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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 대한 고발과 폭력의 희생자로서의 여성: 발레프렐조카주 <백조의 호수>


프렐조카주의 <백조의 호수>가 6월 22일부터 25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공연되었다. LG아트센터 기획공연 CoMPAS 23의 여섯 번째 공연으로, 프렐조카주의 작품이 국내 무대에 올려진 것은 지난 2019년 <프레스코화> 이후 4년 만이다.


20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안무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프렐조카주는 국내 무용 무대에서 각별한 애정을 받으며 자주 초청되는 안무가이기도 하다. 1996년 발레 뤼스를 오마주한 작품 <퍼레이드>, <장미의 정령>, <결혼식>의 트리플빌 무대로 처음 내한한 뒤 2003년에는 시댄스 초청작으로 <봄의 제전>과 <헬리콥터>를, 2012년에는 모다페 폐막작으로 <그리고, 천년의 평화(And then, one thousand years of peace)>를, 2014년에는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로 <백설공주>를, 2016년에는 시댄스 개막작으로 <수태고지>를 비롯해 그의 대표작에서 파드되와 군무를 발췌한 ‘갈라 프렐조카주’를 선보였다.


프렐조카주는 매우 다작을 하는 안무가이기도 하다. 그는 1984년 몽펠리에댄스페스티벌에서 첫 안무작 <식민지의 모험(Aventures coloniales)>을 선보인 뒤 이듬해 자신의 이름을 딴 프렐조카주컴퍼니(1996년 발레프렐조카주로 개칭)를 창단해 솔로작에서 대극장용 작품에 이르기까지 58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매년 한두 편씩의 신작을 꾸준히 만들어 온 셈이다.


프렐조카주는 정치적 이유로 조국을 떠나 프랑스로 망명한 알바니아인 양친 아래서 태어나 경제·문화적으로 척박했던 파리의 외곽 도시 쉬시앙브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유도를 배우던 그는 같은 학교 여학생이 빌려준 책에 실려 있던 루돌프 누레예프의 사진을 보고 발레에 매료된다. 프렐조카주는 발레를 배우는 남자아이가 아무도 없던 마을에서 양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다. <빌리 엘리어트>의 현실판이라 할 법한 이야기다.


파리에서 카린 바에너를 사사하며 현대무용으로 전향한 그는 뉴욕으로 건너가 머스 커닝햄, 제나 로멧 등에게서 현대무용을 배우며 자신만의 움직임 언어를 개척하게 된다. 프렐조카주 안무의 특징을 말할 때 첫 손에 꼽히는, ‘발레와 현대무용을 넘나드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움직임’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다.



현대로 온 <백조의 호수>, 부동산과 마법의 어색한 만남


안무를 시작한 지 근 40여 년, 지금까지 60편 가까운 작품을 만들어 온 프렐조카주의 안무작 목록에 <백조의 호수>가 이처럼 뒤늦게 삽입된 것이 혹자에게는 조금 의아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발레에 뿌리를 둔 안무가들 다수가 프티파의 클래식 발레를 재해석하거나 유명한 고전을 발레로 옮기는 작업에 깊이 천착하는 것과 비교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프렐조카주는 다작에 비해 고전의 각색에는 관심이 덜한 편이다. 그의 안무작 가운데 원작이 존재하는 것은 리옹오페라발레단을 위해 만든 1990년 작 <로미오와 줄리엣>(1996년 개정), 2008년 작 <백설공주>, 그리고 이번 내한 무대에서 선보인 <백조의 호수> 정도다. 그중 가장 최신작인 <백조의 호수>에는 프렐조카주가 그동안 고전의 각색에 미온적이었던 이유가 압축되어 있다.


개막 전 LG아트센터 홈페이지와 티켓 사이트를 비롯, 각종 언론사의 공연 프리뷰 기사에서는 <백조의 호수>가 현대로 배경을 옮겨 환경문제를 다루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로트바르트는 부동산 사업가로, 오데트는 환경운동가로, 지그프리트는 시추장비 개발회사의 후계자로 변신했단다. 인물 소개만 보면 현대사회의 첨단에서 자본권력과 환경문제를 이야기하는 작품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관객들을 위해 마련된 공연 프로그램북을 보면 오데트는 ‘환경운동가’에서 한 걸음 후퇴해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은 젊은 여성’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혹시 프렐조카주 측과 LG아트센터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매끄럽지 않았던 것일까. 물론 이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공연은 오데트가 호숫가에서 정체 모를 남성들의 습격을 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업가이자 마법사인 로트바르트가 오데트가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해 그를 백조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현대의 안무가에 의해 개정된 버전의 <백조의 호수>에서는 이처럼 앞으로의 전개를 일부 짐작케 하는 프롤로그를 삽입하는 경우가 많은데, 프렐조카주의 프롤로그는 여러 버전의 프롤로그 가운데 호숫가를 거닐던 오데트 공주가 마법사 로트바르트에게 납치되어 백조로 변하는 누레예프 버전의 프롤로그를 떠올리게 한다.


배경을 현대로 옮겼을 뿐 프렐조카주는 로트바르트가 마법사라는 설정을 포함해 원작의 뼈대를 거의 대부분 남겨두고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지그프리트는 호숫가에서 오데트를 만나 첫눈에 반하지만 로트바르트의 딸 오딜을 오데트로 착각해 오딜과 결혼을 발표함으로써 파국을 자초한다. 달라진 점이라면 시추장비 개발회사 대표인 지그프리트의 아버지가 등장하고, 지그프리트는 그런 아버지와 대립하는데, 원작에서의 결혼이 오데트에게는 마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인간으로 돌아가는 구원으로, 지그프리트에게는 스무 살이 된 왕자가 왕위를 물려받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된다면, 프렐조카주의 세계에서 이 결혼은 로트바르트와 지그프리트의 아버지 간 사업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정략적인 성격을 갖는다.


