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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몸의 탐구로 재확인한 춤의 스펙트럼: 세종문화회관 ‘몸으로 몸한다’ 중 〈광야 The Wilderness〉, 〈둔근의 기술〉

 

바리나모 <광야>

 

세종문화회관의 컨템포러리 시즌 싱크 넥스트 23이 ‘몸으로 몸한다’(7.6.-7.8.)로 시작을 알렸다. ‘몸으로 몸한다’는 안무가들이 자신의 고유한 관심사와 개성을 통해 동시대의 춤과 몸을 탐구하는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몸으로 말한다’, ‘몸으로 그린다’에 앞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무대였다. 이에 최근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안무가 팀이 생각하는 몸의 인식을 6개의 무대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 중 〈광야 The Wilderness〉와 〈둔근의 기술〉은 프로젝트의 취지를 직관적으로 대변하면서도 확연한 대비를 보여주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광야에 던져진 고독한 몸이 사는 법


공동 작업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안무가 듀오 바리나모의 〈광야 The Wilderness〉는 ‘춤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하는 작품이다. 흔히 무대에서 만나는 춤이란 제도예술의 관행으로서 일정한 구성을 지니고 어느 정도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작품은 그러한 관행과 거리를 두고 몸에 대한 근원적인 고찰을 통해 춤의 다른 영역을 모색한다. 이때 몸의 고찰이란 신체의 물리적 특색이나 가용 영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인간 신체가 놓이게 되는 사회적 맥락과 운명까지 범위를 넓힌다.


무대 위의 두 사람은 시종일관 한 평 남짓한 공간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손과 머리의 일부, 때로는 몸통의 일부만을 밀착한 채 정지 상태에 가까운 미세한 움직임을 진행하는 이들의 무대는 춤꾼과 관객 모두에게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시나브로 거기에서 발견되는 것은 공연예술의 극적인 판타지가 아니라 광활하고 삭막한 공간에 방치된 존재의 생존 방식이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종교적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바리나모 <광야>

 

장르 불문, 많은 공연예술은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을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관객을 안심시킨다. 이런 메커니즘은 철저히 환상의 미학에 근거한다. 반면 현실에 근거한 몸의 실존을 말하는 작품도 있다. 이때 ‘몸의 실존’이란 잘 빠진 신체의 미적 유려함을 뽐내는 것이 아닌, 극장 밖 현실의 일상적인 몸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바리나모는 객석과 괴리된 맥락으로 격앙되고 해소되는 ‘그들만의’ 감정의 서사가 아니라 고독과 불안, 투쟁과 공허의 어디쯤에 있는 상념의 전개를 보여준다. 그리고 느리면서도 밀도 높은 호흡과 밀착의 에너지를 통해 그들이 표출하는 감정은 어딘가 익숙한 풍경을 자아낸다. 그것은 바로 삭막하고 냉정한 현실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의 모습이다.


바리나모는 <광야>에서 무대를 넓게 쓰지도, 뛰지도, 걷지도 않지만, 최소한의 움직임과 접촉을 통해 그 익숙한 상념의 서사를 보여주며 그들만의 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춤과 몸, 예술과 삶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욕망하는 몸’의 건재를 선언하는 춤


성창용의 <둔근의 기술>은 ‘인간 존재의 실존적 고독’과는 대척점에 있는 작품이다. 울긋불긋한 근육질의 몸매를 과시하는 세 남자는 시종일관 유머러스한 분위기 속에서 육체성의 정점을 보여준다. 진지함이나 심각함을 배제하고 “으짜 으짜 으짜짜”라는 코믹한 구호와 함께 날것의 몸짓을 보여준다.

 

성창용 <둔근의 기술>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구호는 단순히 재미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둔근의 기술>에서 춤은 고매한 철학이나 심각한 실존의 매개가 아니라 살아있음의 증거로 활용된다. 그때 몸은 춤과 동의어가 된다. 즉 그에게 좋은 춤이란 잘 단련된 육체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이상적인 춤의 세계 또한 그런 몸을 통해 표현되는 즐거움의 영역이다. 유쾌하게 시작했지만 결국엔 땀을 뻘뻘 흘리며 지쳐가는 춤꾼들의 구호는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반복되는 구호와 춤의 연속은 어느샌가 잊혔던, 그리고 여전히 유효한 몸짓의 즐거움을 환기한다.


그래서 세 남자가 보여주는 춤은 내내 감각적이고 자극적이다. 몸짓 하나하나에선 욕망이 꿈틀거리고 무엇보다 유쾌한 에너지가 작품 전반에 흐른다. 신체의 일부를 접촉하는 안무 중에서도 제목처럼 둔부를 타격하며 웃음을 유도하는 세 남자의 군무가 대표적이다. ‘기술’이라고 했지만 영악한 전략이라기보다는 육체의 특징을 활용하는 ‘잔기술’이다. 그밖에는 팔을 크게 휘두르고 도약하며 회전하고, 무릎을 구부렸다 펴는 큰 동작 중심의 동작이 주를 이룬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의 중심이자 춤의 시작은 역시나 엉덩이다. 성창용은 유쾌한 안무와 구호의 연속에서도 그동안 팔과 다리의 역동성에 시선을 빼앗겼던 둔부를 강조하며 ‘몸의 예술’로서의 춤을 우리 앞에 다시 데려다 놓는다.


이런 태도는 온갖 개념들로 대체되는 컨템포러리 작품들의 시대에 맞서 다시 육체의 시대로 돌아가자고 제언하는 듯하다. 지금의 춤은 기획에서 출발하고 특별한 소품이나 영상 미디어에서 완성되기도 하지만, 성창용의 춤은 여전히 엉덩이에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개념보다 앞선 본능의 힘은 고차원의 해석보다 직관적인 쾌감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이런 점에서 <둔근의 기술>과 ‘몸으로 몸한다’는 춤에 관한 춤, ‘메타 댄스’의 성격을 통해 다양한 춤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성창용 <둔근의 기술>

 

          

                                                        글_ 송준호(춤평론가)

                                                              사진제공_ 세종문화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