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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굿춤, 진정성은 충만하되 구체성이 부족하다: 2022년 강주미 ‘춤판 동해로 가는 길Ⅱ’

‘연구와 연행이 춤사위에 의미있게’ 담겨있는 춤판으로 이주영(무용평론가)은 평했다. 김정화 (피아니스트, 음악학자)는 ‘우리 춤에 대한 오랜 열정을 보여준 춤판’이었으며, 앞으로 ‘동해안 무속 춤이 집대성된 강주미류(流)가 완성’되기를 기대했다. 커튼콜에서 객석의 많은 관객의 환호성을 들었다. 무무(巫舞)를 공연콘텐츠로 만들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와 실천에 나도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도 계속 응원할 거다.


‘동해로 가는 길’(2022.12.27. 금정문화회관 은빛샘홀)은 강주미가 지향하는 ‘동해굿춤’이다. 동해안별신굿에서 사용하는 무악(巫樂)에 바탕을 두고, 동해안별신굿과 연관된 무무(巫舞)를 배우고 익혀서 보다 예술적인 무대춤으로 승화하고자 하는 강주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동해로 가는 길>  사진_ 박병민

 

과연 부산지역을 대표하는 중견 춤꾼의 한 사람인 강주미가 만든 이번 공연은 좋기만 했을까? ‘강주미는 춤을 잘 춘다’는 말에는 거의 모두 동의할 것이다. 예전 강주미가 추는 김온경류 산조춤을 보았을 때. 강주미에게서 공력이 느껴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음악에서도,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확고한 춤을 끌고 나갔다. 이번 춤판도 그러했을까? 나는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다. 많은 찬사를 받는 강주미라는 춤꾼에게 쓴소리는 누가 해줄까?


이제부터 냉정한 평자(評者)가 되겠다. 강주미는 물론이요, 앞으로 또 누군가가 동해굿춤을 정립하고자 한다면, 명심해야 할 말들을 가감없이 해주고 싶다. 강주미의 ‘동해로 가는 길’은 ‘동해굿춤’이라 할 수 있을까? 절반쯤 그렇다. 배운 것은 분명하겠으나, 익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동해굿춤이 강주미의 몸 안에서 체화(體化)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면서 춤판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반신(半信)하게 되는 건, 앞서 이주영 평론가가 얘기했듯이 그의 학자적인 노력을 뜻한다. 반의(半疑)하게 되는 건, 이번 춤판에서 선보인 ‘동해굿춤’으로 명명되길 바라는 춤의 완성도 측면에서 그렇다. 


경기무무(京畿巫舞)와 동해무무(東海巫舞) 


강주미가 동해굿춤을 만들고 하는 것과 연관해서, 지난 20세기의 모델은 누구인가? 도살풀이의 김숙자 명인(1927-1991)이었다. 강주미는 어떤 인터뷰에서 김숙자 명인을 얘기했거니와, 이번 공연 중에도 마이크를 들고서 자신의 작업에 대해서 웅변(雄辯)했다. 거침없이 당당하게 힘주어 말했다. 여기서도 김숙자 명인이 등장했다. 김숙자 명인이 도살풀이춤 등 경기무악을 바탕으로 해서 경기무무(京畿巫舞)를 정립한 것처럼, 강주미는 동해무악을 바탕으로 해서 동해무무(東海巫舞)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에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신념과 의지로,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어쩌면 강주미가 너무도 원대한 신념과 의지를 내세우고 있기에, 오히려 각자의 춤을 대하는 세심한 태도와 연구에는 소홀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강주미의 ‘동해굿춤에 대한’ 진정성(眞正性)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게 되나, 강주미의 ‘동해굿춤을 향한’ 구체성(具體性)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21세기의 강주미는 지난 20세기의 민족미학 또는 민족춤 혹은 민중춤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이와 관련해서 여러 사람이 존재하나, ‘채희완의 민족미학’ 또는 ‘채희완의 무용미학’을 바탕으로 한 민족춤의 실천자로서 강주미를 높이 평가한다. 평자(評者)로서의 가감이 없는 찬사다. 그러나 21세기에 존재하는 강주미조차도, 지난 세기의 이 분야와 관련된 인물들의 허(虛)와 실(實)을 동시에 보였다는 점이 안타깝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민중미학’ 또는 ‘민족미학’을 내세웠던 일련의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웅변력에 감탄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실천력이 따르지 못하는 게 못내 안타까웠다. 마찬가지로 강주미의 춤판 ‘동해로 가는 길Ⅱ’도 그랬다. 못내 섭섭했다. 

