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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인간의 욕망과 본성을 마주하는 불편함, 그 역설적 아름다움: 볼쇼이발레단 <아뉴타>

소비에트 발레의 영광을 기억하는 사람들 


러시아 국민들에게 볼쇼이발레단의 황금시대는 20세기로 기억되고 있는 듯하다. 갈리나 울라노바(Галина Уланова)는 안나 파블로바(Анна Павлова) 이후로 최고의 러시아 발레리나로 추앙받아 왔으며, 1964년부터 1995년까지 30년 이상을 볼쇼이발레단 예술감독으로 재직했던 유리 그리가로비치(Ю́рий Григороович)의 작품은 여전히 발레단 레퍼토리 인기 1순위이다. 당시에 볼쇼이발레단에서 활동했던 마야 플리세츠카야(Майя Плисецкая)나 예카테리나 막시모바(Екатерина Максимова), 블라디미르 바실리예프(Владимир Васильев) 등의 소련인민예술가(Народный артист СССР)들은 소비에트 발레의 황금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서방세계와의 교류가 차단돼있고 문호가 개방되지 못했던 냉전시기에 러시아 발레의 전통을 이어나가며 국민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발레는 소련 예술의 우수성을 전파하고 문화적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선전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이념적 당파성을 차치하고서라도 20세기 소비에트 발레는 예술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높이 평가받았다. 공산주의의 평등 이념으로 인해 발레는 부르주아 예술이 아닌 노동자들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예술이었고, TV 방영물로도 제작되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예술이었다.

  

Photo by Pavel Rychkov/ Bolshoi Theatre.

 

이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세대들에게 당시의 소비에트 발레는 ‘영광스러운’ 시절이다. 오늘날 더 완벽한 피지컬에 훨씬 고난이도의 테크닉을 구사하는 발레무용수가 출현할지라도 최고의 줄리엣, 최고의 지젤은 갈리나 울라노바이고 최고의 카르멘은 마야 플리세츠카야이다. 스파르타쿠스의 전형은 블라디미르 바실리예프이며 크라수스의 전형은 마리스 리에파(Марис Лиепа)이다. 예카테리나 막시모바는 이상적인 클라라이자 오로라이고 아뉴타이다.


상징적 무용수가 이미 존재하는 역할을 후배 무용수가 이어받아 하게 될 때 그에 따른 부담감은 당연할 것이다. 관객들에게 각인된 그 역할의 전형적 이미지가 있을 테고, 거기에 덮여진 전설적 무용수의 연기가 있다. 이에 도전하는 무용수는 그 역을 새롭게 해석하여 자신만의 색깔로 칠해야 한다. 볼쇼이발레단의 주역 정도라면, 열이면 열 개성 가득한 자기의 배역을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자비한 러시아 관객들은 다시금 전설 속의 무용수를 소환하기 일쑤다. 그 잔인한 평가에 오르는 대표적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아뉴타(Анюта)>이다. 러시아의 많은 관객들은 아뉴타의 춤을 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발레리나의 해석도 나름 참신하고 독특하지만 막시모바의 아뉴타를 능가할 수 없어!”


체호프와 바실리예프가 폭로하는 인간의 본성


제목부터 러시아의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발레 <아뉴타>는 안톤 체호프(Антон Чехов)의 단편소설 『목 위의 안나(Анна на шее; Anna on the Neck)』(1895)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소설의 제목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주인공의 이름 안나를 뜻하기도 하며, 러시아에서 종교인, 군인, 행정관리, 왕실관리 등에게 수여했던 ‘안나 훈장’을 뜻하기도 한다. 러시아어로 “누군가의 목 위에 앉는다”는 것은 ‘부양하다’ ‘얹혀살다’ 등의 의미가 있어, 아내 안나를 부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극 중에서 모데스트가 안나 훈장을 목에 거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의미하기도 한다. 발레 1막의 마지막에서 모데스트의 꿈 장면이 등장하는데, 무대를 가득 차지한 커다란 훈장 모양의 세트 한가운데에서 안나가 성녀의 모습으로 빨간 의상을 두르고 내려온다. 이는 성(聖) 안나 훈장을 형상화한 장면으로 출세욕에 대한 모데스트의 무의식을 시각화하여 드러내고 있다.

  

Photo by Pavel Rychkov/ Bolshoi Theatre.

