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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풋과 아웃풋의 현격한 차이: 코리아그라피

‘코리아 그라피’(Korea + Choreography)는 서울남산국악당과 무용역사기록학회의 공동사업이다(1.27.-28. 서울남산국악당). 무용역사기록학회의 10명의 회원이 주축이 되어서, ‘한국美에 대한 안무적 탐색’을 하는 프로젝트였다. 부제는 ‘우리소리, 추어지다’. 춤뿐 아니라, 음악에 대한 비중도 높았기에, 더욱 관심이 갔다. 일찍부터 응원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매우 안타까웠다.


‘인풋과 아웃풋의 현격한 격차.’ 이 한 줄로 평하려 한다. 이 무대를 만들기 위해 애쓴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예술감독을 비롯해서 연출, 협력연출, 무대감독, 조명감독, 음향감독, 총괄진행 및 진행한 분께 고개 숙여 감사한다. 내가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든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전제 조건인 리서치와 아카이빙이 충실해 보였다. 이를 통해서 한국춤의 새로운 레퍼토리가 탄생할 기반이 든든하게 구축되어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풋‘에 비해서, 실제 무대에서 최종적으로 선보인 ’아웃풋‘은 그렇지 못했다.

  

최준명 혜강신귀만

 

최준명, <춤의 향기가 만리를 넘다>


‘신민요춤’에 기반을 두었다. 대본(한정원)이 있다. 대본이 있다는 건, 스토리가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춤을 통해서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최준명은 ‘댄스드라마’를 지향했다. 그가 지향하는 드라마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드라마라는 것이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춤을 통해서 스토리를 연결해야 했다. 난, 오히려 정반대로 보였다. 


그래서 나빴다는 건 또한 아니다. 댄스드라마가 아니란 얘기다. 이 작품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연극이나 뮤지컬에서 중간에 다소 지루해질 때, 막간에서 나오는 춤으로선 아주 적격이었다.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고, 짧은 에피소드를 통해서 분위기를 새롭게 환기하는 기능이다. 관객에게서 뭔가 궁금증을 자아내고, 기분 좋게 만들어준 건 분명하다. 


‘신민요’ 또는 ‘신민요춤’이라는 명제 아래서, 이야기와 춤, 이야기와 음악, 춤과 음악이라는 이 셋이 서로 부응하지 못했다는 건 꼭 짚고 싶다. 최준명은 이 춤을 만들기 위해서, 황무봉과 배구자를 소환했다. 그런데 거리가 참 멀다. 나도, 배구자의 춤과 황무봉의 안무를 무대에서 그대로 재연하는 걸 원치 않는다. 그러나 이들을 떠올릴 때, 보편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그걸 발견하기 어렵다. 


신민요와 연관해서 든든하게 밑바탕이 되지 못했다. 그러함에도 음악그룹 더 튠(이성순, 고현경)과 아코디언(강희수)이 그들만의 음악적인 색깔을 드러낸 것이기에 뭐라 탓할 수도 없고, 때론 그것 자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음악과 춤의 조화다. 세 분의 춤꾼(최준명, 김향, 손미정)과 세 분의 연주가가 얼마만큼 조화로웠는지 각기 생각해 볼 일이다. 


여섯 사람에게 신민요는 어떤 존재였을까? ‘한국춤’하면 떠오르는 본질이 있듯이, ‘신민요’하면 떠오르는 본질이 있다. 그런 본질이 음악에 느껴지지 않았다. 창부타령·노들강변·양산도라고 하면, 전통적 발성으로 부르던, 재즈적 발성으로 부르던, 국악기로 연주하든, 대중음악적으로 편곡을 하든, 기존의 결과물에선 ‘신민요’의 음악적 핵심이 존재했다. 저마다의 스타일이 다르다손 치더라도 그랬다. 난, 이번 음악과 춤에 그걸 느끼지 못했다. 


김수현, <박씨전, 추어지다> 


춤꾼으로서, 안무가로서, 김수현은 둘 다 능력을 갖추었다. 그의 작품을 보면, 무엇을 얘기하려는 것인지 분명히 전달된다. 전북도립국악원 무용단과 부산시립무용단과 만든 작품은 수작이다. 김수현 또한 춤을 통해서 무거운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코믹함이나 편안함을 바탕으로 해서 관객을 무장해제 시키면서 즐기게 하는 강점이 있다. 


