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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승무, 다 어디로 갔을까?: 이상연의 승무를 보며, 서울교방에게 기대 걸다

서울교방 6인전은 서울남산국악당과 서울교방의 공동기획으로, 둘째 날은 ‘여섯 개의 봄’이란 제목이었다(2023.2.18. 서울남산국악당). 여섯 개의 춤이 모두 특징이 살아서 좋았다. 이 글에선 이상연의 ‘승무’를 얘기하겠다. 솔직히 말한다면, 이상연의 승무를 통해서 “승무의 외연을 넓히자”는 게 이 글의 의도이다. 그런 역할을 서울교방에 바란다는 게 글의 목적이다. 

 

ⓒ혜강신귀만

 


내겐 봄처럼 따뜻한 승무


이상연의 승무는 내게 ‘따뜻한’ 승무였다. 무겁고 어렵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볍고 쉽게 볼 승무는 절대 아니었다. 보편적으로 무용계에서 보는 승무는, 늘 무겁고 어렵게만 여기면서 추앙(推仰)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이상연의 승무는 이것에서 벗어나서 승무에 내재한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서정성’을 무대에서 자유롭게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일반적으로 승무를 얘기할 때, 법열(法悅)이나 구도(求道)와 같은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승무는, 늘, 꼭, 그렇게만 추어야만 할까? 이런 것을 부정하거나, 없애자는 게 아니다. 이런 것을 너무 겉으로 내세울 때의 위험성을 걱정하면서, ‘승무’란 춤의 본질과 다양성을 넓고 깊게 생각해보자는 거다. 


승무는 꼭 고고(孤苦)하게 추어야만 할까? 이런 고정관념에 갇혀 있을 때, 승무는 자칫 잘못하다가 ‘내재적 성장’을 멈출 수도 있다. 예술이라는 것이 살아 숨 쉬는 존재이기에 그걸 상황이 올 것 같진 않다. 그러나 이렇게 기존의 승무만을 생각할 때는, ‘동시대성’을 전제로 해서 춤(승무)의 외연을 넓히는 것이 어렵거나 더뎌질 소지가 충분하다. 



승무, 무엇을 우려낼 것인가? 


이상연의 춤을 먼저 접한 후에 나중 프로그램북을 보니, 이상연은 자신의 승무에 <다향>이란 제목을 부쳤다. 이런 시어(詩語)가 함께 했다. 


은은한 다향 맑은 물에 우리듯 / 정갈한 몸짓 장단에 우리어  

망념은 버리고 맑은 본성 버리어 / 한 자락 춤으로 담아낸다 

여기서 “우리듯” “우리어”의 ‘우리다’란 말(개념)이 내게 다가왔다. ‘우려내는 것’은 예술가에게 있어서도 주요한 수행일 것 같다. 어떤 것(물체)을 물(액체)에 담아서, 그것의 본체는 존재하지 않다지만, 그것은 성분, 맛, 빛깔은 그대로 ‘배어들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우려내다’는 ‘생각이나 감정을 끄집어내다’란 뜻으로 확대된다.  


이제 ‘승무’라는 춤은 과거의 것들을 ‘우려내서’ 자신의(현대의) 승무 속에 배어들게 해야 한다. 이건 자의적(恣意的) 주장이 아니라, 시대적(時代的) 사명이다. 


지금으로 백여 년 전 이 땅에는 수많은 형태의 승무가 존재했다. 그런 승무가 이어지게 한 공간은 권번(券番)이다. 알다시피 ‘서울교방’은 권번춤의 맥을 이어가는 동인들의 모임이다. 서울교방의 춤의 뿌리가 되는 세 예인(김수악, 조갑녀, 장금도)의 춤맥을 잘 이어오는 것에 감사한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 세 분에만 머문다면 어떠할까? 이 분들의 춤을 바탕으로 해서 요리조리 변형하면서 창작하는 단계를 지속한다는 게 과연 앞으로 한국의 춤계에 미친 영향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기우에 불과하길 바라지만, 서울교방이 도그마에 빠질까 염려된다. 서울교방 또는 서울교방 동인의 무용가들이 또 하나의 ‘춤계의 권력’이 될까 걱정된다. 지금이 그렇다는 것은 절대 아니니, 서울교방의 동인들은 제발 분노하는 일일랑 없길 바란다. 서울교방을 진정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의 조언으로 이해하길 바란다. 


