한다. 이 세상 모든 풍진(風塵)이 부글대며 삭나 보다.”라는 대목을 춤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전통예술의 ‘동시대성’을 많이 얘기한다. 이번에 올린 춤들이 다 특징이 있고, 매력적이지만, 동시대성의 측면에서 보면 정혁준을 우선 꼽아야 한다. 전통적인 춤사위에 바탕으로 두고 있지만, 의상과 조명의 도움을 받아서 전통에 몰두하기도 하고, 전통을 벗어나고자 하는 양면성을 동시에 충족시키고 있다. ‘여백’에는 고민의 흔적은 물론이요, 고민의 결과가 존재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新명무’에 대한 개념과 범주 등에선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고 오래도록 고민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는 사안이겠지만, ‘전통성과 창작성 사이에서 춤꾼으로서 드러나는 존재감’을 ‘新명무’의 하나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한다면, 이런 측면에서 정혁준은 빛났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매우 끌렸기에 더욱더 준엄한 잣대를 적용한다면, ‘안무’로서의 정혁준은 빛났으나, ‘댄서’로서의 정혁준은 안무에 미치지 못한 감이 있다. ‘춤’을 위해서 ‘몸’을 좀 더 냉혹하게 다스린다면, 이 작품의 화두일 수 있는 ‘비움’과 ‘채움’의 양면성 또는 동일성이 더욱더 정혁준을 통해서 존재감 있게 전달될 것이다.



김용철 소고춤


김용철은 춤에서 초립동(草笠童)이 되었다. 어떤 초립동이었을까? 기운생동하는 초립동이었다. 자신의 에너지를 객석에 전달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김용철은 동시대의 춤꾼 가운데서, 무대 장악력이 단연 최고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의 소고춤은, 소고춤 특유의 놀이성을 잘 잇고 있다. 춤에서의 ‘해학성’과 춤에서의 ‘역동성’을 동시에 담아낸다는 건 쉽지 않다. 즐겁게 춤판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있되, 그게 매우 정교한 역동성과는 연결되지 않을 때가 있다. 반대로 뛰어난 역동성이 두드러지는 무대에서, 재미있는 위트가 공존하기 또한 쉽지 않다. 김용철은 이 둘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보기 드문 춤꾼이다.



김승일 선비춤 vs. 황재섭 금무


이 둘은 서로 비교하면서 볼 때, 더욱 큰 가치가 발견될 듯하다. 김승일은 춤에서 선비가 되었다.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선비였다. 황재섭은 춤에서 금사(琴師)가 되었다. 일필휘지(一筆揮之)를 아는 거문고명수(名手)였다. 알다시피 두 사람은 모두 국수호를 스승으로 하고 있다. 스승의 춤을 바르게 이어가면서, 자신만의 존재감을 잘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한다면, 김승일의 체(體)요, 황재섭의 용(用)이다. 국수호의 춤을 이어가는 측면에서 보면 더 그렇다. 체(體)가 본질이라면, 용(用)은 작용이다. 체가 법칙이라면, 용은 작용이다. 김승일은 ‘교육자’답게 국수호 춤의 본질적인 면을 잘 아는 것 같다. 이와 다르게 황재섭은 ‘연출가’답게 국수호 춤의 활용적 측면을 잘 알고 있었다. 체용은 둘이 아니다. 한국춤의 큰 맥을 이어갈 두 사람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조심스럽게 조언이 가능하다면,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특성은 더욱 살리면서도, 상대가 갖는 장점을 두루 수용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 주자(朱子, 1130-1200)의 체용(體用)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군자(君子)에게 도(道)라는 것은, 명백하게 드러나 있기도 하고, 미묘하게 감춰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君子之道 費而隱]”


한국춤의 특징을 죔과 품의 이분으로 볼 때, 김승일의 춤이 횡적(橫的)으로 풀려가는 춤이라면, 황재섭의 춤은 종적(縱的)으로 죄어가는 춤이었다. 매듭을 따진다면, 황재섭의 춤사위는 분명하게 매듭을 지으면서 가는 춤이라면, 김승일의 춤사위는 부드럽게 매듭을 풀어가는 춤이었다.