<동해로 가는 길>  사진_ 박병민

 

아직은 강주미가 김숙자가 될 수 없는 이유 


김숙자가 ‘경기굿춤’을 정립했듯이, 강주미는 ‘동해굿춤’을 그러한 반열에 올리려는 명분은 인정하지만, 뼛속 깊이 그런 생각이라면 이번의 춤판보다는 더 높은 수준의 춤을 보여줘야 했다. 강주미는 겸손하고 신중해서, 김숙자 명인과 자신을 동일선으로 놓고 생각한 것은 절대 아니겠다. 그러함에도 김숙자 명인을 거명한 이상, 거기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냈어야 했다. 


춤판을 지켜보면서 강주미와 김숙자는 너무 멀리 존재한다는 걸 확인한다. 김숙자는 평생 그것에 전념(專念)한 인물이다. 강주미는 동해무속을 바탕으로 한 무악(巫樂)과 무무(巫舞)에 대해서 얼마만큼 시간과 노력을 했을까? 이건 동해무무에 관한 강주미의 열정과는 전혀 별개다. 


이번 춤판은 게스트(태평무 정은주) 특별출연을 제외하면, 모두 6개의 레퍼토리다. 이 중에서 ‘동해굿춤’을 직접적으로 연관할 수 있는 레퍼토리는 셋이었다. 


<동해 삼오장춤>과 <동해 신태집춤>은 안타까웠다. 강주미라는 춤꾼이 춤을 참 잘 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과연 이 두 춤을 얼마만큼 ‘재구성’과 ‘재창작’으로 봐야 할지는 갸우뚱해진다. 여기서 재구성과 재창작에 관해 원론적으로 논의할 여유도 없겠지만, 결과적으로 재구성이라고 부르든 재창작으로 부르는 것과 무관하게, “동해굿춤의 ‘원형’ 또는 ‘전형’이 얼마만큼 강주미의 내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여기서부터 본인과 주변이 다시금 점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상태에서 과연 “이 춤이 언젠가 강주미류(流)가 될 수 있다”고 확언하기 어려웠다. 그건 김정화가 바라는 것이기도 하고, 나 또한 내심 바라는 것이기는 하겠지만, 이번 무대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꽤 멀게 느껴진다. 


춤판의 시작이 된 <동해로 가는 길>에선 강주미의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어쩌면 강주미는 현재로선 이런 창작성과 즉흥성이 가미된 춤이 더욱 어울리는 것 같다. 이 작품은 창작무용제에서 호평을 받을 수 있는 대작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춤판의 끝을 장식한 <정윤화류 영남북춤>은 오히려 강주미 스스로가 매우 만족도가 낮지 않을까 싶다. 정윤화류 영남북춤은 이렇게 말미에 부칠 춤이었을까? 사실 이 춤 자체는 ‘동해굿춤’과는 전혀 별개다. 그러나 이 춤이 부산지역의 춤맥의 커다란 존재가 아닌가! 


박종환과 강주미의 이인무는 참 안타까웠다. 두 분은 모두 훌륭한 춤꾼이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춤꾼으로서의 분명한 철학과 미학을 갖고 춤추는 분들이다. 그러함에도, 이번 춤은 어떤 논리를 펼치며 방어를 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무대에서는 두 사람의 교차하는 호흡이 느껴지지 않았다. 강주미 춤꾼이 더욱 느끼겠지만, 이번 무대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북을 멘 포즈에서 만들어지는 정지 동작에선 안정감이 덜 했다. 지금 저 춤이 과연 이 춤에 몰입해서 스스로 희열과 신명을 느끼고 있는가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춤판에서 2인무처럼 끌리는 것도 없지만, 2인무처럼 위험한 것도 없다. 한 사람의 호흡이 또 한 사람에게 전달되는데, 그것이 흔들어지면 몰입할 수가 없게 된다. 아주 솔직히 말해도 좋을까? 이번 춤판의 중간에 박종환 명무가 출연해서 ‘홀춤’으로 봤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정윤화류 영남북춤>  사진_ 박병민

 

본공연? 워크샵? 리허설?


강주미의 이번 춤판은 전혀 어설프진 않았으나, 매우 어수선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공연이 진행되면서, 이게 최종적인 ‘본공연’인가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시작 전부터 끝까지 그랬다.  