난, 늘, 국악계의 ‘십년 후’를 생각한다. 그것에 기반해서, 평론의 잣대를 적용한다. 지금 주목받는다고 그게 십 년이 갈 보장은 없다. 지금 대단치 않게 여기는 게, 십 년 후 한국공연예술에서 큰 역할을 할 씨앗이 될 만한 것도 있다. 이런 생각을 늘 하는 나로선, 서울교방의 ‘십년후’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춤선, 춤태, 춤집을 모두 갖춘 김혜윤


김혜윤의 <논개별곡>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에서도 김혜윤의 춤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춤선, 춤태, 춤집, 모두 나무랄 때 없다. 그런데, 이 춤을 보면서, ‘교방춤’의 맥락으로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이 춤은 권번예맥을 존중하면서, 권번춤을 ‘우려내서’ 만들어진 춤이 아니다. 극장무용으로서 아주 좋은 작품이다. 박순아의 25현가야금연주도 좋았고, 김혜윤의 춤은 이런 음악을 배경으로 해서 ‘극적(劇的) 서정성’을 잘 표출해냈다. 


그러함에도 ‘권번예맥’으로 볼 순 없다. 우수한 창작품의 하나다. 논개를 가져왔고, 진주와 연관이 된다고, 모두가 ‘권번예맥’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이 춤은 다른 컨셉, 다른 공간에서 출 춤이다. 만약 그런 자리라면, 나는 김혜윤의 춤의 더 큰 지지자가 될 것 같다. 나의 기우에 불과하겠지만, 나는 서울교방의 ‘십년 후’가 이런 춤으로 가는 걸 원치 않는 입장이다.

 

ⓒ혜강신귀만

 

 

명무를 ‘명무전’ 속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았던 서울교방


서울교방이 그간 해 온 활동을 존중하고, 서울교방의 예인을 존경한다. 이제 이 분들이 ‘지금의 모습에서 잘 간직하면서, 이걸 정리해주길’ 바란다. 서울교방이 뿌리가 된 세 분의 춤은, 지금 이 단계에서 참 아름답게 존재한다. 바라건대, 나는 이제 서울교방이 또 다른 권번춤의  예맥을 파고들길 바란다. 그건 가능할까? 춤 자체가 남지 않아서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할까? 아니다. 


서울교방의 춤의 바탕이 된 세 분의 춤이 대단하지만, 이것을 ‘명무전’의 범주에서 벗어나서, 또 다른 차원의 춤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은 서울교방의 김경란과 동인의 안목과 노력의 결과다. 그렇게 십년을 잘 해왔다면, 이제는 또 다른 십 년을 계획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미래를 잘 생각하고 있겠지만, 혹여 자충수(自充手)에 빠질 수 있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훈수를 둘 필요는 있어 보인다. 


서울교방이 기대하는 바는 무엇일까? 인문적 기반, 역사적 기반을 전제로 해서, 이 땅의 춤을 바라보고 만들어가는 모습이다. 앞으로의 십년은 권번춤을 넓고 깊게 보면서, 거기서 ‘지난 10년의 성과’를 또 다른 방식으로 꽃을 피워야 할 것 같다. 이 땅에 존재했던 권번의 예인은, 김수악 조갑녀 장금도 세 분이 전부일까? 아니다. 또한 ‘서울교방’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면, 권번춤의 중심이 되는 서울의 권번춤에 대해서 이제 깊은 접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춤과 관련된 여러 기록과 그것과 연관된 여러 방증(傍證)을 종합해서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하면, 결코 불가할 일이 아니란 생각이다. 서울교방이 그간 해온 역량을 바탕에 둔다면, 분명 가능한 일이다. 


