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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Page


2020년 5월
2020.05.31
무용계 성폭력, 더 이상 가해자를 위한 무대는 없다


  블랙페이지에서는 전 사회적으로 미투 운동이 한참 전개되고 있던 2018년 4월, 무용계 내 성폭력 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설문을 실시한 바 있다. 그러나 “무용계 민주주의는 무용실 문 앞에서 멈춘다”라는 격언 아닌 격언처럼, 무용계를 지배하고 있는 무형의 권력 앞에서 무용인들은 선뜻 자신의 피해를 드러내지 못하고 깊은 침묵을 지켰다. 미투 운동이 분야를 가리지 않는 고발로 번져가는 동안 고발이 터져나오는 분야가 오히려 생태계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진단도 나왔는데, 무용계의 침묵은 이러한 건강성에 대한 반증이었던 셈이다.


  무용계 성폭력에 대한 고발은 2018년 2월, 창원대와 가천대 무용과 학생들이 교내 성폭력을 고발하면서 시작됐다. 4월에는 한예종 전통예술원 학생들의 고발이 뒤따랐다. 하지만 이 사건들은 학교 내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을 뿐 무용계 내의 성폭력 사건으로 의미가 부여되지는 않았다. 무용계의 침묵을 계속 유지되었다. (연극인 이윤택에 대한 성폭력 고발이 일어나면서 함께 고발된 국가무형문화재 하용부의 성폭력 사건에 대해 무용계 일각에서 “이 사건을 무용계 사건으로 봐야 하나”라는 질문이 나온 것은 이 침묵을 이해하는 좋은 힌트가 된다.)


  강고하던 무용계 침묵이 깨진 것은 지난해 6월 현대무용가 류 모씨의 성폭력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다. 류 씨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현대무용단을 통해 활발한 공연활동을 하던 현장 무용인이었고 피해자는 그가 출강하던 대학의 학생이었다.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에서는 최초로 무용계 성폭력을 반대하고 재발 방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피해자를 위한 법정 연대활동을 시작했다. 가해자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위치에서 학생 대상의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것은 앞선 사건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가 현역 무용가라는 점이 무용인들을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무용가, 기획자, 평론가 등 무용 현장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연대체인 오롯과 젊은 여성 무용가들의 모임인 페미플로어 외에 대부분 대학 교수진으로 구성된 무용계 각종 협회는 여전히 아무런 입장 표명 없이 침묵을 지켰다.


  블랙페이지에서는 이 사건을 예의주시하며 연대활동에 동참하는 동시에 미진한 응답률로 결과를 발표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한 2018년 무용계 성폭력 실태 조사를 다시 진행했다. 지난해 11월 설문을 재개시해 올해 5월 종료로 기간을 늘려 진행한 조사의 최종 응답 수는 125건, 2018년 진행한 설문의 응답 양식을 종료하지 않고 설문 내용의 변형 없이 설문을 진행했으니 사실상 3년간의 응답이 취합된 결과다. 그럼에도 백 건 겨우 넘는 응답 수는 역설적으로 이 설문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질문들인지 확인시켜주는 결과이며, 2017년 진행한 노동 착취 관련 설문보다는 응답 수가 늘어 무용계 부조리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고발하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는 결과이기도 하다.



성폭력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난다


  응답자의 56%가 무용 전공자로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리고 졸업해 무용 관련 일을 하는 동안 성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는데, 그중 성적인 농담이나 외모에 대한 성적인 비유나 평가, 신체 부위를 비하하는 표현 등 언어에 의한 성폭력이 61.4%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피해자에게 키스를 하거나 특정 신체 부위를 만지는 등의 성추행도 24.3%에 달했다. 강간을 당했거나 강간을 시도했지만 미수에 그친 경우도 8.6%나 되었다.


