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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_ 안무 리서치 견문록


2017년 6월
2017.06.30
안무가 박순호와의 만남 - 직업으로서의 안무가 1
 본 연재에서 소개하는 다섯 번째 안무가는 박순호 브레시트무용단(Bereishit Dance Company) 대표입니다. 이번 인터뷰에서 필자는 스스로의 한계와 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일천했던 공부가 비로소 바닥을 드러냈달까요.

 짝패를 이루는 문, 답 대신에 곳곳에서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맞닥뜨렸는데, 그건 아무리 봐도 필자의 질문이 모호했던 데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전 호와는 다른 어미를 쓰고 있는 연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가지고, 안무의 과정에 대해 (나름대로는 골똘히) 사유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는데, 그의 에세이로부터 전염된 말투라 할 수 있습니다. 엉뚱하다 하시겠지요. 안무 리서치를 논하며, 무라카미 하루키라니! 일본문학을 잘 알지 못하는데도,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떠올린 책이 왜 하필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소설은 예술 장르 중에서도 언어를 도구로 삼고, 무용은 언어로부터 거의 자유롭다는 점에서 지극히 상반되는데도 말입니다. 장르를 막론하고 작품 생산 행위는 일련의 보편성을 띕니다. 장르에 따른 특수성보다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제작’의 관점에서 봤을 때, 보편성을 더 많이 가진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안무는 미술, 영화, 건축 등 여느 장르의 창작 과정에 빗댈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에게 ‘창작 일반’의 전형을 가장 잘 함축한 일러스트레이션을 찾으라 한다면 바로 이 책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현역 안무가와 나눈 대화 내용, 그리고 이 책 사이를 오가며 보낸 시간이 실로 나에게는 ‘안무 리서치 견문’을 넓히는 중이었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안무가들과 좀 더 풍성한 대화를 나누기 위한 나의 이해의 폭을 정비한 계기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그다지 유의미하게 남지 않았다 생각되는 질문들은 여러분들이 읽도록 하기 겸연쩍어 적당히 건너뛰고요. 여기에 한 분을 더 끌어들일 참입니다. 여러분께서 상상력을 적극 보태어 박순호 안무가와 나, 그리고 (가상의) 하루키 선생 셋이 둘러앉아 나누는 이야기로 읽어 주셔도 좋겠습니다.

 그럼…


 필자는 몇 해 전 브레시트무용단의 작품 <人_조화와 불균형>을 관람하고 유도나 레슬링 경기를 보는듯한 인상을 받아 매우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돌아보면, 현대무용에 관해서라면 지금처럼 익숙하지도 않았을 때인데, 그 무대는 마치 푼크툼(punctum)을 발하는 한 장의 사진처럼 어떤 이미지가 돌출하여 나를 잡아당기는 듯했거든요. 스포츠 경기로부터 받는 종류의 역동성과 흥분을 느끼는데도,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예술적 감촉을 함께 느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유명 리듬체조 선수가 추는 발레 <돈키호테>의 한 씬을 보았지요. 훌륭하게 포인(pointe)이 된 날렵하고 아름다운 다리로 추는 그것에는 유연함도, 박력도 있었지만, 춤다운 선과 맛이 보이질 않았어요. 그래서 확실히 스포츠는 스포츠이고, 춤은 춤이구나, 서로 분명히 다른 영역이구나, 하였었지요.

 그런데 브레시트의 작품에서는 춤과 스포츠의 묘한 일체감을 느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 제작, 안무의 과정이 있었기에 한 사람의 관객인 나에게 독특한 질감과 개성으로 다가왔던 것일지를 안무가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무용 작품은 창작자의 의도에서 나오는 몸짓의 기록이라고. 가령, 15분짜리 작품이라면, 작품이 시작되는 00:00에서부터 출발해 15:00에 이르기 위한 몸짓의 기록. 우리 무용단은 연습기간을 꽤 오래 둬요. 그리고 동작의 반복을 굉장히 많이 하고요. 그러나 그 연습이 기량 달성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연습을 반복함으로 인해서 무용수들 나름대로 상실감, 자괴감, 성취감이 들 수 있고 상대방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할 텐데, 저는 그러는 동안 개인의 자아가 성장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지금 그러면서 배우고 있고요, 계속해서.”


