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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주제를 담아내지 못한 빈약한 그릇: M발레단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


지난 8월 11일,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에서 발레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문병남 안무)을 보았다. 이 작품은 2015년 처음 창작되었으나 2021년 상당 부분을 변경하여 재제작하였고 그 후로 매 해 무대에 올려졌다. 올해는 7월 26일 충주시문화회관을 시작으로 광명, 마포를 거쳐 8월 26일 성남아트센터에서 공연을 마무리하는 일정이었다. 광복절 즈음 무대에 올림으로써 관객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다시금 우리 역사를 생각해보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본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안중근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다루었기에 창작자는 남다른 책임감을 가졌으리라 짐작된다. 한국인들에게 안중근은 한 명의 독립운동가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대한제국과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살해했다는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대한독립을 향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11명의 동지들과 왼 손 약지를 끊어 대한독립을 맹세했던 단지동맹(斷指同盟), 뤼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 남긴 편지들과 “구차하게 일본에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당당히 죽음을 받아들이라”던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의 의연함 등은 익히 알려진 일화이다. 더욱이 안중근 의사를 다룬 뮤지컬 <영웅>이 2009년을 시작으로 매 해 공연을 거듭하며 수많은 팬을 확보하여 올해는 영화로도 제작된 시점에서 관객들은 여느 작품보다 더 큰 기대감을 갖고 공연을 찾았을 터였다.


관계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관객은 발레매니아거나 이동훈(안중근 역)과 이은원(김아려 역), 윤별(이시다 역)의 팬인 듯 보였다. 작품은 고전적 발레 어휘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서정적인 남녀의 이인무와 남성 무용수들의 역동성을 주된 움직임 모티브로 하였다. 작품 군데군데에서 유리 그리가로비치(Юрий Григорович)의 <스파르타쿠스>를 오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는데, 캐릭터의 구도, 여러 안무적 요소, 전투씬이나 안중근의 고뇌 등의 장면에서의 무대 구성 등 많은 부분을 차용한 듯 했다. 남성 무용수들이 다이내믹한 움직임과 빠른 회전, 힘찬 도약 등의 테크닉을 구사할 때마다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무용수들의 뛰어난 테크닉이 발레 팬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국립발레단이나 유니버설발레단처럼 대규모의 단체가 아닌 M발레단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다루는 작품을 시도하고 레퍼토리화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작품의 의도나 창작 배경이 작품의 예술적, 미학적 평가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무용수들의 기량이나 작품의 인기와는 별개로, 이 작품은 구조와 형식의 측면에서 아쉬움이 큰 작품이었다.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은 8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었다. 1장과 8장은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치룬 후 갇힌 뤼순 감옥 장면으로 수미상관(首尾相關)을 이룬다. 감옥에 갇혀 두려움과 그리움 등으로 고뇌에 가득한 안중근의 모습에서 시작하여 어머니 조마리아가 등장하는데, 이 환상과 같은 만남을 통해 장면은 과거의 안중근과 부인 김아려의 혼례로 전환된다. 그 후 이토 통감의 축하연,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의병활동, 부상당한 안중근의 꿈속에서 김아려와의 재회, 단지동맹, 하얼빈 의거로 이어지는 장면들이 시간 순으로 배열되었다. 첫 장면의 감옥 장면이 고뇌하는 안중근에게 어머니가 나타나 과거의 시간으로 이동하는 발단의 역할을 했다면, 마지막 장면은 죽음을 앞두고도 사그라들지 않는 안중근의 대한독립에 대한 열망과 어머니의 결의 등이 폭발되는 클라이맥스 겸 대단원이었다.


대본 연출에 드라마투르기까지 크레딧을 올린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구성이 지나치게 단선적이고 진부했다. 보통 드라마 발레라 하면 기승전결(起承轉結)의 서사적 흐름에 따라 극의 긴장과 이완의 밀고 당김이 있고 관객의 감정이 함께 움직인다. 그런데 이 작품은 안중근의 결혼식부터 의거-죽음에 이르는 몇 개의 단편을 병렬로 나열해 놓아 장면 전환 시마다 맥이 끊겨버려 극의 긴장감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다. 명성황후의 시해 장면을 그래픽 영상으로 투사함으로써 일제의 국권침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지만 안중근의 독립운동의 계기를 설명 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가령, <스파르타쿠스>에서 스파르타쿠스는 로마 귀족들의 유흥을 위해 검투사 동료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 했던 비참함이 분노의 계기가 되어 반란을 결심하게 되었다면, 이 작품에는 왜 안중근이 독립운동을 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어야 했는지의 개연성이 부족했다. 이러한 이유로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은 어떤 서정적 장면에서도, 어떤 역동적인 전투씬에서도 감흥이 전달되지 않았다.