  성폭력 가해자의 성별은 남성이 95.2%로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했고, 피해자의 성별은 91%가 여성이었다. 가해자를 남성과 여성 모두라고 응답한 비율이 3.6%, 피해자가 남성과 여성 모두라고 응답한 비율이 4.5%로 나왔으나 남성에게 성폭력을 당한 남성 피해자나 반대로 여성에게 성폭력을 당한 여성 피해자와 같이 동성 간 성폭력에 대해서는 독립된 결과값을 얻지 못했다.


  성폭력을 당한 시기를 살펴보면 피해자는 미성년자 시절부터 성폭력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초중고 시절 성폭력을 당했다는 응답이 24.6%를 차지했고, 무용과 재학 시절이라는 응답이 47.4%로 가장 높은 응답을 보여 무용을 전공하는 학생 시절 성폭력이 집중됨을 확인시켜주었다. 무용수로 활동하며 피해를 당했다는 응답도 21.8%로 나타나 학교를 떠난다고 해서 성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무용 강사로 학교에 출강하면서 성폭력을 당했다는 응답(2.8%)도 있었고, 무용을 전공하기 시작한 뒤로 성폭력이 없었던 시기가 없다는 응답(2.1%)도 나와 설문에 시기를 구분해놓은 것이 무색해지기도 했다.




[그림1] 피해자가 성폭력을 당한 시기는 언제였나


  피해자가 성폭력을 가장 많이 당하는 시기가 대학 무용과 시절이라는 응답에 상응하듯 성폭력 가해자는 그와 관련된 인물들이 매우 높은 응답률을 나타냈다. 교수 또는 강사진이라는 응답이 25.4%를, 학교 선배라는 응답이 22.8%를 차지해 전체 응답의 절반에 육박했다. 학원 강사가 가해자라는 응답이 18.1%를 차지해 10대 청소년들의 성폭력 피해가 주로 어디서 발생하는지도 조심스럽게나마 예측할 수 있었다. 예술감독이나 안무가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응답이 19.2%를 차지했고, 그 외에 동료 무용수(8.8%), 평론가(3.4%), 극장장 또는 기관장(1.6%) 등의 응답이 나와 가해자들이 학교와 공연 현장을 가리지 않고 무용과 관련된 곳곳에 포진해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림2] 성폭력 가해자는 누구였나


  성폭력은 무용인이 가는 거의 모든 곳에서 발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특정 장소에 한정되지 않고 온갖 장소에서 일어났다. 학교 강의실, 연습실, 탈의실, 대학 내 학생 식당, 무용학원, 극장 사무실, 강사의 자택, 자동차 내부, 식당, 술집, 클럽, 노래방, 화장실, 모텔 등 무용과 관련 있는 곳 관련 없는 곳 상관없이 모든 곳이 범행 장소가 되었다.



언어폭력, 아웃팅, 그루밍 성폭력, 강간… 일어나지 않는 성폭력은 없다


  성폭력의 양상도 매우 다양했다. 특히 언어폭력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외모 평가는 가슴이 작다거나, 반대로 가슴이 커서 무거워 보이니 살을 빼라는 식의 모멸감을 주는 언사로 이어졌고 가슴이나 엉덩이 등 특정 신체 부위를 지칭해 예쁘다고 말하며 ‘시선강간’을 자행하기도 했다. 옷차림에 대해 “치마가 너무 짧다”라거나, “누굴 보여주려고 그러고 다니냐”라며 핀잔을 주거나 “접대부 같다”라는 혐오 발언이 뒤따르기도 했다. 여성 무용수에게 가슴 운동을 하라면서 “그래야 나중에 남편한테 사랑 받는다”라고 말하거나, 남성 무용수와 함께 투어공연이 예정된 여성 무용수에게 “임신해서 무용을 그만두는 것 아니냐”라며 불쾌감을 주기도 했다. 언어폭력은 “얘 게이야!” 같은 성소수자에 대한 아웃팅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언어폭력의 주체는 주로 남성 무용인이었지만 여성 무용인이라고 폭력적인 언사를 구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여성 무용수를 상대로 “무대에서의 매력과 남자들이 좋아하는 매력은 같은 거야”라며 남성의 시선에 맞춰진 여성상을 주문하기도 했고, 리프트에서 실수를 한 남성 무용수를 향해 “그렇게 비실비실해서 밤일은 제대로 하겠냐” 같은 성적 폭언을 내뱉기도 했다. 여성 무용수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거나 지도를 빙자해 남성 무용수의 몸을 더듬으며 성추행을 하기도 했다.


