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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통해 ‘장르 무용’의 정체성을 확보하다: Dance Project EGERO <수구루지>Ⅱ


지난 11월 10일(금) 부산문화회관 중극장에서 Dance Project EGERO의 <수구루지>(안무, 연출 이용진)가 무대에 올랐다. 이 공연은 (재)부산문화회관이 주최한 2023년 부산공연 콘텐츠 페스타에서 선정한 세 작품 중 하나이다. <수구루지>는 2021년 7월 초연 때부터 ‘처음 보지만 낯설지 않은 이야기, 동서양 이야기들이 그림과 판소리, 전통 연희와 어우러진’ 오락 무용을 표방했다. 무용에서는 다소 낯선 ‘장르 무용’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무용 장르를 춤의 형식과 발생을 기준으로 발레, 한국무용, 현대무용으로 나누는데, 여기서 말하는 ‘장르 무용’은 영화나 소설에서 판타지, 코미디, 로맨스물로 구분하는 것처럼 오락 무용을 주제에 따라 하나의 장르 형식으로 구분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무용이 다루는 주제는 대체로 무겁다. 인간 실존에 관한 여러 질문, 종교적 의미에서 차용한 구원, 사랑, 증오 등 인간의 보편적 감정 등을 다룬다. <수구루지>는 형식, 구성, 주제로 볼 때 기존 구분으로 규정하기 애매하다. 이런 이유로 <수구루지>는 무용에서 하나의 장르를 창출하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초연 때 <수구루지>는 몇 가지 단점이 있었다. 연출 방향부터 연극적 요소와 춤의 균형을 어떻게 조정할지 뚜렷하지 않았다. 무용 작품이었지만, 춤이 약하고 극적 서사를 따라가기 바빴다. 시도는 좋았지만, 완성도가 따라주지 못했다. 


2년 후 이번 공연에서 <수구루지>는 여러 면에서 크게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오락을 추구하는 ‘장르 무용’의 면모를 확고히 다졌다. 공연 팸플릿에서 ‘어른들이여, 더 이상 아이들 때문에 공연장을 갈 수 없다 말하지 마라. 그래서 만들었다. 무용, 판소리, 전통연희, 그림동화가 어우러져 처음 보지만 왠지 익숙한 느낌으로 다가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뒤죽박죽 동화 활극 물’임을 선언한다. 초연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동화 활극 물’이란 개념이 보인다. 관객층을 분명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실제로 공연장을 찾은 관객 중 많은 수가 아이와 함께 온 가족이다. 기성 무용가도 가족과 함께 관람했고, 무용학원에서 아이들을 단체로 데리고 온 경우도 있었다. 공연 중 여러 차례 박수가 터졌고, 어린 관객들의 호응도 좋았다.



줄거리의 근간은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 스크루지 이야기이다. 여기에 심청전, 별주부전, 오즈의 마법사, 빨간 망토, 수영야류, 북청사자놀음이 얽히고설킨다. 그야말로 뒤죽박죽 시끌벅적한 이야기를 애니메이션과 판소리로 끌고 간다. 소리 없는 애니메이션에 판소리가 변사처럼 해설을 붙여 마치 무성 영화를 보는 착각이 들 정도로 조화롭고 균형이 있었다. 여러 탈춤에 나오는 말뚝이는 천민 출신인데, 세월이 지나 3대를 내려오면서 말뚝이는 아랫사람에게 갑질하는 존재가 되었다. 3대 말뚝이가 비서와 함께 하와이로 여행 가는 중에 비행기 사고로 시공간이 얽힌 숲으로 떨어지고, 이들을 중심으로 여러 이야기에서 차용한 인물이 뒤섞인다. 그들은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오주산으로 향해 자기들이 처한 문제의 해결을 바란다. 이런저런 상황을 거쳐 말뚝이와 비서는 현실로 돌아가는데, 이 모든 이야기가 말뚝이가 꾼 꿈인 듯하다. 물론 꿈인지 현실인지 애매한 뉘앙스를 남기기는 한다.



초연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깔끔하게 정리되었고, 춤을 강화하였는데, 동화적 전개라고 해도 춤은 전혀 동화적이지 않았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춤마저 어린이용으로 짰다면, 이 작품은 평범한 아동 무용극이었을 것이다. 춤의 수준을 낮추지 않은 것 때문에 <수구루지>는 장르 무용이 될 수 있었다. 무용 작품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고 오락 무용이라는 정체성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춤을 적당한 수준으로 살려낸 덕분에 무용계 관객의 만족까지 끌어내어 그들이 안무자의 의도에 공감할 수 있게 했다. 


이번 공연으로 <수구루지>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는데, 마당극 형식을 차용한 마당 춤극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애니메이션을 활용한 부분을 마당에서 어떻게 표현할지만 해결한다면 이 가능성은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 <수구루지> 앞부분에 배치한 〈사자, who〉도 야외에서 더 빛을 발할 수 있는 작품이다. 판소리도 그렇고, 육면체 큐브를 이용한 간결한 장면 전환, 극적 조명 효과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는 점, 라이브 반주를 활용하면 흥을 더 끌어 올릴 수 있는 전개 방식, 관객의 호응과 개입을 쉽게 유도할 수 있는 점 등은 <수구루지>가 마당 춤극으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인다. 하나의 작품을 형식 변화로 다양한 환경에서 공연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코믹, 위트, 유머를 중시하는 현대무용 단체’인 Dance Project EGERO에 안성맞춤이 아닌가 싶다.



‘차용(appropriation)’의 의미는 이미 나와 있는 것을 새로운 것과 합성해 또 다른 작품을 창조하는 제작 방식이다. <수구루지>는 기본적으로 차용이지만, 예술 기법으로써 차용이 포괄하는 대부분의 기법을 망라할 수 있을 만큼 복합적이다. 손에 닿는 대로 아무것이나 이용하는 브리꼴라쥬, 이미 완성된 작품을 이용해 닮은 작품을 만들어내 의도적으로 개성과 상상력을 포기하는 샘플링, 원본에서 따온 것을 수정해서 복제하거나 조각들을 짜 맞추어 명백히 모방하는 패스티시, 다른 사람의 작품을 모방해 자기 작품에 풍자적으로 집어넣는 패러디가 혼재해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객석을 적극 이용해 프로시니엄 무대의 한계를 넘어서기까지 한다. 초연 리뷰에서 <수구루지>의 미덕을 “‘오락’을 표방한 허를 찌르는 시도는 부조리가 널려있는 현실을 외면한 채 추상과 정념에 몰두하는 기성 춤 계를 향한 경쾌한 도발이다.”라고 표현하였다. 전체적으로 정리해 장르적 정체성을 뚜렷하게 정리 한 이번 공연은 한 가지 미덕을 더했다. 차세대 관객이 무용 작품을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시도를 한 것이다. <수구루지>는 동화적 상상력을 근간으로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작품이면서 춤에서는 타협하지 않았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다 보면 생각지 못한 어려움에 부딪힌다. 그렇다고 해도 믿음을 가지고 가던 길을 가보라고 권한다. 분명히 장르 무용의 열풍이 불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글_ 이상헌(춤평론가)

사진제공_ 박병민(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