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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_ Re-collection


2016년 4월
2016.04.30
시인의 언어로 몸짓을 찬미한 무용비평의 시초, 테오필 고띠에(Pierre Jules Théophile Gautier, 1811-1872)
[사진1] 테오필 고티에 

 무용이 엄연한 예술 장르로 인정받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무용에 대해 논하는 무용비평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용비평의 아버지라 불리는 테오필 고띠에(Pierre Jules Théophile Gautier, 1811-1872)는 사실 무용비평가라는 이름만으로 정의하는 데 무리가 있다. 그는 발자크, 보들레르, 플로베르 등 당대의 걸출한 문인들과 같은 시대를 풍미했던 프랑스의 낭만주의 작가이자 언론인, 예술비평가였다.

 미술 학도였던 고띠에는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위고(Victor Hugo)로부터 글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은 것을 계기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다. 고띠에는 작가로서 장편소설 <모팽 양(Mademoiselle de Maupin)>, 시집 <에모와 카메(Émaux et camées)> 등의 저서를 남겼지만, 공쿠르가 “묘지에는 무명의 찬미자들, 거의 알려지지 않은 동료들, 길거리 신문의 무명 문사들로 가득 찼는데, 이들 모두는 그를 시인이나 <모팽 양>의 저자로서가 아니라 저널리스트로서 회고하였다(281)”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언론인의 이미지가 강했다. 화가의 시선을 가진 고띠에는 뛰어난 감각으로써 예술을 포착하고 글을 쓰는 데 능했다. 고띠에가 가장 처음 글을 기고했던 곳은 동료였던 네르발(Gérard de Nerval)이 창간한 잡지 <연극 세계Le Monde Dramatique>였고, 가장 길게는 <라 프레스La Presse>지의 문예란에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글을 썼다. 보다 경제적인 이유로 수많은 비평문을 기고해야만 했던 고띠에는 작가가 아닌 비평가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의 글이 대상으로 하는 독자, 즉 대중들의 취향이나 수준에 대해서도 다소 조악(粗惡)한 것으로 보았다.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은 고띠에의 모든 저술 활동과 이념의 근거가 되는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언이다. 낭만발레의 시작점은 <라 실피드(La sylphide)>가 성행했던 1832년 경 정도로 볼 수 있으며, 고띠에가 대본을 쓴 <지젤(Giselle)> 역시 낭만발레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낭만발레는 1870년 무렵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와 함께 발레의 중심지가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옮겨가기 전까지 무대 위 ‘환상적인 세계’로써 대중들과 비평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진2] <지젤>을 연기하는 카를로타 그리시

 이제 그의 실제 무용비평을 살펴보자.