 

1982년, 마린스키 극장의 리브레토 작가 알렉산드르 벨린스키(Александр Белинский)가 대본을 맡고 당시 볼쇼이 발레리노였던 블라디미르 바실리예프가 안무를 하여 TV용 발레 영화 <아뉴타>가 탄생하였다. 벨린스키와 바실리예프가 공동 감독을 하였으며 소비에트와 러시아의 음악가 발레리 가브릴린(Валерий Гаврилин)이 음악을 맡았고 주인공 아뉴타는 바실리예프의 부인인 막시모바가 춤추었다. 무대용 발레 <아뉴타>가 초연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볼쇼이가 아니라 이탈리아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이었다. 1986년 1월 21일 초연 후 볼쇼이발레단에서는 5월 31일 처음 무대에 올랐다. 한동안 공연이 중단되었던 이 작품은 2022년 6월 다시 볼쇼이의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고, 필자는 가장 최근 공연인 2023년 10월 1일자 공연을 관람했다.


발레 <아뉴타>는 아뉴타 어머니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아뉴타는 러시아 여자의 이름 ‘안나’를 사랑스럽게 부르는 애칭이다. 아버지 표트르와 두 남동생을 두고 졸지에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안나는 나이 많은 하급 관료 모데스트에게 팔려가다시피 결혼을 한다. 작품의 초반에는 사랑하는 대학생 애인이 있음에도 어쩔 수 없이 결혼해야 했던 안나의 청순함과 순수함이 그려진다. 결혼을 했음에도 여전히 남편의 눈치를 보고 동생들과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애처로움이 가련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윽고 모데스트에게 이끌려 간 무도회에서 안나는 세인들의 관심을 받으며 점점 허영 가득한 생활에 도취된다. 젊음과 미모를 이용하여 온갖 남자들에게 선물 세례와 구애를 받을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모데스트는 안나를 출세의 도구로 이용하여, 자신의 상관에게 그녀를 선보여 데이트를 하게 한 후 상관에게 훈장을 받는다. 자신의 아내가 여러 남자들에게 꽃다발을 받고 그들과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도 질투는커녕 그녀를 부추기는 장면에서 모데스트에게 안나는 하나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나의 입장에서는 모데스트와의 결혼으로 가난하고 비루한 삶에서 벗어나 사치와 향락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순정을 희생하여 그 대가로 쾌락적 삶을 얻게 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Photo by Pavel Rychkov/ Bolshoi Theatre.

 

발레의 마지막 장면은 씁쓸하면서도 당혹스럽다. 눈 오는 추운 겨울날, 술독에 빠져 집마저 잃고 거리로 쫓겨난 안나의 아버지와 두 남동생이 거리를 헤맨다. 안나의 옛 애인인 가난한 대학생도 거리에 있다. 삼삼오오 떠들썩하게 모여 있는 사람들의 사이로 안나가 고급 관료들과 부유한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지나간다. 처량하게 길바닥에 쫓겨난 가족들이나 사랑했던 옛 애인도 알아채지 못한 채 흥청망청 쾌락에 빠져 있는 안나의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행복해 보이지만 사정을 알고 나면 마냥 흥겹지만은 않다. 가족과 과거와 양심을 외면하고 물질과 권력을 탐닉하는 안나의 현재 모습은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삶일까, 아니면 체념일까. 이 공허하고 허무한 결말이 불편한 이유는 누구에게나 숨겨져 있는 속물근성을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아름답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불편한 아름다움’은 <아뉴타>를 지배하고 있는 역설적 감정이다.


출세욕과 권력욕, 사치와 허영심의 표상적 존재들


10월 1일의 공연에서 안나는 예카테리나 크리사노바(Екатерина Кысанова)가 맡았고 모데스트는 이고리 츠비르코(Игорь Цвирко)가 춤췄다. 대학생 역으로는 크리사노바와 종종 커플로 춤추는 블라디슬라프 란트라토프(Владислав Лантратов)가 등장했다.


수려한 마스크로 첫사랑을 생각나게끔 하는 란트라토프는 특유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안나의 순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결혼식 전 마지막 만남과 무도회에 다녀온 후 안나의 꿈에 나타나 춤추는 두 사람의 이인무는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사랑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씬이나 티볼트와의 결투 후 헤어지기 전 새벽의 이인무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순정과 안타까움이 아크로바틱한 테크닉에 묻어 나왔다.

  

Photo by Pavel Rychkov/ Bolshoi Theatre.