서울교방의 승무이자 이상연의 승무는, 승무의 외연을 넓히는데 기여했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 만족해야 할까? 이 땅에 과거 존재했던 승무 중에선, 그 실체를 존중하면서 새롭게 ‘우려내야할’ 승무는 없는 것일까? 두루 찾아보면 많고 또 많다. 깊게 빠져보면 근거 있는 상상력 속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승무가 또 존재한다. 그런 근거를 여기서 제시하겠다. 



승무, 연하고 부드럽게 추는 춤?!


1938년 가을, 미국의 지식인 여성이 당시 경성을 방문했다. 덕수궁과 화신백화점을 방문했고, 명월관에서 점심을 함께 했다. 12시부터 시작한 점심은, 오후 3시까지 이어졌다. 그들은 조선기생들의 소리와 춤을 감상했다. 거기에 함께 한 미국여성이 가장 좋아했던 프로그램은 무엇이었을까? 숭무였다(<삼천리> 제 10권 제 10호, 1938년 10월 1일 발행).


승무는 어떤 춤일까? 고깔 쓰고 장삼 입고 “기는 듯, 앉는 듯,” “연하고 부드럽게 추는” 춤이란 것에 동의하는가? 승무를 이렇게 말한 사람은 누구인가? “최승희(崔承喜) 한성준(韓成俊) 양거장회견(兩巨匠會見)”이라고 나온, 잡지의 대담에 나온다(<삼천리> 제10권 제1호, 1938년 01월 01일 발행).



광무대에선 토월회, 부민관에선 이강선 


조선 땅에서 승무처럼 자유스러운 춤도 드물다. 승무처럼 인기 많은 춤이 없었다. 100년 전 조선에선, 매우 다양한 승무가 존재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승무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무형문화재의 범주 안에서 잘 전승되고 있는 것을 존중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만을 승무라고 보면 매우 곤란하단 점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이미 승무의 개량은 이뤄졌다. 신극운동단체 ‘토월회’는 연극 단체로만 알기 쉽지만, 그들의 공연에서 노래와 춤은 빠지지 않았다. 1925년 4월 10일, 토월회의 공연장소는 당시 황금유원(黃金遊園, 을지로) 안으로 장소를 옮겼다. 여기서 승무가 인기 레퍼토리로 정착한다. 토월회 11회 공연 (1924.5.1.-4.)을 공연하면서, 토월회 “7회 때에 갈채를 받은 개량한 승무도 있을 터”라면서 홍보하고 있다(<동아일보>. 1925년 5월 1일).

  

1938년 5월 2일, 부민관에선 고전무용대회(古典舞踊大會)가 열렸다. 한성준이 중심이 된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주최로 부민관(현, 서울시위회 자리)에서 열린 큰 공연이다. 여기서 12가지의 춤을 소개하기로 되었는데, 그 순서에서 승무를 시작으로 사자무 학춤 급제춤를 꼽고 있다. 한성준에 의한 조선의 고전춤은 “통속적이면서도 품위있고 고전의 아취(雅趣)가 있기로 정평”을 했는데, 여기서 승무는 이강선(李剛仙)이 추었다(<조선일보>, 1938년 5월 2일, 조간).

 

ⓒ혜강신귀만

 


민간에서 퍼진 중타령과 중춤

 

백 년 전 이 땅의 승무는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판소리와 승무와의 연관 관계다. 승무를 민간에선 ‘중춤’이라고도 했다. 이런 중춤은 민간에 존재하는 ‘중타령’과 연관이 있다. 이 중타령은 판소리 <심청가> 중에서, ‘중 내려오는 대목’과 관련이 있다. 이 노래는 전반부와 후반부가 사뭇 다르다. 전반부는 세속적 중의 모습이 연상되며, 엇모리 장단이다. 후반부에는 실제 염불을 소리조로 부르게 된다. 