공연장에 들어섰을 때, 철가야금이 들렸다. 최경철의 연주는 산조에 바탕을 둔 즉흥가락처럼 들렸다. 이건 분명 공연 전의 배경이라면, 오히려 좀 더 확성의 불륨을 적게 했으면 어떠했을까? 무대에서 그가 연주하고 있는데, 오히려 객석 일부 관객들은 친목 모임에 온 것과 같이 객석에서 인사를 나뉘었다. 오히려 가야금 소리가 잔잔했다면, 그 관객들의 소리도 그렇게까지 크진 않았을까 싶었다. 


음향과 조명을 세세히 얘기한다면, 말이 너무 길어질 것 같다. 아쟁과 소리를 함께 하는 정효선님의 마이크가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소리를 계속하고, 급기야 무대 스텝이 와서 마이크를 점검하는 건, 대한민국의 경향(京鄕) 각지의 공연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나와 같은 입장에선 매우 생소했다. 공연장 내부는 왜 이리 추울까? 공연장 내부에서는 외투를 벗는 게 예의여서 그렇게 했다지만, 중간에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외투를 다시 챙겨 입어야 했다. 공연장의 외관과 로비와는 별도로, 공연장의 내부는 1980년대쯤 매우 열악한 환경의 공연장과 다름없었다. 


한 공연을 준비하기에 열정적으로 준비한 춤꾼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겠으나, 앞으로 이런 무대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확실하게 말해 둘 필요가 있다. 이번 공연은 최종적인 단계의 완성된 공연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준비과정으로서의 워크숍’과 ‘공연 직전의 리허설’과 같았다는 말을 안 할 수 없다.


강주미는 춤에 전념했으면 좋겠으나, 끝나자마자 상수와 하수를 오가면서 마이크를 들고 무대에 나섰다. 강주미는 인문학적 기반을 든든하게 갖춘 춤꾼으로서, 자신의 춤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는 춤꾼이다. 그러함에도, 춤의 레퍼토리 사이에서 나와서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즉흥적으로 하는 말들은 공연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더욱 어수선하게 했다. 


강주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춤꾼으로서의 잠시 휴식이라고 했다. 모든 것을 다 준비하는 사람으로서의 어려움을 알고 있지만, 그걸 관객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그건 프로가 아니다. 관객들은 왜 그런 춤꾼이 헐떡거리며 말하는 멘트를 들어야 할까? 이주영 평론가 등에게 중간에 멘트를 부탁했으면, 관객들은 더 편하게 감상할 수 있고, 춤꾼 자신도 더 춤에 집중해서 완성도를 높이지 않았을까?


일반 관객은 그녀의 연풍대를 보면서 박수를 보냈다지만, 이런 연풍대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정치(精緻)하지 못했다. 정교하거나 치밀한 것이 아니라, 매우 현장적이고 즉흥적이었다. 매우 들뜨고 달뜬 느낌이 강했다. 


강주미가 추는 춤은 굿춤(巫舞)이다. 굿판의 무녀는 어떠한가? 오히려 그 반대다. 굿판의 구경꾼을 들뜨고 달뜨게 흥분시키게 만들지만, 결코 그 자신이 그렇지는 않다. 그래선 안 된다. 이번 춤판에 한정해서 강주미를 얘기하자면, 무녀(巫女)에 못 미친 무녀(舞女)였다. 

<동해 삼오장춤>  사진_ 박병민

  

<동해 신태집춤>  사진_ 박병민

 

20세기 채희아 vs 21세기 강주미  

 

21세기의 강주미를 보면서, 지난 20세기의 채희아가 생각났다. 채희아와 강주미는 닮은꼴이다. 황해도의 강신무와 경상도의 세습무의 차이가 있으나, 훌륭한 무녀 밑에서 일정기간 수학을 했다는 점에서 일단 그렇다. 


채희아는 서울대학교 국악과 출신으로, 국립국악원에서 여악사로 활동을 하다 미국 유학을 했다. 민족음악학을 연구하다가 한국에 왔다. 그는 문예진흥원(현, 문화예술위원회) 자료관에서 김금화 만신의 굿을 보았다. 서울대학교 국악과 동문인 최종민(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그에게 김금화 만신을 소개해주었고. 내림굿을 받고 신딸이 되었다. 채희아는 영화 <낙월도>에도 무당역할로 출연했다. 


내 입장에서 보면, 채희아와 강주미는 닮은꼴이다. 우선 김금화와 채희아, 김동언과 강주미와의 관계다. 두 사람에게서 모두 느낄 수 있는 건, ‘이성과 감성의 현명한 결합’이다. 지적 또는 학적 기반으로 한 예술적 영역의 확장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서 공히 느낄 수 있는 것은, 굿을 표방한 공연에서의 집중력과 완성도,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카리스마나 아우라가 부족하다는 거다. 이건 결국 ‘공력’과 연관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누구보다도 강주미가 언젠가 김숙자와 같은 인물이 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현재로선 ‘갖춘 것’과 ‘갖추지 못한 것’을,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내야 한다. 


