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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_ Re-collection


2017년 3월
2017.04.10
무용을 향한 낮은 자리에서의 열정, 김민자(金敏子, 1914-2012)

 무용가 김민자(金敏子, 1914-2012)는 1914년 경성에서 유복한 가정의 셋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후 경성여자보통학교를 다녔던 신여성이자 엘리트이다. 본명은 우경(又璟)이며 민자는 예명이라고 하는데, 와카구사 도시코[若草敏子]라는 일본식 예명도 있었다. 근대 무용가로서 김민자의 이름과 존재는 식민지 조선에서 최고의 무용 스타였던 최승희에게 가려진 그림자처럼 오랫동안 어둡고 희미한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김민자는 최승희의 첫 번째 제자이기는 하였으나, 그 특별했던 계보를 이어서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꽃피우지 못했던 미완의 무용가였기 때문이다. 14살에 무용에 입문한 것으로 알려진 김민자는 최승희가 연구소를 열던 시기를 전후하여 최승희에게 사사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김민자는 표면적으로는 ‘최승희의 제1호 제자’였지만, 무용 레슨비와 생활비 등을 충당하기 위해 최승희의 딸을 돌보는 보모이자 가사를 챙기는 비서의 역할을 무려 9년 동안이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이전의 활동을 보면, 김민자는 언제나 최승희의 뒤편에 가리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용을 향한 김민자의 열정과 재능은 결코 지워진 적이 없었다. 최승희의 딸을 키우고 가사 도우미를 자처하면서 틈틈이 무용을 익힌 김민자는 최승희가 장기 해외공연 중이던 1938-40년 사이에 특히 공연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개인 발표회까지 가졌다. 이때 그녀는 최승희와 조택원의 무용 파트너로 무대에 서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민자는 최승희를 따라 일본에까지 동행하기도 하였고, 1940년대에는 전선 위문공연을 함께 하였다. 이후에는 조선악극단에서 무용 안무를 하기도 하였다. 김민자가 최승희를 따라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에 들어갔을 때는 수업료를 내지 못해 정식 수업을 받지는 못했으며, 다른 연습생들이 배우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거나 보조하는 식으로 공부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지만 그녀는 조선 전통춤과 서양 발레를 넘어 재즈댄스까지 어깨 너머로 두루 섭렵하였다.


 김민자는 27세가 되던 1940년 9월 도쿄 군인회관에서 ‘김민자 무용 발표회’라는 무용 공연을 가졌다. 첫 번째 개인 공연이었던 이 발표회에서 그녀는 안무와 출연을 모두 맡았다. 이때 공연된 작품으로는 <나물 캐는 처녀>, <코리안 듀엣>, <초가삼간>, <성모의 명상>, <무지개> 등 모두 16개의 작품이라고 한다. 김민자는 1983년의 회고록을 통해 <봄처녀>를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았으며, 1966년 무용협회에서 공로상을 받았을 당시 ‘주리(朱莉)’라는 제자에게 이 작품을 전승했다고 밝혔다. <봄처녀>는 안무, 의상, 음악이 아주 정확하게 보존되지는 않았지만, ‘프롤로그-전개-에필로그’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처녀가 따뜻한 봄날의 정취를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으로 풀어내는 춤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2006년과 2007년 무용가 박지혜에 의해 현대적으로 각색되어 새롭게 재현되기도 하였다.

 김민자는 1942년 일본 동북제대(東北帝大) 출신의 동갑내기 김태철(金泰喆)과 결혼하였지만, 이후 검사가 되었던 남편은 한국전쟁 당시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이후 1961년에 창단된 예그린 악단에서 무용 안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무용계를 은퇴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40여 년을 보냈다. 김민자가 일본에서 최승희를 따라 순회공연을 할 때, 2천 와트짜리 조명에 그만 각막이 데었다고 한다. 그 후유증으로 말년에도 오른쪽 눈은 아예 보이지 않았고, 왼쪽 눈도 시력이 약해져서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90세이던 2007년에도 김민자는 여전히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매일 FM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무대 위에서 춤추던 시절을 일생 중에서 가장 생생했던 활력의 시간으로 회상하고 있었다.


글_ 이진아(문화연구자) 사회학 박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객원연구원


사진 출처_
사진1_ <봄처녀>의 김민자(박지혜 논문 37쪽).
사진2_ <조선풍의 듀엣> 왼쪽이 김민자, 오른쪽이 최승희(http://blog.joins.com/media) 
원래는 두 개 모두 연낙재 제공 자료.

참고문헌_
김경애·김채현·이종호, 2001, 『우리 무용 100년』, 현암사.
박지혜, 2008, 「신무용가 김민자 연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사학위논문. 
성기숙, 2014, 「김민자의 삶과 예술세계」, 『한국무용연구』 제32권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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