부동산 왕국을 건설하려는 로트바르트의 야심은 파노라마 영상으로 펼쳐지는 고층빌딩 숲으로 형상화되어 무대를 압도한다. 영상 속에서 너울처럼 일렁거리는 검은 빌딩 숲 때문인지 지그프리트의 아버지가 주최한 파티는 무도회라기보다 사업설명회 같다. 그러나 영상은 뒤로 갈수록 호숫가에 솟아오르는 거대하면서도 흉물스러운 공장, 기중기에 의해 쓰러지는 커다란 나무와 숲, 검게 변해가는 호수를 비추며 로트바르트가 만들어낼 재앙 같은 미래를 예고한다.



작품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군무의 움직임이다. 파티에 참석한 인물들의 모습은 딱딱하고 절도 있는 군무로, 호숫가라는 거주지를 침해당한 백조들의 모습은 격렬하고 역동적인 군무로 묘사된다. 이렇듯 대조를 이루는 군무는 안무가가 이 작품에서 가장 힘주어 완성한 미장센이며, 이 같은 압도적인 군무의 추동력을 얻은 작품은 마법의 힘과 자본의 힘이 어색하게 결합되어 삐걱거리는 드라마를 딛고 절정을 향해 내달린다.


폭력을 통해 고발된 것은 무엇인가


안무가를 ‘움직임을 만드는 자’로 이해한다면 프렐조카주의 창작력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 날카롭게 살아 있다. 발레의 공유 동작을 편집하고 재배치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이를 응용하고 변형해 새로운 움직임으로 만들어낼 줄 아는 프렐조카주의 어휘력은 더욱 진일보했다. 그러나 누벨당스의 가장 중요한 일원 중 한 사람으로 ‘작가’ 프렐조카주에게 초점을 맞춘다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능력, 더욱이 고전을 현대의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각색자로서의 능력은 한층 퇴행했다. <백조의 호수>의 대립하는 두 세계, 각기 자본과 환경을 대표하는 두 세력의 충돌은 90년 작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그려낸 노동자와 사용자 간 대립보다 무디고 흐릿하다.


인물들의 문제는 좀 더 심각하다. 인물로 한정해서 본다면 본디 프렐조카주가 유능한 캐릭터라이저는 아니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프렐조카주의 기나긴 안무작 목록에서 서사가 있는 작품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 서사가 누구의 것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떠오르는 인물은 몇 되지 않는데, 이는 그가 40여 년의 짧지 않은 안무 인생에서 고전의 각색보다 자신의 오리지널 서사와 움직임 직조에 치중해 온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전이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갖고 후대의 창작자들이 끊임없이 재해석에 도전하는 것은 고전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 덕분이며, 고전의 각색에서 스토리의 현대화만큼 중요한 것이 인물의 현대화인데, <백조의 호수>는 프렐조카주의 취약한 캐릭터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나마 2008년 작 <백설공주>가 백설공주의 계모를 통해 욕망하는 여성의 입체성을 그려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을 뿐 프렐조카주의 인물들은 대부분 구조에 갇혀 납작해진 서사의 도구들이다. 특히 여성의 경우 남성 폭력의 희생자가 되기 십상인데, ‘폭력을 시적 움직임으로 표현’한다는 평단의 찬사에 걸맞게 <백조의 호수>는 시종일관 오데트가 당하는 폭력을 창의적인 움직임과 세밀한 연출로 공들여 묘사하고 있다.


프롤로그에서 오데트는 괴한들에게 옷을 찢기고 그 찢긴 옷으로 몸을 결박당해 인신의 자유를 잃고(오데트를 인간에서 백조로 만든 것은 마법이 아니라 폭력이었다), 결말에서는 오염된 호숫가에서 몸을 떨며 죽어간다. 지그프리트는 죽은 오데트를 안고 절망으로 흐느끼며 춤을 춘다(지그프리트의 이 같은 절망을 초래한 것은 누구인가?). 오데트의 죽은 육신은 파국 이후에도 편히 잠들지 못하고 안무적으로 다시 소비된다.


이처럼 남자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의 죽은 몸뚱이를 안고 비탄에 잠겨 춤추는 네크로필리아적 안무는 <백설공주>에 이어 <백조의 호수>에서도 반복되는데, <백설공주>의 안무가 백설공주를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돌아오게 하는 과정이었다는 변명이 가능한 것과 달리 <백조의 호수>에서는 그저 지그프리트의 절망에 깊이를 더하기 위한 기능적인 안무로 쓰임을 다한다.


안무가가 의도한 것이 과연 폭력을 통한 각성인가? 우리는 폭력을 직접 목격하지 않고는 각성하지 못하는 존재들인가? 혹시 폭력 그 자체를 보여줌으로써 폭력을 포르노로 소비한 것은 아닌가? 프렐조카주가 <백조의 호수>를 통해 자본권력과 환경문제라는, 현대사회에 던진 질문에 답하기 전, 그 질문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폭력에 희생되는 여성’이 꼭 필요했는지 함께 질문해볼 일이다.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LG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