 엘슬러의 춤은 아카데미적 관념에서 더 이상 벗어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것은 스스로를 다른 발레리나와 구별해 주는 그녀만의 특성이다. 그녀의 춤은 탈리오니의 꿈 같고 순결무구한 우아함이라기보다는 감관에 보다 날카롭게 호소하는 것으로 훨씬 더 인간적이다. 탈리오니는 – 가톨릭에서 어떤 예술에 대해서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킨 표현이기는 하지만 – 기독교 무용수이다. 그녀는 자신이 두르기를 좋아했던 흰색 옥양목의 투명한 흐릿함의 한 가운데에서 요정처럼 떠다니고, 그녀는 자신의 핑크빛 발끝으로 하늘의 꽃의 꽃잎을 거의 구부리지 않는 행복한 요정을 닮았다. 그에 반해 엘슬러는 완벽한 이교도 무용수이다. 그녀는 허벅지가 보이고 금 허리띠의 옷을 입고 탬버린을 든 무용의 뮤즈, 테릅시코레(Terpsíchŏre)를 생각나게 한다. 그녀가 선정적인 팔을 뒤로 늘어뜨리고 대담하게 구부릴 때 사람들은 한 장면, 즉 헤르쿨라네움이나 폼페이에서 심벌즈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검은 배경에 흰 부조로 서 있는 아름다운 인물들을 떠올린다……유심론에 존중받아야 할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러나 그 무용에서는 유물론에도 약간의 것을 양보할 수 있다. 결국 무용은 눈을 즐겁게 하는 아름다운 신체를 우아한 자세로 보여 주고 신체의 윤곽을 드러내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이 없다. 그것은 침묵의 리듬이고, 보여지는 음악이다. 무용은 형이상학적 관념을 표현하기에는 적합치 않다. 그것은 오직 열정, 즉 사랑, 교태를 가진 욕정, 공격적인 남성 그리고 점잖을 빼는 여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위의 글에서 우리는 고띠에의 비평이 가진 특징들을 보게 된다. 먼저, 그는 여성 무용수의 외형적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데 정성을 쏟고 있다. 고띠에는 “무용수는 외적으로 아름답지 못한 것에 대해서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만큼 무용수의 아름다운 외모에 대해 강조했다. 고띠에에게 있어 무용은 ‘아름다운 몸과 그것이 빚어내는 우아함’을 보여주는 예술이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남성 무용수는 그에게 여성 무용수를 들어올리는 역할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루시앙 프티파(Lucien Petipa)나 생-레옹(Arthur Saint-Léon) 정도를 제외하고 나면, 고띠에의 인정을 받은 남성 무용수는 아주 드물다. 위 글에서 언급되는 ‘기독교적 무용수’ 마리 탈리오니(Marie Taglioni)와 ‘이교도적 무용수’ 파니 엘슬러(Fanny Elssler)는 당시 가장 주목받았던 상반된 이미지의 발레리나들이다. 고띠에는 비평가로서,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발레리나 카를로타 그리시(Carlotta Grisi)에 대해 각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시는 고띠에의 아내인 에르네스티나 그리시-고띠에(Ernestina Grisi-Gautier)의 친언니이기도 하다. 그는 그리시에 의한 영감으로  <지젤>과 <라 페리(La Peri)>의 대본을 쓰고 <지젤>에서는 제작 과정에도 깊이 관여했으며, 두 작품으로 인해 그리시는 무용수로서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또한 위 글에서처럼 고띠에의 비평은 매우 문학적이다. 비록 위고, 라마르띤느(Alphonse de Lamartine),  뮈쎄(Alfred de Musset) 등 당대의 위대한 시인들의 위상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일생동안 스스로 시인이길 자처했던 고띠에는 시적 언어로써 자신의 비평 세계를 구축했다. 그의 묘사는 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눈 앞에 그려볼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다. 특히 그가 그토록 중요시했던 여성 무용수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는 그들을 실제로 본 적이 전혀 없는 독자들에게마저 연모의 감정을 품게 만들 정도로 섬세하고 유려하다.

[사진3] 오늘날의 <지젤> 공연

 고띠에의 비평이 결여하고 있던 관점들도 엿보인다. 먼저, 무용수의 외모에 대한 묘사를 제외하면 안무나 기교적 측면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추측컨대 안무와 발레 기교에 대한 그의 지식은 무용수들과의 개인적 친분이나 제작 과정에서 크레딧을 얻은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일례로, <지젤>의 안무를 맡았던 꼬라이(Jean Coralli)와 뻬로(Jules Perrot)에 대해 고띠에의 비평은 지나가듯 언급하는 데 그쳤다. 미술 학도였던 고띠에는 무용을 화가적 시선으로 조망할 수 있는 미감을 가졌으나, 그 대상은 무용수의 신체, 동작과 의상 정도에 한정되어 있었고, 그 외의 무대 장치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하지 않았다. 또한 고띠에는 발레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음악에 대해서 제대로 된 이해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는데, 그러한 와중에도 그는 오페라의 평까지도 그럴듯 하게 써낼 정도의 능술(能術)이 있었다.

 무용비평의 시조로서 고띠에는 무용을 여타 극장예술의 일부가 아닌 온전한 예술로서 받아들이며, 글로써 당시의 무용에 대해 뛰어난 시적 언어로 증언해주고 있다. 고띠에의 무용비평은 기본적으로 미적 이상을 위해 창조된 환영으로서의 무용을 전제로 한다. 그의 비평은 오늘날의 분석적/심층적 비평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고띠에는 예술적 이상을 담아낼 수 있는 고유한 예술 영역으로서의 무용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당시 무용(낭만발레)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비평가로서 제시했던 무용비평의 선구자임에 틀림 없다.


글_ 기자 심온(서울대 미학 석사과정)

참고자료_
「서양무용사상사」, Walter Sorell, 신길수 역, 예전사, 1998
「서양 무용비평의 역사」, 심정민, 삼신각, 2001

사진출처:
사진 1_
http://www.quotationof.com/bio/theophile-gautier.html
사진 2_
http://www.thefashionhistorian.com/2011/11/return-of-house-of-worth-and-19th.html 
사진 3_
http://www.balletandopera.com/photos_info/perfomance/giselle-mus/big/1454325298.422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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