  실기 수업이나 공연 연습 현장에서 일어나는 성추행은 매우 교묘한 수법으로 이뤄졌다. 연습에서 동작을 수행하며 신체 간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가슴이나 엉덩이 등 특정 부위를 빨리 터치하거나, 바닥에 엎드리는 동작을 하거나 엉덩이의 방향이 파트너를 향해 있을 때 유사 성행위를 하는 등의 추행은 특히 빈번했다. 안무가가 불필요한 탈의를 강요하거나 접촉즉흥을 통해 동작을 개발하며 유사 성행위를 지시하기도 했다. 여성 안무가가 남성 스태프들 앞에서 남녀 무용수들에게 무용복 내의(언더)만 입은 채 연습을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무용과 교수나 강사, 학원 강사에 의한 그루밍 성폭력이나 데이트폭력의 양태를 띠는 경우도 있었다. 대학 강사가 수업 중에 학생에게 “오늘 내 애인은 너”라고 말하고 수업이 끝난 뒤 개인적인 만남을 요구하는가 하면 따로 개인레슨을 제안하거나 콩쿠르용 작품을 안무해주거나 공연 리허설 지도가 끝난 뒤 단둘이 있는 시간을 만들어 추행을 하기도 했다.


  술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다” 또는 “우리는 한 가족이다”라는 말로 친근한 분위기를 만든 뒤 추행을 하거나 술자리가 파한 뒤 데려다주겠다며 모텔로 이끄는 경우도 있었다. 무용학원을 운영하는 남성 원장이 재수 중이던 수강생에게 학원비를 면제해주고 대학 진학에 도움을 주는 대가로 성상납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요구는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지속되었다.


  공연이 끝나고 난 뒤의 회식 자리는 성폭력이 자주 일어나는 현장이었다. 술에 취한 척하고 키스 등 신체 접촉을 시도하거나, 술을 주량 이상으로 권해 의식을 잃은 상태로 모텔로 데려가 강간을 하기도 했다. 남성 강사가 남학생들을 집합시켜 성매매업소에 데리고 가거나, 여학생들을 술자리에 불러 술을 마신 뒤 자취하는 여학생 집에서 자는가 하면,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를 하는 여자 신입생의 집에 남자 선배들이 돌아가며 방문해 자고 가는 일도 있었다. 교수가 평론가나 협회 관련자 등 중년남성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자리에 여학생들을 동원해 시중을 들게 하기도 했다.


  성폭력의 인지에 있어서도 피해자와 가해자는 차이를 보였다. 피해자는 성폭력임을 분명히 인지했지만 가해자는 성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경우가 42.9%로 가장 높은 응답을 보였고,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성폭력임을 인지한 경우도 23.8%에 달했다.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성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한 경우는 19%였다. 성폭력 현장에 제3자가 있었지만 성폭력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고도 모르는 척했다는 응답도 35%나 됐다.


  성폭력을 당한 뒤 동일한 가해자로부터 추가 피해를 입었다는 응답은 31.8%였고, 성폭력 피해가 상습적이었다는 응답이 22.7%, 성폭력을 당하고 난 뒤 가해자와 그 주변인들에게 2차 가해를 당했다는 응답은 12.6%였다. 성폭력 사건의 대처에서 피해를 당하고 나서 아무런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응답이 81.3%를 차지했다. 피해자의 무력감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주변에 피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는 응답이 9.6%, 가해자에게 성폭력을 인지시키고 사과를 요구했다는 응답이 7.4%였고 안타깝게도 가해자를 성폭력범으로 신고했다는 응답은 1%도 되지 않았다.