그러나 이번은 그렇지 못했다. 김수현의 춤에 집중하지 않게 된다. 이유는 뭘까? 전체적으로 주도권을 너무 서정금의 판소리에게 빼앗긴 느낌이다. 서정금이 판소리를 통해서 코믹하게 만들어낸 분위기를 김수현이 매우 충실하게 춤동작으로 재연하는 느낌이다. 훌륭한 안무가이자 춤꾼이 마치 ‘백업댄서’로 존재하는 느낌이다.


서정금의 판소리는 줄여야 했다. 서정금은 관객에게 해학적인 기쁨만을 주려고 하는 태도로 무대에서 일관했다. 처음에는 긴장감이 풀렸고 재밌었지만, 점차 그의 소리도 흥미를 잃어갔다. 무대에서 제한된 시간 안에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해서 무대에서 보여준 부분은 사실 관객에게는 너무 익숙하고, 별반 궁금하지 않을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둘은 오직 코믹한 상황만을 염두에 두었고, 그런 결과물을 만들어주었다. 


두 사람은 무대에서 ‘얼굴 안 보여주기’만 성공하고 무대에서 내려간 꼴이다. 정작 박씨전의 주인공인 박씨의 심리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김수현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춤의 비중을 더 늘려야 했다. 춤과 소리가 1:1이라기보다는, 익숙한 내용이기에 춤의 비중은 더 높여야 했다. 소리에 비해 춤의 비중이 너무 작았다. 춤은 그저 ‘소리를 몸짓으로 설명하는’ 역할에 만족해야 했던 점이 무척 아쉽다. 만약 이 작품을 다시 만든다면, 김수현의 춤이 더욱더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차수정 ⓒ혜강신귀만

 

차수정, <내 마음의 사유> 


좋은 춤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 춤은 지금까지 우리가 익히 봐왔던 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안무자 리서치 계획서를 보면, 핵심 키워드는 넷이다. 상상력, 즉흥성, 절제미. 여백미. 이 중에서 절제미와 여백미는 충분히 객석에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가장 아쉬운 것은 상상력이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전개되는 상상을 말한다. 따라서 이 작품이야말로, 관객에게 저마다 춤을 즐기면서 스토리텔링을 상상해볼 수 있는 모멘트가 있어야 했다. 아쉽게도 그런 게 없다. 


이런 춤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림으로 치면 ‘구상화’가 되어야 한다. 그림을 양분할 때, 구상과 비구상(추상)으로 나눈다. 안무 리서치를 보면, 움직임의 방법을 ‘추상적 움직임’과 ‘표현적 움직임’으로 나눴다. 


<내마음의 사유>는 ‘추상적 움직임’이다. 일단 제목과 연관해서 볼 때, 한국춤의 맥락으로 볼 때, 이건 그림으로 치면 비구상(추상)으로 주관적 가치에 비중을 두는 게 맞다. 그러나 확실한 맹점이 있다. <내 마음의 사유>는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속에 존재하지 않는 춤을 존재하게 만들어내는 것이었다면, 그림 속의 자연과 사람과 악기와 교유(交遊)하는 것이 있어야 했다. 함께 만나서 즐기는 것이다! 


차수정의 춤 자체는 훌륭했으나, 그 춤은 그림 속의 공간에 들어가서 ‘자연, 사람, 악기’와 감정을 넘나들면서 공감하는 것이 부족했다. 지향하는 게 ‘추상적 움직임’이었다고 해도, 그 안에는 분명 ‘표현적 움직임’이 공존했어야 했다. 관객은 그래야만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뒷배경 삼아서, 차수정의 춤 속에 신비롭게 빠질 수 있다. 이 작품을 앞으로 살리려 한다면, 춤을 통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중요하다. 

 

성윤선과 염현주, <지음, 지음, 지음> 


성윤선과 염현주, 지음(知音)이 만났다. 둘이 만나서 지음(作), 곧 작품을 만들어내는 방식이었다. ‘지음의 지음’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까? 가장 기대한 작품이다. 