 나는 그런 쪽의 작업에 관해서는 상당히 인내심 강한 성격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때로는 지긋지긋하고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가오는 날들을 하루 또 하루, 마치 기와 직인이 기와를 쌓아가듯이 참을성 있게 꼼꼼히 쌓아가는 것에 의해 이윽고 어느 시점에 '그래, 뭐니 뭐니 해도 나는 작가야'라는 실감을 손에 쥘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실감을 '좋은 것' '축하할 것'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 그렇게 묵묵히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뭔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일어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립니다. 당신은 그것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만 합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p. 179-180


 “저희가 또 워낙 레퍼토리 중심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까, 기존의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차이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저는 무술도 똑같다고 생각을 하는데… 단지 기량의 습득 자체보다는 그 과정 안에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자꾸 발견하는 게 중요하단 거지요. 그런 게 드러났던 게 아닐는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 의식이 차이를 만들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사진 1, 2] <人_조화와 불균형>

 한때는 안무 리서치가 움직임 개발로 소급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물론 얄팍한 이해였지요. 움직임을 개발하는 것만이 중요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미 무수히 반복해 온, 어찌 보면 진부한 동작일지라도 그걸 어떤 새로운 맥락 안에서 제시할지, 혹은 사회적 문화적 맥락과는 어떻게 교차시킬지, 혹은 어떤 무대 양식 속에서 펼쳐낼지를 연구하는 게 오히려 안무 리서치의 본질에 가깝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언젠가부터 가지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연출이고, 어디까지가 안무인지 다소 불분명해지는 구석은 있습니다. 그래도 이것만큼은 안무자 고유의 리서치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지를, 이어서 물었지요.

 “안무 리서치라는 것이 사실 너무 광범위해요. 왜냐하면 한 작품을 만들 때 필요한 과정은 단지 움직임 개발 뿐 아니라, 작품의 주제 선정, 이미지 조합, 또 작품 바깥으로 나와서 이 작품이 어떤 성격을 갖고 관객에게 비춰질지 예측해 보는 일까지 포함하기 때문이지요. 똑같은 주제라고 하더라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작품이 너무 달라지잖아요. 움직임 개발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어떤 안무에 있어서는 움직임이 중요하지 않을 때도 있지요. 추상적인 얘기로 들리시겠지만, 안무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아요. 말씀 드린 모든 과정이 서로 맞물려 있어요. 그러니 질문에 대한 답을… 좀 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결과물로 가는 과정을 전부 리서치라고 해도 무방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안무가들이 과연 리서치에 열심히 임하고 있나요?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저는 개인적으로 안무의 전 과정을 제 자신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 가는 편입니다. 다른 장르의 전문가들과 협업을 한다고 해도, 무용 작품을 위해, 무용이 주체가 되어 모인 사람들이라면 안무자가 리드하는 것이 맞을 거예요. 단, 서로 다른 영역의 다른 관점을 교환하면서 말이지요.

 좀 더 일반적인 상황을 제 경험에 비추어 얘기하자면요. 제가 지금 40대에 와서 다시 사춘기를 앓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더 젊었을 때 겪었던 한국 무용계의 상황과 연관돼 있어요. 한국 무용계가 너무 기법 중심이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철학이나 미학 면에서 고루 성장하지 못한 것이지요. 무용가 자신의 경험적 지식이 커지고 생각이 깊어질수록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것을 담아낼 그릇의 크기가 돼야 하는데, 본바탕이 작으니까 드라마트루그라든지 타자에 대한 의존도가 생길 테지요. 자신의 생각인지, 남의 생각인지 모르고, 어느 순간 남의 생각이 자기 생각인 것처럼 돼 버리기도 하고. 그런 특수한 한국적 상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요. 워낙 기술적인 것 위주로 가르치기 때문에 ‘안무과’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작가로서의 경험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고요. 작품 스타일이 다양하지 않고 움직임 위주로 만들어지고요. 그런 것들은 저에게도 역시 30대 때의 고민이었지요. 나의 움직임에 붙박혀 있지 않고 영역을 넓혀야 하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내 몸 안에는 뼛속 깊이 배어 있는 것들이 많으니까요. 그걸 버리고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지요. 한국의 현실이 아직 그렇다는 것은 분명해요. 안무가들이 그걸 의식해야 하지요. 또, 공론화해야 되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일 겁니다.”