김승일은 ‘잘 흘러가는’ 장점이 있으되, 관객을 다소 느슨하게 해서 긴장감이 풀리는 느낌을 주었다. 황재섭은 ‘잘 엮어가는’ 장점이 있으되, 관객을 다소 긴장시켜서 춤을 즐길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못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건 이 두 춤꾼은 ‘본성적’인 특성이 아닌가 싶다. 쉽게 바뀔 수 있는 건 아니다. 체와 용이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닌 것을 생각해 본다면, 김승일은 ‘체 안에 용’을 어떻게 방법론적으로 수용하느냐가 관건이고, 황재섭은 ‘용 위에 체’를 어떻게 존재론적으로 수용할 것인가가 앞으로 남은 숙제다.



최병재의 홍고승무


최병재는 춤에서 승려(僧侶)가 되었다. 어떤 승려였을까? 고뇌로 번민하는 승려가 아니었다. 세속적인 승려가 아니었다. 이매방의 승무가 매우 세속적이라면, 최병재의 승무는 탈속적(脫俗的)이다. 이매방류 승무의 형식(춤사위)은 잘 가져왔고, 이매방류 승무의 내용(분위기)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매방의 승무가 세속으로 번뇌하는 자아(自我)적인 측면이라면, 최병재의 승무는 여기에서 벗어나서 의식(儀式)적인 측면이 전달되었다.


음악의 선택적인 측면에서도 우수했다. 기존의 법고 승무처럼 삼현육각으로 추는 승무의 끈끈함보다는, 태평소를 중심으로 반주하는 승무의 꿋꿋함이 돋보였다. 앞으로 ‘홍고승무’가 ‘법고승무’와 완전히 변별성을 갖기 위해선, 춤(舞)적인 측면보다는 홍고를 매개로 한 악(樂)적인 측면에 대한 더 큰 고민과 성과가 있길 바란다.



전통명무 7인 무대 vs. 9인 남성 전통춤전


이번 무대의 9인은 분명 무대에서 좋은 춤을 보여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아쉬움이 남는다. 과거 ‘전통명무 7인 무대’와 비교하게 된다. 그 때의 춤의 현실과 지금의 춤계는 꽤 다르기에 단순한 비교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짚어야 할 게 있다. 당시의 ‘남성명무’보다 지금의 ‘남성명무’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그 이유는 무얼까? 그 때는 남성춤꾼이 수적으로 적기에 회소가치(稀少價値)가 있어서 그럴까? 이는 절대 맞지 않는 얘기다.


나는 이번 무대에 오른 9인의 춤꾼에게 정중하게 묻고 싶다. “당신이 춘 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얼마만큼 완성도가 있는 것인가요?” 9인을 통틀어서 얘기한다는 것이 다소 가혹할 순 있겠고, 춤꾼마다의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자신의 이름을 내건 홀춤으로서의 완결성’에는 대체로 아쉬움이 남는 건 분명하다.


완성도는 하나의 작품으로서, 타작품과는 변별되는 ‘존재적 무게감’이다. 완결성은 시작부터 이어지면서 결과를 도출해내는 ‘내재적 추진력’이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9인의 新명무에게선 ‘존재적 무게감’과 ‘내재적 추진력’이 크게 충족되지 못했다. 내가 여기서 그들에게 조언이 가능하다면, 이런 얘길 꼭 해주고 싶다. “더 넣으려 말고, 오히려 빼십시오.”


나의 춤, 나의 숨


춤꾼의 카리스마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무대에서의 완성도와 완결성을 충족하지 않는다면, 결코 춤꾼의 카리스마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런 것이 원인이 되었을까? 1993년의 ‘7인의 명무’와 2023년의 ‘9인의 新명무’의 차이는 ‘자기존재감’이란 키워드로 대별되었다.


그 때나 이제나, 명무나 新명무를 막론하고, 모두 전통춤에 뿌리를 두었다는 건 공통적인 성격이다. 그렇다면 전통춤을 가져와서, ‘전통’이상으로 어떻게 ‘자아’를 명백하게 드러내야 하는 가가 매우 중요하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결국 예술가는 자기존재감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없다.


결국은 아우라(aura)다. 아우라는 결국 창조 없이는 존재하기 힘들다. 아우라란 무엇일까? 놀랍게도 아우라의 어원은 ‘숨’과 연관이 있다. 한국의 전통춤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이 숨이 아닌가? 아우라는 ‘숨’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우라(αύρα/aura)’에서 유래되었다. 명무가 되기 위해선 자기만의 ‘춤 짜기’도 중요시되지만, 자기만의 ‘숨쉬기’도 중요하다. 숨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춤이 매우 달라진다는 것은, 한국춤을 추는 춤꾼일수록 더욱 공감할 것이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서울세계무용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