인물 설정에 있어서도 아쉬움을 남겼다. 주인공 대 적대자의 구도 설정에 억지가 있어 설득력이 떨어졌고, 어머니 조마리아 역이 갖고 있는 무게감에 비해 장면의 비중이 너무 적었다. 안중근이라는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에 대적하는 가상의 안타고니스트(antagonist) 이시다와, 안중근의 아내인 김아려에 대응되는 이시다의 애인 사쿠라를 설정함으로써 극적 긴장감을 높이려 한 것 같았다. 이는 마치 <스파르타쿠스>의 스파르타쿠스-프리기아 대 크라수스-에기나 구도를 보는 듯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스파르타쿠스-크라수스와 달리 실제로 안중근에 대적하는 인물은 이시다가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라는 점이다. 안중근이 거사를 행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애물로 이시다를 설정한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이시다의 서사에는 그만큼의 비중 있는 계기가 없었다. 이시다는 그저 이토 통감의 축하연이나 안중근의 의병부대와의 싸움에서 안중근 만큼의 다이내믹한 춤을 구사하는 남성무용수 이상의 역할이 되지 못했다.


사쿠라 역에도 동일한 문제가 있었다. 사쿠라 역에 영감을 주었을 <스파르타쿠스>의 에기나는 관능과 교태의 절정인 인물로 크라수스의 정부에서 그치지 않고 작품의 후반부에 스파르타쿠스 군대를 현혹하여 로마군의 승리를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반면에 사쿠라는 이토 통감의 축하연에서 이시다의 파트너로서의 역할에서 그쳐버렸다. 애초에 작품 내에서 그 축하연 장면이 다른 장면들과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지는 이유를 찾기 어려웠기에 사쿠라를 비롯한 게이샤들의 춤은 그저 하나의 장식 같은 디베르티스망(divertissment)으로 인식되었다. 내러티브가 쫀쫀하게 유기적으로 얽혀야 할 드라마 발레에서 이와 같은 잉여적 장면은 오히려 극에 대한 몰입을 저해하였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역은 김순정 교수가 맡았다. 불행했던 역사 속에서 사랑하는 아들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결국 그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어머니의 복잡한 심경을 연륜이 묻어나는 춤으로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했으나, 움직임에 감정을 실어보내기도 전에 막이 내린 느낌이라 아쉬웠다. 죽음을 마주하고 선 아들에게 손수 지은 수의를 입혀주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비장함과 의연함의 춤을 보고팠으나, 감정이 가장 깊숙이 파고들 수 있었던 클라이맥스에서 안중근과 어머니의 대사가 낭독될 때, 나는 허탈감에 맥이 탁 풀려버렸다.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감명을 받을 대사를 읊음으로써 창작자는 너무 손쉽게 관객들의 감동을 이끌어내려 한 것은 아닐까. 춤의 추상성에 언어의 구체성이 잘 못 쓰이게 될 때, 작품은 반강제적으로 감동을 주입시키는 신파드라마가 되어 버린다.



감정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작품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뚝뚝 끊기는 듯한 장면 배치도 그렇거니와, 서사의 흐름에 따라 감정이 자연스레 흘러가지 못하고 너무나 극과 극으로 전환되는 장면의 분위기가 이에 한 몫을 했다. 댄서들은 자신들의 뛰어난 기량을 뽐내듯 테크닉의 향연을 펼쳤고 이 휘몰아치는 힘찬 춤은 환호를 받기에 충분했지만, 역동성의 과잉은 작품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기에 70분이라는 길지 않은 러닝타임에도 피로도가 쌓였다.


발레작품의 퀄리티는 훌륭하고 선구적인 주제나 무용수의 뛰어난 기량만으로 얻어질 수 없다. 결국은 안무가와 창작자의 역량이다. 주제나 소재를 담아내는 그릇이 얼마나 독창적이고 정교하며 세련되었는가가 작품의 질을 좌우한다. 여기에는 드라마를 풀어내는 내러티브 방식과 안무, 음악 모두가 포함된다.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은 아쉽게도 그 그릇을 세련되게 빚어내는 데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군데군데 클리셰(cliché)가 묻어나오는 동작과 장면들, 작품의 전체적 흐름과 상관없이 장면마다 숙제를 끝내듯 가져다 차용한 서양의 음악들은 과거의 발레에 매몰돼 있는 것 같은 진부함으로 읽혔다. 대중적 인기가 작품성으로 반드시 이어지는 것은 아닌 바, 이 작품이 민족의식을 고무시키는 레퍼토리로 자리매김 하여 한국적 창작 발레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대표작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미학적으로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지는 과정이 필요해 보인다.




글_ 이희나(춤평론가)

사진제공_ 마포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