장구와 북, 두 악기의 만남은 더 흥미롭다. 예전 남녀 간의 운우지정(雲雨之情)이란 말이 있다. 구름에 해당하는 악기가 북이요. 비에 해당하는 악기가 장구다. 과거의 관습을 따르자면, 장구는 여성이요, 북은 남성이다. 


이런 두 악기가 지란지교(芝蘭之交)와 같은 두 여성 춤꾼을 통해서 펼쳐지는 춤판이 무척 기대가 되었다. 좋아한 관객도 많았다. 나는 이게 하나의 작품으로 보이진 않았다. 두 사람의 ‘기예의 만남’으로서 인정할 수 있다.


공연의 구조는 ‘내가 하고, 네가 하고, 같이 하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반적 구조다. 다소 뻔했다고 하면 실례일까? 그래도 좋다. 그렇다면 그 안에 뭔가 다른 것을 채워야 한다. 공연의 ‘실제’는 공연의 ‘명분’을 따르지 못했다. 


장구춤이 끝나면, 친구를 불러낸다. 춤꾼은 이를 서구철학에서의 ‘호명’이라고 의미부여한다. 과연 이 두 사람의 이런 형태의 공연에서, ‘각자의 삶에 드리워진 그늘도 포용할 줄 아는’ 두 사람이라고 관객들이 이해할 수가 있을까? 프로그램 노트의 풍성한 말에 비해서, 무대에서 보이는 것은 거의 예상할 수 있는 것들로 채워졌다. 


성윤선의 춤은 ‘장구춤’으로 봐야 할까? ‘설장구’로 봐야 할까? 여기선 말을 절제하겠다. 장구춤이나 설장구는 워낙 명인들이 많고 스타일이 다르다. 성윤선의 ‘장구춤’의 특징은 무엇일까? 

관객과의 소통에 큰 비중을 두는 것일까? 그의 장구춤은 어떤 방식으로 완급조절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로선 찾기가 좀 힘들었다. 공연을 두 번 본 이유는 성윤선이란 춤꾼의 춤세계를 좀 더 잘 알고 싶어서였다.

 

성윤선과 염현주 ⓒ혜강신귀만

 

첫 번째 봤을 때, 장구춤을 추다가 갑자기 관객에게 중간박수가 안 나온 것에 대해서 불만 섞인 말투로 얘기했다. 당시 관객들은 큰 박수로 환호했다. 저녁 공연에서도 그녀는 또 공연을 하다가 말을 했다. “낮 공연에선 중간에 박수가 안 나와서 쫄았다”고 말한다. 이런 솔직한 발언에 환호하는 관객들이 많았다. 나는 아니다. 평자(評者)의 입장에선, 관객의 반응에 상관없이 좀 더 장구에 몰입하는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주었어야 했다. 그래서 관객이 자발적으로 무대를 향해 박수를 보냈어야 했다. 


염현주의 진도북춤은 정통(正統)이었다. 박병천 명인의 특징을 많은 부분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둘 다 이번 프로젝트와 어울리진 않아 보인다. 성윤선의 장구춤과 염현주의 진도북춤이 타 공연장의 ‘팔일’에서라면, 모두 아주 큰 박수를 받았을 거다. 두 사람의 지음이 만났다고 하지만 “아직은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진 못함”이라고 말하는 게 평자(評者)의 역할이다.

 

유정숙, <그 너머의 봄> 


이번 프로젝트가 춤과 음악의 이상적인 만남을 지향했다면, 이선희의 거문고와 유정숙의 춤은 만족도가 높았다. 이선희는 산조를 기반으로 해서 음악을 만들어냈는데,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음향적 효과와 화성적 효과를 더해가면서 ‘전통 같은 창작’ ‘창작 같은 전통’을 동시에 만족시켜 주었다. 유정숙은 음악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 음악의 입장에선, 춤을 보면서 선명하게 둘을 나눌 수 있다. 음악이 그저 ‘겉’ 배경이 된 춤과 음악의 ‘속’을 알고 추는 춤은 확연히 구분할 수 있다. 


유정숙에게선 확실힌 연륜이 느껴졌다. 일찍이 좋은 스승에게서 다양한 춤을 전수받고, 직업무용단에서 잔뼈가 굵은 춤꾼임을 증명했다. 다양한 춤에 대한 경험이 작품을 기름지게 만들어냈다. 춘앵전, 태평무, 산조를 키워드로 삼았다. 산조라는 큰 구조 안에서도, 춘앵전과 태평무의 특징과 매력을 잘 용해시키고 있다. 