중 내려온다 중 하나 내려온다 저 중의 거동 보아라 저 중의 호사 보려므나 서리 같은 두 눈썹은 왼 낯을 덮었고 크나큰 두 귓밥은 양어깨 청 쳐져 다 떨어진 헌 송낙 이리 송치고 저리도 송쳐 홈씩 눌러쓰고 노닥노닥 기운 장삼 실 띠 띠고 염주 목에 걸고 단주 팔에 끼고 흐늘거리고 내려와 염불허며 내려와

그러다가 염불하는 모습으로 바뀌면서, 승려에 대한 진정성을 드러낸다. 이건 판소리 <심청가>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수많은 승무 중에서 어떤 승무는 바로 이 판소리 한 대목을 춤(승무)로 엮어낸 거다. 그런데 난 지금 현행 춤판에서 심청가와 연관된 춤을 찾기 어렵다. 


아아 어어 상래소수 불공덕 회향삼천 실원만 (上來所修 佛功德 回向三處 悉圓滿) 원왕생 원왕생 제불중천 제갈영 (願往生 願往生 諸佛重天 諸葛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삼현승무, 법고승무, 보렴승무, 바라승무

 

지금 춤계에선 ‘승무’라는 이름으로 거의 법고승무(삼현육각 편성으로 긴 염불로 시작하는 승무)을 한정하는 경우가 많다. 1960년대는 물론이요, 19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승무를 얘기할 때 삼현승무, ‘보렴승무’와 ‘바라승무’라는 용어로 구분해서 사용했다. 무형문화재로 ‘승무’가 지정되기 전에, 이 땅의 승무가 그러했다. 승무의 인간문화재가 된 이매방 명인 자체가 사용했던 용어이면서 실제 존재했던 춤이다. 보렴은 남도민요(남도잡가, 전라도 지방에서 전문적 소리꾼이 부르는 노래)인데, 이 노래와 함께 하는 ‘보렴승무’가 이 땅에 존재했다. 


“보렴승무는 더 화려하고 다채로운 악곡과 춤의 장중한 하모니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목탁과 징으로 사찰의 풍경을 그려나가면서 창과 관현의 악곡이 쉴새없이 흥을 돋고어나가는  가하면, 승무의 장본인이 바라를 높이 들고 치며 등실등실 그 자신이 컨덕터가 되어 온 무대를 주름잡는다.”(1977.8.3. <조선일보>) 

이 글에서의 승무의 장본인은 이매방이고, 김소희 명창의 창(唱)이 함게 했다. 이 글을 쓴 사람인 조선일보 주필 홍종인(1903~1998)이다. ‘법고승무’도 좋다지만, 우리에겐 이렇게 남도민요 ‘보렴’과 함게 하는 바라승무가 존재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판소리 ‘심청가’의 중타령에 뿌리를 둔 해학성과 종교성이 공존하는 ‘나긋나긋’ 정겨운 ‘승무’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이런 승무를 전승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 바로 권번이다. 교방춤이고, 권번예맥에서 빠지지 않아야 할 춤이 이런 형태의 ‘승무’다. 이런 승무는 이제 누가 계승해야 할까? 



함흥권번 장홍심의 승무


이매방은 워낙 탁월한 예인이다. 그러나 그의 승무에 영향을 준 사람이 장홍심이다. 생전 장홍심은 부산시절에 이매방과 춤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는 얘기를 했는데, 이매방의 승무에 영향을 준 것이 장홍심이다. 그럼 장홍심의 승무는 한성준의 승무의 계승일까?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리는 말이기도 하다. 함경도 함흥 출신인 장홍심(1914-1994)은 함흥권번 소속이었다. 


