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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_ Re-collection


2015년 3월
2015.03.27
한국 춤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무용가 조택원(1907-1976)


[사진1] 조택원 사진집에 실린 젊은 시절의 조택원


 1907년 함경남도 함흥의 명망 높은 가문의 삼대독자로 태어난 조택원은 10살이 되던 해 서울로 상경한 후 휘문보통고등학교와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법과에 진학하여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어렸을 때부터 신체적 능력이 남달랐는지 휘문보통고등학교에 재학 당시, 전국정구대회에서 입상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춘 정구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가 한국무용계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훌륭한 춤꾼이 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1922년은 조택원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해로 기록된다. 16세가 되던 해에 조택원은 우연한 기회로 러시아에서 온 무용가 박세면의 춤을 보게 되고, 그에게 러시아 민속춤인 코박춤(슬라브 풍의 빠른 템포의 춤)을 배워 토월회 무대에서 첫 무용공연을 가졌다. 당시 소위 엘리트 코스라 말하는 성장과정을 거쳐 온 명문가의 자제로서는 다소 파격적인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사진2] 최승희와 조택원이 공연에 함께 출연한 모습


 조택원이 정식으로 무용에 입문하게 된 것은 최승희의 스승이자 일본근대무용의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는 이시이 바쿠(石井漠)와의 만남 이후였다. 1927년, 조택원은 경성공회당에서 이시이 바쿠의 무용공연을 관람하게 되고, 그의 춤에 홀리듯 완전히 매료되어 이듬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바쿠의 문하생으로서 본격적인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춤 인생을 이야기할 때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최승희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스승 밑에서 춤을 배웠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다양한 부분에서 무용수로서 그들의 삶은 매우 닮아 있다. 최승희가 그러했듯 조택원 또한 유학을 통해 받아들인 서양의 춤과 한국적 정서의 춤을 융합하여 <가사호접>, <만종>, <춘향조곡>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작품들을 창작해냈다. 지금이야 융합이라는 개념이 창작에 있어 핵심적인 키워드로 떠오른 시대라지만 그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발상이었으며, 그의 춤은 이전에는 없었던 표현방식으로 새로운 춤 즉, 신무용 그 자체였다. 그는 이러한 신무용을 고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미국 등에서 순회공연을 통해 널리 알렸는데, 이 또한 최승희의 행보와 흡사한 점으로 꼽을 수 있다.



[사진3] 조택원과 그의 부인이자 제자인 김문숙


 조택원의 춤에 대한 열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교육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귀국 후 1932년에 조택원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중앙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보육학교의 무용교수로 부임하여 후학들을 양성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춤에 대한 그의 이러한 열정과 재능을 최승희와 마찬가지로 고국인 한국보다 미국, 프랑스 등의 타국가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인정, 지원해 줬다는 사실은 지금까지도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미국 현대무용계의 거장으로 평가되는 루스 세인트 데니스(Ruth Saint Denis, 1879~1968)는 조택원의 재능을 높게 평가하여 든든한 후원자로서 미국에서 그의 활동을 지원해주었다. 조택원은 1949년에 뉴욕 자연사박물관에서 <신노심불로>를 공연하였을 뿐만 아니라 1953년에는 유네스코의 후원을 받아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치는 등 예술가로서 승승장구하였다. 이처럼 지칠 줄 모르는 춤에 대한 그의 열정, 노력 끝에 조택원은 생을 마감하기 2년 전인 1974년, 대한민국 문화훈장(제1호)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한국춤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데 크게 기여한 조택원과 최승희, 우리는 그들이 활짝 열어준 문을 통해 한국 춤이 더욱 멀리 더 높게 나아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할 것이다. 


사진출처:
[사진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82265
[사진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82265
[사진3]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5030621531013058



글_신찬은(성균관대 예술학협동과정 석사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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