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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과 삶의 긴 여정에 대한 조명: 배정혜 in 80years

 

<연산조> 사진_ 이재훈

 

한국 창작춤에 있어서 배정혜 선생의 발자취는 대단할 수밖에 없다. 3살 때 춤을 시작해 5세때 장추화무용연구소에 최연소로 입문했고, 8세 때 첫 무대를 가졌고 12살 때 첫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이렇듯 무용계에 입지전적인 인물로 혜성같이 등장한 그녀는 춤에 한 평생을 바쳐왔다. 춤에 있어서 한국춤 호흡의 이름으로 빚어지는 동작, 춤언어라는 독창적 방법론을 도입해 한국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국문과 출신인 만큼 풍부한 문학성을 바탕으로 작품을 안무해 1995년 ‘가장 문학적인 무용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춤의 영역을 넓히면서 국립국악원 상임안무자, 서울시무용단장, 국립무용단장을 거치면서 소품뿐만 아니라 대작을 통한 그녀의 작품세계와 활동의 폭이 크고 깊어졌다.  


춤에 대한 열정은 작품활동에만 그치지 않았다. 새롭고 뛰어난 춤꾼의 배출이라는 점에서 한국춤의 교육법 연구에 매진했으며 그 결과 선화예술중고등학교 무용부장으로 10년간 재직하며 체계적인 춤교육법인 ‘바기본’을 완성했다. 전통춤의 정수만을 모은 12가지 하체호흡법과 상체 호흡법은 한국춤을 추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신체단련 훈련법으로 자리 잡았고, 선화예술중고등학교를 나온 필자도 주변 친구들이 힘들게 수련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만큼 어렵지만 춤꾼의 기량 향상과 잘 추는 춤을 일반화시키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한국춤뿐만 아니라 무용계의 큰 스승인 배정혜 선생의 공연이 6월 15-18일 세종M씨어터에서 특별하게 있었다. 2014년 ‘배정혜 춤 70년’공연으로 시작된 신전통 시리즈는 ‘배정혜 춤 80년’을 맞아 더욱 빛을 발했다. 그동안의 신전통 작품 중 대표작인 <사랑가>, <흥푸리>, <풍류장고>, <북춤>, <궁> 그리고 군무로 구성한 <연산조>, <부채현금>, <춘설>, 연<화경 승무> 등을 그녀의 제자들이 선보였다. 그 외에도 국수호, 김매자, 정혜진, 김수현, 윤미라, 김용철, 심지어 현대무용가 김남진까지 쟁쟁한 무용가들을 초청해 4일간의 춤 여정으로 진행되었다. 4일간 레퍼토리가 조금씩 상이했는데, 필자는 첫날 15일 공연을 관람했고 배정혜 선생이 심살풀이를 직접 무대에서 선보였다. 예술감독은 배정혜 선생이었고, 연출 이희자, 사회 심숙경, 총진행 김수현, 기획홍보 김향 등의 제자들이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공연의 시작 전에 배정혜 선생의 발자취를 담은 영상을 선보였다. 다양한 영상 속 장면에서 그녀의 지난 세월을 반추할 수 있었고 춤으로 풀어보는 첫 순서는 <연산조>였다. 김정민, 김세령, 조윤아, 홍정인, 홍지영 5인으로 구성된 작품은 배정혜 선생의 춤을 꾸준히 이어온 김정민의 안무였다. 인생의 풍파를 묵묵히 견뎌내는 인간 내면의 감정을 아쟁, 거문고, 가야금, 대금의 합주로 이뤄진 음색에 맞춰 감성적 춤사위로 그려냈다. 느리지만 격조 있고 우아한 춤사위와 푸른 조명이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또한 자리 배치에 있어서도 엮이고 풀리는 공간구성과 배치가 돋보였고 절제된 춤사위에 묘미가 있으면서 여성미를 잘 드러낸 무대였다. 


장혜림이 보여준 <사랑가>는 그녀의 팔색조 매력을 과시했다. 춘향전의 춘향과 몽룡의 2인무 사랑가를 춘향의 몸짓과 상상으로 풀어 여성 독무로 각색했다. 정숙한 춘향의 모습도 보였지만 동시에 아름다움으로 이성을 유혹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여인의 심리를 섬세하게 다뤘다. 뛰어난 기량에 현대적인 느낌의 모습에 익숙하다가 전통적인 한복에 쪽진 머리를 한 장혜림이 보여주는 극적인 서사가 또 다른 감성으로 다가왔고, 밀고 당기는 맛이 있었다.

  

<심살풀이> 사진_ 이재훈

 

곽시내의 <흥푸리>는 투박하지만 전통적이면서도 특색있는 가락과 춤사위로 관객의 재미를 끌어냈다. 살풀이의 호흡과 내면적인 흥을 바탕으로 남도 들소리 민요에 맞춰 처음에는 한손 수건춤이 이후 양손 수건춤으로 바뀌며 구성을 이뤘다. 여인의 소품인 머릿수건, 목수건, 손수건 등에서 착안했기에 수건을 활용하며 구성지게 풀어낸 흥 춤이 우리 춤의 멋과 흥을 담아냈다. 