 

이 아름다운 사랑의 이인무는 그러나 긴 여운을 누리지 못했다. 배불뚝이에 머리가 홀랑 벗겨져 몇 가닥 안 되는 머리를 우스꽝스럽게 옆으로 빗어 넘긴 모데스트의 그로테스크한 춤이 분위기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서류 작업에 묻혀 살면서 부하 직원들에게 권위적인 갑질을 하고 상관에게는 굽실거리며 아첨을 하는 전형적인 하급 관료의 모습이다. 모데스트는 잽싼 발놀림으로 무대를 총총 뛰어다니고 허영 가득한 손짓으로 존재를 과시하였다. 일개 관료들이 마치 업무의 부품처럼 굴러다니고 박자에 맞춰 서류를 주고받는 관공서의 일사불란한 장면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Modern Times)>의 컨베이어 벨트 장면을 연상케 하였다. 관료주의에 대한 체호프의 비판을 바실리예프의 방식으로 형상화하여 풍자한 장면이다.


탄력 있는 점프와 파워풀한 움직임이 독보적인 츠비르코는 우스꽝스럽고 개성 강한 모데스트를 훌륭히 소화했다. 가면을 썼나 싶을 정도로 표정 없는 기괴한 얼굴에 배를 한껏 부풀린 과도한 분장을 하고도 매우 안정적인 움직임을 구사하여 츠비르코만의 모데스트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출세욕에 사로잡혀 자신의 아내를 이용하는 비열한 아첨꾼의 연기를 능청스럽게 해내는 모습이 놀라웠다.

  

Photo by Pavel Rychkov/ Bolshoi Theatre.

 

<아뉴타>에서 가장 유명한 춤은 단연코 안나가 무도회에서 추는 솔로 타란텔라(tarantella)이다. TV용 발레로 방영되면서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막시모바의 춤을 보았을 터이고 그들의 뇌리에 박혀있는 ‘아뉴타의 전형’을 극복하는 것이 이후 ‘아뉴타들’의 과제였을 것이다. 막시모바의 타란텔라는 발랄한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다. 생기 가득한 귀여운 얼굴과 표정으로 무도회장을 누비며 발끝으로 가볍게 춤을 추었다. 모든 남자들이 안나의 매력에 흠뻑 빠져 허우적대지만 안나는 누구에게도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놀리듯 매력을 뿜어냈다. 이 무도회를 기점으로 안나는 순진무구함에서 벗어나 사치스러운 상류사회의 여왕으로 등극한다.


크리사노바의 특징은 개성적인 마스크와 대담한 움직임, 안정적인 테크닉이다. 우아한 몸짓의 공주나 귀족 스타일의 역할보다 야생마와 같은 날 것의 움직임을 구사할 때 그녀의 매력은 배가된다. <돈키호테>의 키트리나 장-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의 카타리나는 그녀에게 딱 맞는 역할이다. 아니나 다를까. 크리사노바의 안나는 당돌했다. 수줍고 청순했던 소녀에서 세상의 물정에 물들어 가는 안나라기보다 인간의 속물적 본성을 이미 간파하고서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고 즐기는 콧대 높은 안나였다. 빠른 포인트 워크로 발재간을 부리다가 남자들을 희롱하고는 쏙 빠지는 익살스러움에는 재치가 묻어났으며, 발뒤꿈치로 귀엽게 걷다가도 곧바로 화려하게 구사하는 턴과 점프에는 여유로움이 있었다. 이로써 세인들의 추앙을 받으며 그 시선을 즐기는, 크리사노바만의 새로운 아뉴타 캐릭터가 창조되었다.


특정 문화권의 문학 작품에 기초한 작품이 그렇듯, <아뉴타> 역시도 19세기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풍부하다면 그만큼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권력과 부, 출세와 물질에 대한 인간의 본성적 욕망을 그려내고 있는 체호프의 보편적 테마에 더하여 바실리예프의 훌륭한 안무와 연출로 인해 <아뉴타>는 충분히 사랑받는 ‘러시아 발레’의 한 작품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1980년대 소비에트 드라마 발레 특유의 과장된 표정이나 연극적 움직임이 그대로 남아있어 지금 보기에 다소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이마저도 상당히 러시아스러운 매력으로 정겹게 다가왔다. 이미 굳건하게 축적된 고전발레와 새로이 창작되고 있는 모던 레퍼토리와 더불어, 발레 <아뉴타>는 소비에트 시절의 귀중한 발레 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갖는다.

  

Photo by Pavel Rychkov/ Bolshoi Theatre.

 

 

글_ 이희나(춤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