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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llection


2018년 11월
2018.12.08
황해도탈춤, 해주검무, 배뱅이굿의 명인 양소운(1924-2008)

양소운(梁蘇云)은 봉산탈춤과 강령탈춤 등 황해도 탈춤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로 한국 탈춤의 맥을 이은 대표적 인물이다.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해주에 거주하며 장양선에게 탈춤, 검무 살풀이춤, 즉흥무, 한량무, 팔선녀춤, 성인인상무, 가인전목단, 포구락, 무고 등을 익히며 예인으로 입문한다. 여기서 성인인상무는 승무의 일종으로 처음에는 영상도드리로 시작하여 염불을 외고 이어 자진도드리, 둑으로 이어지고 굿거리장단에 바라춤을 추며 빠른 타령에서 느린 타령 순으로 넘어가며 맺음을 하는 춤의 형태였다.(국립문화재연구소, 『입춤․한량무․검무 』, 국립문화재연구소, 1995) 이와 함께 그는 이 시기 탈춤도 과장별로 각기 다른 배역의 춤을 익히는 등 교방춤, 민속춤 등 다양한 춤을 몸으로 체득하는 시기였다.



[사진 1] 경향신문 1970. 5. 22


  게다가 소리도 이 시기 익히게 되는데, 김진명에게 서도잡가를 양희천에게는 소리, 문창규에게는 배뱅이굿과 유정철에게는 가야금 등을 배우며 진정한 예인으로 거듭난다. 그렇지만 결혼과 함께 잠시 활동을 접었다가 해방이후 피리 명인 박동신과 교습소를 차리고 춤과 소리를 가르치면서 전통 예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 이후 1956년 인천에 정착하여 해주검무, 승무, 살풀이춤, 성인인상무와 봉산, 강령, 은율 등 황해도 탈춤과 소리를 전수하는데 특히 봉산탈춤을 하던 인물들이 모여 탈춤 복원에 힘을 쏟았고, 1967년에는 김진옥, 이근성, 민천식과 함께 봉산탈춤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봉산탈춤은 이듬해 김기수 연출로 드라마센터에서 공연이 이루어지며 전승뿐만 아니라 무대공연예술로 대중과 소통이 이루어지며 민족문화의 정수로 거듭 발전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서울대가면극연구회를 비롯한 여러 대학의 탈춤반에서 강습을 하여 대학가 탈춤문화운동의 물꼬로 작용하였다. 이어 1971년에는 강령탈춤으로 중요무형문화재 34호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은율탈춤의 복원에도 앞장서며 황해도 탈춤의 상징적 존재로 자리하였다. 



[사진 2] 동아일보 1970. 5. 6


  양소운은 탈춤 복원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황해도 전통문화의 복원에도 힘을 쏟는데 해주검주의 재현도 그러한 모습이다. 그는 일가들과 함께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해주검무로 참가하여 1990년에는 우수상인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받기도 하였고, 명무전에서 해주검무를 추는 등 이 춤의 집대성에 앞장을 섰다. 해주검무의 장단은 타령장단-잦은타령-느린타령으로 이어지고 연풍대 동작에서는 자진타령과 조화를 이루는데 대륙적인 기질이 엿보이는 춤사위가 많으며 무겁고 활달하며 마지막 자진타령에서는 더욱 활달한 움직임으로 힘차게 마무리하는 특징을 지닌다.(국립문화재연구소, 『입춤․한량무․검무 』, 국립문화재연구소, 1995)


  또한 그는 배뱅이굿에서도 탁월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배뱅이굿은 재담과 서도민요조가 어우러진 소리 극 형식으로 배뱅이의 부모가 죽은 딸의 혼을 달래기 위해 박수무당에 의탁하나 그 엉터리 무당은 거짓으로 넋을 달래고 재물을 얻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중에게는 이은관을 통해 많이 알려졌지만 양소운도 황해도 소리를 바탕으로 익혔고, 1991년에는 완창무대를 선보이고, 음반으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렇게 양소운은 맥이 끊길 수 있었던 황해도 탈춤을 남한에서 재생시켰고,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민족문화원형으로 탈춤이 주목받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또한 그는 해주검무의 복원에 힘쓰며 검무의 계통적,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데 앞장 서는 등 한국전통문화의 정체성과 원형을 살필 수 있는 상징적 인물로 기억할 수 있다.      




                              글_ 김호연(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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