 실제로 나는 지금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그런 사람들을 봐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주 눈에 띄게 참신해서 '와아' 하고 감탄하지만 어느샌가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 아마 지속력이나 자기 혁신력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얘기겠지요. 그 스타일의 질을 논하기 이전에 어느 정도 몸집을 가진 실제 사례를 남기지 않고서는 ‘검증 대상에 오르지도 못하게’ 됩니다. 여러 개의 샘플을 펼쳐놓고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지 않고서는 그 표현자의 오리지낼리티가 입체적으로 떠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p. 99



 우리말에서 한 작가의 모든 작품들 일체를 집합적으로 이르는 ‘전작(全作)’이라는 단어가 얼만큼 파워풀하게 들리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를 뜻하는 프랑스어 단어인 ‘외브르(œuvre)’를 먼저 배웠습니다. 그 뜻을 사전에서 찾다가 전작(全作)이라는 말을 접했거든요. 영어로 된 기사에서도 ‘어브어(oeuvre)’를 심심찮게 봅니다. 실제 논의에 숱하게 등장하는 어휘인 것이지요. 한 작가가 그의 모든 작품을 관통한다 할 만한 확고한 세계를 가지고 있느냐, 단지 공전의 히트작 한 두 개로 반짝 유명했느냐 하는 차이를 그들은 좀 더 분명하게 대하는 것 같습니다.

 기법 중심의 교육이나 안무만을 가지고 과연 작품 생명의 지속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꾸준한 시간에 걸쳐 철학, 미학을 차곡차곡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을 가지지 못한 작가라면 몸집을 가진 사례를 남기고, 그걸 오리지낼리티로 승화시키기는 무척 어려울 것 같네요.

 아무튼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다른 장르와의 협업을 추구하는 편인가, 무용으로만 승부하려는가, 하는 물음으로요.

 “그 둘이 공존하는데요. 타인의 관점을 배우고 경험하려 하는 점, 그리고 무용단의 대표로서 단원들이 자꾸 새로운 것에 노출되어 자극 받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다른 장르와의 협업을 추구해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제 자신을 가만히 보니까 결국은 춤의 비중이 절대적인 작품을 하고 있더라구요. 그게 사실은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 우리 무용단이 해외 공연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많은 소품과 세트를 짊어지고 다닐 수 없거든요. 부끄럽고 안타까운 얘기이지만, 솔직히 안무할 때에 그런 점들도 계산에 넣어야 해요. 그래서 작업에 제약을 받기도 하구요. 결국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직접 몸을 움직여야 하는 리서치에 많은 시간을 들이고, 단원들과 같이 체험하고, 몸 안에 경험을 쌓는 쪽으로 치중하는 것 같아요.”

 이쯤 되니, 자연히 구체적인 안무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봐야 했지요. 선곡 후 안무 작업을 한다든지, 그런 것이요. 뭐, 늘 일정한 것은 아닐지라도요.

 “이때까지 작업해 온 것들을 돌이켜 보면 음악 작업은 항상 맨 마지막에 이루어졌어요. 왜냐하면 음악에는 그 나름대로의 무드와 완성도가 있거든요. 오래 전부터 이미, 자칫 음악이 먼저 가고 춤이 그걸 쫓아가는 형국이 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어요. 음악을 듣고 작품을 짜다 보면 음악이 나에게 입혀진다기보다는 내가 음악 안에 입혀지는 것 같아서 그걸 피하려 했어요. 음악에 대한 고민을 늘 제일 마지막에 하는 편인데, 그렇기 때문에 시간에 쫓기다 보면 완성도가 떨어지기도 해요. 부자연스러워지기도 하고…

 그럴수록 저희는 직접 몸으로 하는 경험을 더 많이 하려고 합니다. 제가 만든 작품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레퍼토리로 남은 작품도 많지 않고… 그렇지만 확신하는 것은, 춤을 직업으로 가졌을 때의 장점이라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경험할 기회와 동기를 부여 받는다는 거예요. 작품 주제가 바둑이었을 때는 매일 바둑을 두었고요, 유도였을 때는 유도 선생님을 모셔다가 단원들과 워크숍을 가졌지요. <활>이라는 작품의 경우, 궁장님을 찾아가서 활 만드는 과정을 보고, 활을 쏘고, 궁장님이랑 대화도 많이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그래도 부족하지요. 그 시간이 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 나머지는 책을 읽는 것이지요. 어쩔 수가 없어요. 무용수들한테 책도 사 주고, 박물관도 가고, 좋은 글귀가 있으면 그걸 가지고 무용수들과 얘기도 해 보고요. 물론 그게 부끄러울 때도 있는데, 어차피 우리한테 춤이 그냥 삶이고 그 안에서 재미를 찾아야 하잖아요.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 제일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경험하는 것이지요.”