[그림3] 성폭력을 당한 뒤 어떤 후속 조치를 취했나


  후속 조치를 취하지 못한 이유는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아서가 55.2%로 가장 높은 응답을 나타냈고, 가해자에게 불이익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가 19.8%, 가해자의 협박으로 피해 사실을 발설할 수 없어서라는 응답도 11.4%였다. 해결할 방법을 모르거나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어서라는 응답은 6.4%로 나타났다.



[그림4] 성폭력을 당하고도 후속 조치를 취하지 못한 이유


  성폭력이 일어난 뒤 가해자에 대한 아무 조치 없이 무용을 계속하고 있다는 응답이 51.4%, 무용을 계속하고 있지만 가해자를 피해 다닌다는 응답이 28%였다. 무용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응답은 14.3%, 가해자가 무용을 그만두었다는 응답은 3.2%였다.



상식이 작동하는 세계, 그 평범한 소망


  무용계 성폭력 근절과 해결 방안을 묻는 주관식 질문에 대해서는 다양한 답변들이 수집되었다. 가해자가 법적 처벌을 받아 일정 기간 이상의 수형생활을 하거나 무대에 다시 오르지 못하게 하는 실질적인 처벌 방안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무용수들의 기량이 아닌 외모나 신체조건을 우선시하며 중요한 평가 항목으로 삼는 현재의 무용수 발탁 방식이 개선될 필요가 있으며, 접촉이 잦은 장르의 특성상 수업이나 연습을 시작하기 전 접촉에 대한 합의를 거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개인레슨이라는 명목으로 밀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알려지지 않은 채 피해자가 사라지는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 무용계 안에서 흔히 일어나는 차별과 소외, 폭력에 대해 상담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기관으로 연결해주는 창구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응답자들의 답변은 매우 열정적이었고 문제제기는 매우 구체적이었다. 무엇보다 설문에 응답한 무용인들이 바라는 소망은 무용계가 ‘상식이 작동하는’ 세계가 되는, 더없이 평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상식이 작동하는 세계는 가해자가 계속 승승장구하고 피해자는 침묵하거나 사라지게 만드는 권력의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


  설문조사를 다시 진행하기 전, 3년 전 설문 결과가 발표되지 않아 한번 더 좌절감을 느낀 응답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젊은 무용인들에게 발언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피해자는 더더욱 침묵으로 일관해야 하는,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패배주의적 감각이 팽배한 문화에서 어렵게 목소리를 냈음에도 그에 대한 응답을 받지 못한 좌절감이 무엇일지 짐작한다. 본의 아니게 좌절감을 드리게 되어 죄송한 한편, 열정적인 응답에 감사드리는 바다. 이러한 좌절과 열정은 무용계 변화에 대한 무용인들이 느끼는 열망의 앞면과 뒷면에 다름 아니다.


  비록 적은 응답 수이긴 하나 무용계에서 일어난, 또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성폭력에 대해 실태를 조사한 이 결과물은 무용계의 성평등한 변화로 나아가는 첫 걸음일 뿐이다. 블랙페이지에서는 앞으로도 변화를 갈망하는 무용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성실한 취재를 지속해나갈 것이다.


글_댄스포스트코리아 블랙페이지 취재팀(대표 에디터 윤단우)




*이번 호에서는 설문 결과를 통계 위주로 정리해 발표하느라 제보해주신 성폭력 사례들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해당 사례에 대해서는 심층 인터뷰가 필요하니 특정 무용인에 의한 성폭력을 제보해주신 분들은 blackpage.dance@gmail.com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제보자에 대한 정보는 비밀이 엄수되며, 인터뷰 내용이 기사화될 때도 신원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절대 공개되지 않습니다. 제보해주신 내용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움 부탁드립니다. 제보자의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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