이정윤의 <백송>은 이정윤 특유의 에너지가 드러난 작품이다. 백송(白松)은 그 상징적 의미와 가치를 인간의 강인한 생명력과 희망에 대한 의지로 표현했다. 존재함으로 발현되는 선한 영향력과 에너지에 관한 독무로 짙은 호소력을 지녔다. 여성의 구음에 겉옷의 꼬리를 길게 늘인 의상을 입은 이정윤은 정제된 느린 춤을 선보였다. 부채를 들고 호흡, 접지, 곡선, 명상 등의 춤 기법을 통해 내면의 근원에 집중하는 민속성 강한 춤을 의도했던 바, 그 정신과 외적으로 드러나는 춤사위가 대립 없이 자연스러웠다. 


<장한가>는 국수호 선생에 의해 무대화된 춤으로 한량무 형식을 띤다. 정형인류 선비 학춤 한량무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었는데, 조선의 선비들이 풍류를 수학하며 생활했던 모습을 춤으로 풀어나간 남성춤이다. 특별히 국립국악원 토요명품공연에 초청되어 관객이 뽑은 최고의 명인으로 국수호 선생을 알렸고, 2017년 (구)한국무용협회에 의해 명작무 14호로 지정된 춤이기도 하다. 부채를 들고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추는 춤에서 남성의 기개가 느껴지고 힘찬 발디딤에서 역동적 에너지가 발산되고 있었다. 국수호 선생 자신이 안무한 만큼 가장 본질을 이해하고 있기에 장단과 가락을 갖고 노는 춤이었다.

 

정은숙의 <풍류장고>는 배정혜 선생이 1955년 제1회 배정혜 무용발표회에서 초연한 후, 여러 차례 수정 후 현재의 구성에 이른다. 어깨에 비스듬히 장고를 둘러메고 풍류를 즐기는 여인의 모습을 그려내는데, 경기민요 ‘태평가’와 ‘경복궁 타령’에 맞춰 춤춘다. 정은숙은 장구를 치는 솜씨가 뛰어난 춤꾼이었고, 본인이 충분히 즐기며 추는 춤이었기에 장구와 신체가 혼연일체를 이뤘다고 할 만큼 고풍스러운 흥취를 한껏 끌어올렸다. 연륜과 흥이 조화를 이루며 관객들의 큰 박수를 이끌어냈다.


배정혜 선생이 직접 춘 <심살풀이>는 검은색과 보라색 옷을 입고 분홍색 수건을 든 독무였다. 그녀의 내공 깊은 춤을 보여주는 신전통춤인데, 기존의 살풀이춤이 지닌 무속적, 형태적 미를 추구하던 구조를 뛰어넘는 춤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배정혜 선생의 해석을 담아 춤꾼의 내적 심상에서 출발해 오롯이 춤사위의 결로 이어내는 과정에서 전통춤의 정중동의 미를 동시대적으로 조율한 춤이었다. 나이를 잊고 진심을 다해 춤추는 모습에서 진정한 시대의 춤꾼임이 느껴졌다. 기교적인 춤이 아니라 가슴으로 전달되는 정서전달의 춤임을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을 장식한 <연화경 승무>는 탄탄한 기본기를 가진 보연, 한지혜, 김채린이 깊이 있는 춤으로 첫 공연을 마무리했다. 법화경(연화경)을 춤으로 상징화한 것인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인간 연꽃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움과 위력을 동시에 지닌 가르침, 법화경은 진실함과 지혜, 자비실천이라는 불교의 정신을 통해 누구나 해탈에 이르러 부처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붉은 장삼의 이미지가 불경 소리에 맞춰 춤추는 3인의 춤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고, 내면의 응집된 힘을 경건함을 빌려 외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연화경승무> 사진_ 이재훈

             

이번 ‘배정혜 in 80years’은 그녀의 삶의 궤적을 여실히 보여주면서 80년을 이어온 춤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통해 한국무용계에 살아있는 예술정신을 알린 뜻 깊은 시간이었다. 또한 현시대 전통의 본질적 의미와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녀만의 전통춤에 대한 해석을 통해 우리춤의 흥과 멋, 한의 춤사위를 뛰어난 춤꾼들의 춤으로 바라볼 수 있는 무대였다. 전통이란 그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형을 요한다. 정신을 잊지 않고 동시대성을 담아 재창조되는 신전통의 흐름에서 배정혜란 이름은 대체할 수 없는 그녀만의 영역임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심숙경과의 대화에서 춤추는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을 머리가 아니라 뼈, 세포로 듣고 춤추는 것이며 그만큼 신전통은 춤과 음악의 유기적 관계임을 강조했다. 또한 안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제에 맞는 동작개발과 시에서 시어를 찾는 것이라는 언급에서 요즘을 살아가는 안무가들이 귀담아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글_ 장지원(춤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