한국춤의 미학으로서 ‘흐름’을 얘기한다. 이번 9개의 작품 중에서 ‘흐름의 미학’을 논할 수 있는 작품은 서정숙과 유정숙이다. 서정숙의 흐름이 ‘내재율’ 같았다면, 유정숙의 흐름은 ‘외형율’이다. 그러하기에 무대 뒤에서 시작한 춤의 흐름이 객석까지 전달된다. 춤꾼의 움직임은 마치 계절의 변화와 같은데, 여기에 ‘호흡’이 더해져서 자연스러움은 배가되었다. 


내가 유정숙의 춤을 인정하는 건, 춤의 ‘손끝’이 살아있는 거다. 이것 또한 음악과 연관이 있다. 가야금산조를 연주할 때 그러한데, 나는 춤도 똑같다고 생각된다. 지난 20세기 한국무용가들에게 들은 말도 대략 비슷하다. ‘손끝을 떨어뜨려’라고 하는 말이다. 요즘 한국 무용계에선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유정숙은 춤을 출 때, 손끝으로 기운을 떨어뜨리는 것을 알았다. 


이런 유정숙조차도, 전 세대의 춤꾼과 비교해선 탁월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나와 같이 ‘흐름’과 ‘호흡’과 ‘손끝’을 중심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지금도 국악계에선 이 셋을 매우 중시한다. 무용계도 그럴까? 가야금산조의 미학은 흐름과 호흡과 손끝의 조화에서 생긴다. 

 

이번 공연의 부제가 ‘우리 소리, 추어지다’이다. 추는 게 아니라, 추어지게 하는 게 호흡이다. 호흡에서 흐름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은, 예나 이제나 변동이 없다. 유정숙의 춤은 안정적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는 에너지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의 춤 또한 그와 동년배였던 선배 무용가들의 그것에 버금가게 되려면 더 공력을 쌓아야 한다.

  

유정숙 ⓒ혜강신귀만

 

남수정, <섬섬 (閃閃)> 


남수정은 아이디어는 좋았다. 이것저것을 조잡하게 덧붙이지 않고, 오직 한 가지의 이미지를 설정한 후에,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밀어붙이는 남수정이 좋은 건 사살이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선 아이디어를 뛰어넘는 아이디얼이 춤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이번 춤판을 살린 건, 판소리를 하는 백현호였다. 춤꾼도 아닌 그가 무대에서 여러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무대를 살려내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남수정은 판소리의 동작(발림)을 춤화(化)시키려 했던 것일까? 춤꾼이 가지고 있는 춤의 안정성이나 뭔가 고민하고 있다는 사유의 힘이 무대에서 존재하긴 했으나, 이를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드러내진 못했다. 남수정의 이번 춤은 너무 상체와 손동작에 많은 역할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멈춰서서 바라보면서, 관객과 함께 호흡을 하면서, 좀 더 높은 세계로 이끄는 추진력이 약했다. 뭔가 매우 분주해 보였다. 춤은 추어지고 있으나, 머리는 뭔가 복잡하고 정리되지 않은 것과 같았다. 나만 그렇게 본 것일까?


이번 작품은 뭔가 전체적으로 작품이 ’모색‘만 하다가 끝나버린 느낌이다. 시종일관 뭔가를 하고자 하는, 또한 만들고자 하는 모습이 다소 부담이 되었다. 공연의 타이틀처럼 정말 ’추어지다‘, 이런 느낌은 상대적으로 덜했다.


남수정에게 묻고 싶다. 삶의 유한성과 무상함이 춤으로 잘 표현되었다고 생각되는가? ‘서구의 마임에 해당하는 발림이 춤사위의 곳곳에 녹아있는’ 것인가? ‘별주부 내면의 이중성‘은 어떻게 춤으로 형상화되었나? 


문진수, <음유재인>


문진수는 ‘연희’종목을 ‘춤’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자기화하려는 춤꾼이란 생각이 든다. 문진수의 <열두발상모춤>에서도 그러했다. 열두발을 그저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여러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이번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소고를 가지고 노는 과거 연희판의 소고춤에서 벗어나서, 소고를 어떻게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과 연구를 높이 산다.