 특히 젊은 시절에는 한 권이라도 더 많은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뛰어난 소설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소설도, 혹은 별 볼일 없는 소설도 (전혀) 괜찮아요, 아무튼 닥치는 대로 읽을 것. 조금이라도 많은 이야기에 내 몸을 통과시킬 것. 수많은 뛰어난 문장을 만날 것. 때로는 뛰어나지 않은 문장을 만날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작업입니다. 소설가에게 없어서는 안 될 기초 체력입니다. 아직 눈이 건강하고 시간이 남아도는 동안에 이 작업을 똑똑히 해둡니다. 실제로 문장을 써보는 것도 분명 중요하지만, 순위로 보자면 그건 좀 나중에라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p. 119


 “그런 활동들을 같이 하자. 거기서 즐거움을 찾자. 했지요. 부족한 점들을 작업 과정에서 메워가며 결과물로 향하는 것이지요. <활>은 정신수련에 대한 작품인데 활을 그렇게 오래 쏴 보지 않으면 그 깊이를 모르지요. 표면적인 것만 알 테니까요. 이 작품에서 되게 좋았던 것은 남성 듀엣이 활 춤을 춘다는 것인데, 솔직히 무용수들은 그런 작품을 좋아하지 않아요. 겉보기에는 화려하지 않은데, 정작 활을 매개로 끊어짐 없이 에너지를 교감한다는 것… 몸끼리 바로 교감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오브제를 사이에 두고 계속 그렇게 하다가는 굉장히 신경이 날카로워지거든요. 그 날의 컨디션에 따라 상대방으로부터 전달되는 에너지도 날마다 다른 거예요. 그래서 그 친구들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었어요.

 저희가 활을 백만 번 쏴 보지는 못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하는 것도 결국은 똑같은 것이라 생각했어요. 끊임없는, 반복적인 연습은 고역이거든요. 그래서 상대방을 때로는 좀 이해하기도 하고, 상대방과 싸우기도 하고, 그러면서 다시 자기를 돌아보기도 하고. 그런 경험이 재미있어요. 작품에서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지만요. 그건 진짜, 관객들이 모르는 부분이지요. 안무 과정에서만 아는 거고, 무용수들과 저와의 말하지 않는 커뮤니케이션인 것이지요.”


 소설가의 기본은 이야기를 하는 것tell a story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의식의 하부에 스스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속 어두운 밑바닥으로 하강한다는 것입니다. 큼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작가는 좀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큼직한 빌딩을 지으려면 기초가 되는 지하 부분도 깊숙이 파 들어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치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그 지하의 어둠은 더욱더 무겁고 두툼해집니다.
 작가는 그 지하의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즉 소설에 필요한 양분―을 찾아내 손에 들고 의식의 상부 영역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형태와 의미를 가진 문장으로 전환해나갑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p. 188-189


 
 
[사진 3, 4] <활>

 이야기는 무용수와 무대의 완성도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무용수에게서 가장 좋은 춤을 보는 때는요, 감정과 이성이 배제되고 감각만 있는 때예요. 예를 들어서 처음 보셨던 <人_조화와 불균형>, 레페토리니까 정말 많이 연습하죠. 너무 많이 연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멘탈적인 것이 작용을 안 할 때가 있어요. 아무 감정과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하는 것이지요. ‘잘 해야 되겠다’ ‘여기는 연습이 잘 안 됐는데 어떡하지’ 등의 생각이 떠나고 오로지 감각만 남아 있을 때. 자, 들어오니까 피해야 되고, 가야 되고, 에너지를 뿜어야 되고…

 그래야 어느 한 부분, 혹은 어느 특정 솔로가 좋거나 부족한 것을 떠나서 공연이 전체적으로 조화롭고 안정적인 상태, 그렇지만 그 안에 에너지의 굴곡이 고스란히 각 씬의 특성을 반영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 소설 쓰기에 의식이 집중하기 시작하면 어디의 어떤 서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머릿속에 서랍의 이미지가 자동적으로 떠올라 한순간에 무의식적으로 그 소재를 찾아냅니다. 평소에는 잊고 있었던 기억이 저절로 술술 되살아납니다. 머리가 그런 융통무애(融通無碍)의 상태가 되면 그건 상당히 기분 좋은 일입니다. 말을 바꾸면, 상상력이 내 의지를 벗어나 입체적으로 자유자재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p. 126


 하기야, 또 다른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 또한 그의 산문집 『소설가의 각오』에서 “가벼운 노이로제 상태에 빠져 있을 때에 볼티지voltage가 높아져 글이 쓱쓱 써진다”고도 했지요. 고도의 몰입이란 게 바로 그런 힘이라고 하니, 한 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융통무애의 춤!


(계속)


글_김보슬(자유기고가, 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학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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