이랬던 그가 서울(경성)에 오게 되면서, 한성준을 만난 것이다. 장홍심의 승무는 한성준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본래 함흥권번에서 추던 춤을 한성준이 다듬어서 무대화했다는 말이 더 타당성이 있는 말이다. 장홍심은 연배 위로는 이강선, 연배 아래로는 한영숙과 함께 활동을 했다. 한성준이 당시 도동(渡東, 도쿄공연)에서 돌아와서 건강이 나빠지고, 1942년 7월 타계를 했는데, 이 때 한성준이 이끄는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장홍심은 고향인 함흥으로 다시 돌아가서 가르치면서 예인 생활을 했다. 1950년 한국전쟁기에 부산에 오게 된다. 동양무용연구소를 통해서 제자를 양성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부산지역에서 이매방을 만나서 예술적인 레퍼토리를 주고받게 된다. 장홍심의 승무는 함흥권번에 뿌리를 두고 있는 ‘권번예맥’의 승무이기에, 서울교방에선 특히 주목해야 할 승무가 아닌가 한다. 


20세기 전반기, 승무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승무의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움직임은 다시 살아나야 한다. 무형문화재(문화유산)으로 존재하는 산조의 전승이 확고하기에, 이런 움직임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가운데 승무의 다양한 가치가 되살아 날 것이다. 교방춤의 하나로서의 승무를 잇는 것을 넘어서, 그동안 승무를 잘 춰서 유명했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의 춤을 서울교방을 비롯해서 많은 무용인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혜강신귀만

 

 

강남향의 승무, 고향선의 승무


승무를 얘기할 때 거명할 사람이 더 있다. 1936년 오케영화제작소의 영화 <노래조선>에는 고복수, 이난영, 김해송 등 가수, 임방울, 신숙과 같은 국악인과 함께 강남향(가수 겸 무용가)의 승무가 영화필름에 담겨 있다. 안타깝게도 영화필름은 남아 있진 않지만, 승무복장을 한 강남향의 스틸사진이 있어서, 다행히 그녀의 승무를 상상하게 만든다. 


고향선(본명 성경자, 가수 윤복희의 어머니. 희극인 윤부길의 아내)도 승무를 잘 추었다고 전한다. 현재 이런 얘기를 해 주실 수 있는 분은 김진홍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이동백의 은퇴와 함께 전국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말년에 부산에 정착한 강태홍의 승무가 유명한 것은 무용계에서도 잘 아는 사실이다. 이런 다양한 형태의 승무는, 거의 모두 권번과 연관이 있다. 



김소옥의 승무는 어떠했을까?


끝으로 권번에서 전승된 승무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을 한 사람만 더 들겠다. 김소옥(金小玉)이다. 1921년 3월 19일, <조선일보> 독자위원회가 시내 우미관에서 열렸다. 이 무대에 출연한 판소리 명창은 김정문, 김록주, 이화중선으로 지금도 국악계에서 큰 인물로 그에 관한 얘기가 이어지고 있다. 이 무대에서 승무를 춘 사람은 누구일까? 김소옥이다. 기생의 예명은 체구와 용모, 특기 등과 연관해서 부쳐지는 이름인데, 예를 들어서 크고 날씬한 예인은 학선(鶴仙), 음악적으로 출중한 이에게 탄금(彈琴)이란 예명이 부쳐진다. 그녀는 이름처럼 작은 체구일듯한데, 그가 추는 승무가 궁금하다. 그녀의 승무를 짐작하게 하는 기사가 전해진다. 여기서의 목고는 지금의 법고를 말한다. 나무틀이 있는 북이다. 


김소옥의 곳갈쓰고 장삼입고 승무를 하는 그 자태와 

무르녹은 목고소리는 관중을 살살녹일 듯 하였으며

나는 이런 승무를 보고 싶다. 대한민국에서 승무를 추는 예인이, 관객을 살살 녹이려는 의지로 추는 춤꾼이 있을까? 이런 자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무용인이 있는 건 아닐까? 여러 생각이 오간다. 김소옥을 비롯해서 과거 권번을 중심으로 이어졌던 다양한 승무는 언제쯤 볼 수 있을까? 십 년 안에 가능할까? 서울교방이 그 이름처럼 명실상부하게 과거의 권번예맥을 잘 이어주길 바란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