문진수의 춤은, ‘기술과 예술 사이’에 존재한다. ‘아직은’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보이진 않는다. 아름다운 구슬이 참 많은데, 그걸 잘 이은 목걸이는 아니다. 


<열두발상모춤>도 그렇고, <음유재인>도 그렇고 ‘기술점수’는 아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기존에 별반 하지 않았던 동작을 가지고서 거기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기술력이 그대로 예술력으로 바뀌진 않는다. 피겨스케이트 선수가 여러 기술을 선보인다 치더라도, 그것을 연결해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지지 못할 때 예술점수를 낮게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문진수의 기술적 역량은 예술적인 작품에서 아직 생생하게 빛이 난다곤 보긴 어렵다.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기술적인 동작 계발을 조금 덜 하면서, 자신이 다루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농악판에서 열두발은 어떤 용도로 쓰였고, 소고는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춤’이라는 영역에서는 달라질 수 있고 달리 평가될 수 있으나, 문진수의 기예를 ‘연희’라는 테두리에서 볼 때는 흥과 신명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한국의 마당춤 특유의 역동성이 덜 느껴진다. 


문진수의 춤이 보다 남성성과 역동성을 보강하면 어떨까? 춤을 추는 동작이나, 춤을 추면서 옷자락을 다루는 방법에서 좀 더 유쾌하고 통쾌한 시원함이 느껴지면 어떨까? 굴신과 섬세함과 함께, 도약과 대범함이 공존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게 된다면 김보라의 구음을 뚫고서, 문진수의 음유재인은 더 높이 돋보일 수 있다.

 

서정숙, <흰 그늘>


서울교방의 동인으로서, 대표적인 춤꾼임을 확인했다. 민족춤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녀의 오랜 고민이 담긴 역량도 감지되었다. 특히 악기가 아닌 구음(口音)을 통해서 춤을 만들어가는 선구자로서의 완성도도 인정할 수 있다.


서정숙에게 따라 붙는 외유내강(外柔內剛)도 인정할 수 있다. 뒤태로부터 시작해서 점차 생각을 겹겹이 쌓아가는 듯한 흐름도 좋았다. 프로그램북 등에서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작품의 제목이 된 ‘흰 그늘’이라는 걸 김지하의 철학과 미학과 연관해 보고자 하는 마음도 생긴다. 


그러나, 딱 그러했다. 서정숙의 춤을 구성하고 있는 ‘외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점증되었지만, 정작 서정숙의 춤 자체의 ‘내적인’ 것은, 내 입장에서 보면 과거의 그것과 별 차이 없어 보였다.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이미 자신의 틀이 확고하고 그것을 외부에서 인정하고 감동하는 상황에서, 틀을 벗어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서정숙이라는 춤꾼의 ‘하나의 욕심’이란 생각도 들게 된다.


이번 공연은 리서치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지는 공연인데, 그 ‘리서치’를 이번 무대와 연관해서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 나와 같은 관객은 이제 서정숙이라는 춤꾼이, 작품마다 어떤 하나를 분명하게 드러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내 춤 안에 ‘막사발’과 ‘달항아리’가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어쩌면 욕심인지 모른다. 이번 작품에선 ‘막사발’이 되고, 다른 작품에선 ‘달항아리’가 되어서, 보다 선명하고 진솔하게 자신의 개별 작품이 갖는 특장(特長)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냈으면 좋겠다. 


‘구음심무(口音心舞)’라는 게, 구음을 가지고 추는 새로운 형태로서의 변별성에 머물지 않길 바란다. 구음검무(口音劍舞)와 같은 것의 새로운 변이(變異)로서의 가치가 아니길 바란다. 구음(口音)이란 음악적 변화 속에서, 검무나 민살풀이 등을 계속 가져오는 시리즈물이 아니길 바란다. 

