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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020.01.31
법의 심판을 받은 무용계 위력

지난 18,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장판사 김연학)는 자신이 지도하던 제자를 강제추행해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혐의로 기소된 현대무용가 류 모씨의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 2년을 선고했다. 7월 단독부에서 시작된 공판은 830일 검사 측 보호관찰 의견으로 합의부로 넘어갔고 한 차례 선고기일 변경을 거쳐 공판이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지난해 514일 서울중앙지검에 기소되고 나서 5차례의 공판기일을 거치며 약 8개월여를 끌어온 법정 다툼의 1부가 일단락된 셈이다.


공소 사실에 따르면 피고인 류 씨는 2015년 자신이 운영하는 무용단 연습실에서 4차례에 걸쳐 피해자를 추행했는데, 류 씨는 행위가 이루어진 곳은 자신의 개인 연습실이고 당시 피해자에게 개인 레슨을 해주던 사이였기 때문에 피해자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언제든 레슨을 그만둘 수 있어 보호 감독의 관계로 볼 수 없고 자신은 다른 사람의 경력에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의 지위에 있지 않았기에 위력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뿐 아니라 범행 당시 강압적인 분위기가 아니었고 피해자의 반항이 없었던 점을 근거로 성폭력 사실을 부인했다.


재판부에서는 피고인 류 씨가 단순한 교습자가 아니라 당시 서울종합예술학교에 출강하고 있었고 심사위원으로 다수의 무용콩쿠르에 참여했으며 무용단을 운영하는 등 수강생인 피해자를 지도 감독하는 데 있어 공교육 교사와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고 피해자가 류 씨의 연습실 외에는 따로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언제든 자유롭게 레슨을 그만둘 수 있었다는 류 씨의 주장과 달리 무용수로서의 장래를 위해 류 씨에게 배울 수밖에 없었기에 류 씨가 피해자에 대해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거부하거나 반항하지 않았다고 해서 동의로 간주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이것은 피해자가 첫 번째 범행 당시 류 씨가 그런 행동을 할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기에 몸이 얼어붙었다(긴장성 부동화; 긴장이나 공포 때문에 일시적으로 몸이 굳어 꼼짝도 못 하는 상태)”고 진술한 것은 피해자가 피고인과 어떠한 사적인 관계에 있지 않았고 이성적 호감도 없는 사이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한 범행이 이루어진 장소는 피고인의 연습실로 류 씨의 권위의 영역에 속하는 장소이며 류 씨는 피해자가 적극적인 저항을 못 하는 상태임을 알고도 시도하였고 피해자와 둘만 있는 상황을 노려 기습적으로 범행을 저질렀기에 위력에 의한 것임을 인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즉 권위에 의해 피해자를 통제하고 지배하지 않았다면 범죄 사실과 같은 행위는 성립이 가능하지 않았기에 이는 직업적 권위를 남용해 피해자의 내밀한 사적 영역을 침범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러한 범죄 사실을 가능케 한 무용계 위력의 존재에 대해 피고인 류 씨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또한 재판부는 피해자가 류 씨에 대해 사적 감정이 있었다는 근거로 제시된 문자메시지와 이에 대한 증인의 진술에 대해서도 증인이 피해자가 문자메시지를 보낸 맥락을 모른 채 표면적으로 파악한 대로만 진술하여 피해자의 진술을 탄핵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재판부에서는 위와 같이 행위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였는지, 피해자의 증언은 신뢰할 만하였는지, 행위의 발생에 있어 위력은 존재했는지 등을 꼼꼼히 따진 끝에 피고인 류 씨의 범죄 사실이 인정된다는 결론과 함께 범죄 사실로 인해 피해자는 꿈의 상당 부분을 접어야 했고 류 씨는 범죄 사실을 인정하지도, 피해자에게 사과하거나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하지도 않은 점 등을 감안해 징역 2년을 선고하고 도주를 우려해 법정 구속을 명령했다. 또한 4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 3년간 아동청소년기관 취업 제한, 관할 기관에 신상 제출을 명했다. 다만 전과가 없는 데다 범죄가 불특정 다수 여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기에 검사가 제출한 보호관찰 명령은 기각되었다.


성폭력과 관련된 범죄들 가운데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은 최대 징역 3, 단독 사건일 경우 징역 1~2, 류 씨의 사건처럼 병합 건일 경우 1~3년 사이에서 선고가 나오는데 형량이 높지 않은 편이라 양형 기준을 따로 두지는 않고 있다. 성범죄 사건에서 유독 집행유예 비율이 높은 현실에 비춘다면 사법부가 류 씨의 범죄에 대해 매우 무거운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1월 8일 현대무용가 류ㅇㅇ씨의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에 대한 선고 공판이 끝난 뒤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위드유에서는 서울중앙지법 건물 앞에서 방청에 참여한 연대인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가졌다. (사진제공: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위드유)

피고인 측 변호인단은 이 같은 판결에 불복해 선고 다음 날인 9일 바로 항소했다. 14일 검사 측에서도 항소장을 제출하며 이 사건은 쌍방 항소로 곧 열리게 될 2심 공판을 앞두고 있다.