풍류전통예술원, 훗날 ‘지갑성 일행’이 되길 


일단 갖춘 것은 악사일지 모른다. 춤판의 어수선함과 공연장의 미미함 속에서도, 이번 공연의 연주가들은 모두 수준급이었다. 풍류전통예술원이란 이름으로 뭉친 악사들을 주목하게 된다. 정동훈(예술감독), 이정현, 권용우는 물론이요, 울산지역을 기반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는 ‘내드름연희단’의 어성범, 서희진 5인의 합(合)이 매우 좋았다. 


과거 김숙자의 춤판을 살린건 바로, 경기무악(京畿巫樂)의 대가들이었다. 지갑성(장구)을 중심으로 임선문(해금), 이용우(대금), 이충선(피리), 전태용 (징, 해금), 정일동(꽹과리) 등은 김숙자의 경기굿춤에 늘 함께 했다. 앞으로 강주미의 영남무악에 기반을 둔 영남굿춤도 이들 악사들이 보다 더 확고부동한 춤판의 무게 중심이 되길 기대한다. 


본(本)이 확실해야, 재(再)가 형성된다   


2022년 강주미 춤판에선 유독 재구성과 재창작이란 단어가 눈에 띤다. 재(再)라는 것은 ‘다시’ 혹은 ‘둘째’를 뜻한다. 재(再)를 붙일 수 있는 건, 본(本)과의 친밀성이다. 이런 친밀성을 전제로 해서, 차이성이 나오는 거다. 앞서 존재하는 본(本)의 특성을 잘 간파한 후에, 그것과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도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결국 ‘짜임새’이다. 본(本)의 짜임새를 알고, 재(再)의 짜임새를 구축해내야 한다. 강주미는 과연 그 단계에 이르렀을까? 나는 두 개의 춤을 보면서 강주미가 춤을 잘 추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러나 이 춤 안에는 ‘짜임새’를 발견하기보다는, 강주미라는 춤꾼이 가지고 있는 ‘즉흥성’을 확인했다. 현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임기응변(臨機應變)적인 역량은 춤꾼에게는 강점이다. 이런 강점이 강주미에게는 매우 많아 보인다. 그러나 이런 특성이 언제나 어디서나 미덕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부산지역을 대표하는 강주미 춤꾼에게 간곡하게 당부하고자 한다. 앞으로 동해굿춤에 대한 욕망을 줄이고, 동해굿춤을 향한 능력을 더 키워주시길 바란다. 강주미의 춤의 공력은 인정하지만, 오래도록 굿판과 가까워했던 시각에선, 강주미의 굿춤은 아직 그럴 단계에서 논할 바가 되지 못한다. 


개별적인 춤마다 더욱 오래도록 수련해야 한다. 일단 춤꾼 자신의 동해안 춤을 더욱 체화할 필요가 있다. 춤꾼 자신이 일단 ‘몸과 마음이 일치해서 느껴지는 희열감’을 경험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강주미에게서 그런 걸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연후에 ‘재구성’과 ‘재창작’을 얘기하는 것이 무속적 측면에서도 그렇고, 예술적인 측면에서 바람직한 프로세스다.

<동해 쇠춤>  사진_ 박병민

 

강주미류가 될 것 같은 <동해 쇠춤>


2022년 강주미 춤판에서 인정할 건 <동해 쇠춤>이다. ‘재창작’의 영역에서, 동해 쇠춤이 그렇다. 원형성을 얘기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평가가 내릴 수 있다. 이번 춤판에서 안정적으로 춤꾼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했다. ‘그래, 저게 바로 강주미’라고 인정할 만하다. 강주미는 확실히 음악과 춤을 동시에 알고 있는 춤꾼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창의성과 즉흥성이 돋보이는 강주미에게도 썩 어울리는 춤 레파토리였다. 현재로선 ‘강주미류’가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프로그램 <동해 쇠춤>이다. 


여기서 ‘동해’라는 것이 곧 ‘동해안 무속’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춤이 더욱 발전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더 큰 지향점에 이르길 바란다면, 동해안 굿판에서 화랭이(양중)의 쇠가락을 더 깊게 연구하고 체화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될 때 강주미의 쇠장단과 강주미의 쇠춤이 앞으로 훌륭한 ‘동해굿춤’의 중요한 레퍼토리의 하나로 자리 잡을 것 같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