 

‘구음심무’가 한국춤의 명실상부한 장르로서 정착하게 되는 날을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 서정숙이라는 춤꾼이 ‘알을 깨는 아픔’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의 내 눈에 비친 서정숙은 그렇지 않다. 뭔가 겹겹이 쌓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좋게 얘기해선 공력이 쌓이는 것이고, 다르게 얘기한다면 자신 안에  안주한다는 거다. 서정숙은 과연 한국춤의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이주희, <적벽화전>


이주희의 북은 크게 인정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최고다. 남성을 능가하는 에너지에 완급조절을 매우 잘해 나간다. 북소리가 명징(明徵)해서 관객에게 선명하게 전달된다. <적벽화전>은 여러 대의 북을 사용한다. 이주희가 직접 무대에서 틀을 움직이면서 보다 역동적으로 만들고자 했다.


도입부에선 객석을 통해 깃발을 들고 무대를 향해 돌진한다. 전쟁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있다. 이러다가 여러 개의 북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치면서, 점차 감정을 고조시키고 있다. 


그녀의 북춤을 누구 뭐라 하겠는가? 문제는 작품의 핵심 키워드인 ‘전쟁’과 비애’가 작품을 통해서 얼마만큼 진지하게 전달되었냐 하는 문제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렇지 못했다. 슬픔을 북이라는 악기를 통해서 강렬하게 전달하려는 의도를 높이 산다. 초반부에 이주희는 비애를 표현하기 위해서, 약간의 표정 연기를 한다. 처음엔 그저 그러려니 했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주희 자신의 몰입도와 진정성은 계속 떨어지는 게 보였다. 북을 치는 에너지는 상승했다고 해도, 무대에 대한 몰입도는 점차 하향곡선을 그렸다. 


안타깝게 김영길 명인의 아쟁 연주 또한 그랬다. 김영길은 대단한 예술가이다. 그러나 무대에서 아쟁을 가지고 연주하는 모습이 아쟁으로 만들어내는 ‘효과맨’으로서의 역량을 확인하게 될 뿐이었다.


이주희는 퍼포머 또는 엔터테이너로 크게 인정하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이번 작품에서 그녀를 댄서이자 코레오그래퍼로 평가하는 건 주저하게 된다. 그의 몇몇 연기 또는 발성을 넘어서서, 끝부분에서 이주희의 괴성은 당황스러웠다. 


이걸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객석의 몇몇 관객에게서도 그런 느낌이 감지됨을 알 수 있다. 그 괴성이 코믹을 지향했더라면 더 웃기게 해야 했다. 그게 아닌가? 그게 매우 진지한 것이었다면, 이주희는 발성부터 바꿔야 했다. ‘아카이브 노트’에 적힌 것으로 따른다면 더 그래야만 했다. 이게 ‘무명용사들을 위한 레퀴엠’을 향해 간 것이 맞는가? 관객의 한 사람이라도 이걸 해프닝과 같은 퍼포먼스로 보이게 했다면, 그건 확실히 실패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서너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남수정 ⓒ혜강신귀만


춤작가는 없었다! 


씁쓸한 마음으로 객석에서 일어나는데, 오래전 ‘춤작가 12인전’에서 만났던 무용가 몇 분의 모습이 보였다. 1987년에 시작된 ‘춤작가 12인전’을 아는가? 우리 춤계에 끼친 영향은 크다. 춤작가라는 말은 이 시리즈를 통해서 정착되었다. 무용계의 안무가와 춤꾼을 소설가나 미술가와 동일 영역에서 판단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 및 작가정신이 무용에서도 얼마나 중요하고, 대한민국 춤계에도 출중한 작가가 있다는 걸 해를 거듭할수록 확인할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 그들의 40대와 50대의 작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시대가 달라졌고, 경향도 달라졌다. 그러하기에 단순비교의 위험성이 있으나, 분명히 그 때의 무대가 더 낫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확히 말한다면, 이번 공연에 출연한 10인은 지금 무용계의 70대와 80대에 비해서 ‘작가정신’이 충만했다고 볼 수 없다. 그런 의식은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한 개의 작품으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 더 낫다고 보기 어렵다. 


춤작가가 되기 위해 중요한 건 뭘까? 춤을 잘 추거나, 춤을 잘 짜는 사람은 춤작가의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충분조건은 채워가야 한다. 직접 연출을 하지 않더라도, 연출이란 영역 속에서 무대 위의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게 춤작가의 충분조건이다. 여기에 더해 음악도 알아야 한다. 음악과 춤을 어떻게 조화롭게 진행해야 할 것인가? 자신만의 혜안(慧眼)을 갖는 게 중요하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무용역사기록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