이 사건이 2심에서 어떻게 전개될지 여부와는 별도로 1심 판결문은 그 자체로 매우 큰 의의를 갖는다. 예술계에 존재하지만 증명하기 쉽지 않았던 업무상 위력에 대해 판결문은 범행 장소와 범행 당시의 정황, 행위 이전의 관계와 행위 지속 기간 동안의 관계 변화, 피해자의 나이 등을 꼼꼼히 따져 위력이 어떻게 작동해 범죄를 가능케 하는지 분명히 명시하고 있으며, 류 씨의 연습실처럼 일대일 개인 레슨이 이루어지는 사설교습소까지 업무상 위력이 행해지는 장소로 포괄한 판례로 남아 주로 프리랜서로 일하는 예술가들의 업무상 사각지대를 줄이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사건이 보도되고 나서 무용계 성폭력을 반대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연대활동을 시작한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에서는 오롯위드유라는 반()성폭력 연대체를 결성해 재판 방청과 탄원서로 피해자에게 연대했다. 선고 공판까지 총 6차례의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방청연대로 연대에 참여한 이들은 총 75, 개인 탄원서와 한 줄 탄원서, 연대 탄원서에 이르기까지 탄원서로 연대한 이들은 총 938명으로, 무용계에서 이 같은 대규모 연대활동이 일어난 것은 처음이다.


선고 공판 직후 기자회견에서 오롯위드유 집행부는 류 씨의 유죄 판결을 환영한다는 성명문에서 이번 판결이 문화예술계에 만연한 권위주위와 비민주적 현장에 균열을 가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는 동시에 흔들리지 않고 피해자 곁에 서서 피해자에 대한 편견과 2차 가해에 대응하고, 가해자가 정당한 사회적, 도덕적 책임을 지게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했다.


연대자로 발언에 동참한 윤단우 무용칼럼니스트는 사법부는 사법부의 책임을 다했고 이제 예술계의 책임을 다해야 할 때라고 말했고, 설동준 문화기획자는 이러한 연대활동에 대해 내가 속한 것이 상식적인 사회이자 공동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으며,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산 활동가는 이번 판결이 앞으로 신체의 자유와 성적 주체성을 확보하려는 여성 예술인들에게 뒷받침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성폭력 없는 무용계,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오롯위드유의 슬로건처럼, 류 씨의 사건은 무용계에 만연한 성차별과 성폭력 문화를 바꾸기 위한 첫 걸음에 지나지 않는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증인의 일부 진술은 피해자에 대한 엄연한 2차 가해로 작동했고, 재판정 바깥에서는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피해자와 류 씨의 관계를 왜곡하는, 입에 담기도 힘든 추문이 떠돌며 2차 피해를 양산했다. 2012년 고려대 의대 성추행 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던 피고인 배 모씨의 어머니는 피해자에 대한 인격 모독성 허위사실을 유포하며 적극적인 2차 가해에 나서다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은(아들은 징역 16월형에서 1년형이 더해졌다) 바 있는데, 이는 피해자를 의심하며 가해자의 편을 들어 2차 가해에 동참하는 이들이 기억해야 할 판례라 하겠다.


어떤 세계의 정화는 가해자 한 명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의 편을 들며 피해자를 그 세계에서 몰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가해자의 친구들이 가해자의 손을 놓는 데에서 시작된다. 사법부의 판단은 끝났고 이제 책임은 무용계로 넘어왔다. 무용계가 가해자의 손을 잡고 과거에 남을 것인지, 피해자의 손을 잡고 미래로 나아갈 것인지, 앞으로의 한 걸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_댄스포스트코리아 블랙페이지 취재팀(대표 에디터 윤단우)

 

*블랙페이지 취재팀에서는 2018년 미투 운동과 함께 시작했던 무용계 성폭력 실태 조사를 다시 진행합니다. 이제야 고발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한 현재, 몇몇 사건들을 파편적으로 접하고 공분하는 것이 아닌 무용계 성폭력의 양태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설문에 응답하는 외에 추가로 제보할 내용이 있거나 인터뷰를 원하시는 분은 blackpage.dance@gmail.com 으로 메일 주십시오. 설문은 물론 추가 제보나 인터뷰에서 개인 정보와 관련된 내용은 비밀이 엄수되니 안심하고 응답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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