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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_ 인문학적 춤읽기


2015년 3월
2015.03.30
인간은 왜 춤을 추는가? - 무용인류학을 위한 변명 -


 ‘인문학적 춤읽기’는 인문학의 다양한 채널을 통해 춤의 본질을 이해해 보자는 취지에서 한국춤문화자료원이 기획하고 국립예술자료원이 주최했던 무용 강좌 시리즈이다. 댄스포스트코리아는 지난 1년간 ‘인문학적 춤읽기’ 의 초빙 강사들로부터 강의에 기초한 원고를 받아 강연 글을 게재하여 왔으며, 이번호에 마지막으로 무용인류학자 최해리 박사의 강연 글을 게재한다. 최해리 박사는 무용의 인류학적 이해를 위해 2013년 10월 4일에 <춤의 원류에 대한 상상>과 10월 18일에 <인간은 왜 춤을 추는가?>를 강의했다.




1. 인류학자는 인디아나 존스 박사가 아니다


 최근 들어 ‘인류학’을 미장센으로 활용하는 공연을 간혹 보게 되는데, 그런 공연에서 인디아나 존스 박사가 등장하지 않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탁월한 연출 탓인지, 해리슨 포드의 자연스러운 연기 때문인지 인디아나 존스 박사는 우리 시대 인류학자의 아이콘으로 각인되어 있다. 유서 깊은 대학의 교수이면서 전 세계를 무대로 모험을 펼치는 존스 박사, 얼마나 멋지던가? 유감스럽게도 그 존스 박사는 가공의 인물이다. 심지어 인디아나라는 이름은 조지 루카스 감독이 기르던 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란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가 투사하는 인류학자의 모습은 다분히 제국주의적이며 백인 및 유럽 중심주의적이다. 인류의 시원이나 잃어버린 인류의 문명을 찾아 나서는 존스 박사는 왜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로만 향하는가? 영화에서 그려지는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의 어느 마을은 왜 ‘미개’해 보이고, 원주민들은 ‘야만’적으로 보이는가? 이 지역들은 16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성행했던 제국주의 식민화의 대상들이다.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식민지 지역은 개발하고 문명화해야 될 공간이며, 문명화와 식민화를 거부하고 항거하는 원주민(원래 주민, 땅의 주인)들은 매우 위협적인 존재들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통치를 앞두고 가장 먼저 파견하는 학자들이 인류학자들이었다고 한다. 인류학자들의 보고서를 통해 식민지의 특색이 무엇이며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 혹은 원주민의 민족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효율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가 등 식민통치의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그래서 인류학에는 제국주의 산물이라는 오명도 따라 다닌다. 인류학적 방법의 하나인 인류와 문화를 분류하고 그 속성을 기술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제국주의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 지역을 식민지 대상으로 삼았던 프랑스는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식민지관을 설치하여 아프리카 원주민을 울타리에 한 달간 가둬놓고 생활하게끔 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 민족도 이런 끔찍한 일을 예외 없이 당했다. 일본은 1903년 오사카박람회에서 우리나라 사람 2명을 일본의 인근 지역에 사는 인종의 표본으로 전시했다고 한다.


 이렇게 인류와 문화를 분류 및 박제화해서 전시하던 공간이 박람회장과 박물관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예술가들이 ‘인류학적’으로 펼친다는 공연에서 이런 제국주의적 잔재를 발견하고 불쾌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이 굳이 ‘인류학’과 ‘박물관’이라는 학문적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현장조사, 자료수집과 분류, 아카이빙과 같은 인류학적 연구방법을 모방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무슨 목적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현장(그것도 도시의 변두리 아니면 지방)으로 간다고 해서, 무작정 영상으로 수집해 온다고 해서, 또 무작위로 자료를 나열한다고 해서 ‘인류학적’이라고 간주할 수 없다.


 현장조사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하며, 조사 수집은 활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장조사에 앞서 조사할 대상과 지역에 대해 사전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며, 수집 대상과 활용을 고려해서 다양한 방법론이 구사되어야 한다. 방법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조사가 내부자의 시선인지, 외부자의 시선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특히 내부자의 시각에 의한 자료수집이라면 해당 지역의 인지체계로 자료를 수집하고 해석해야 한다. 수집된 자료들은 목적에 맞게 분류되고 연구자들의 전문지식을 동원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인류학에서는 자료를 마구잡이로 영상에 담아 와서 나열하는 학자를 일컬어 ‘진공청소기’라고 한다.


 인류학자들은 인디아나 존스처럼 사건에 떠밀려 갑자기 탐험에 나서지 않는다. 특히나 대학에서 인류학을 가르치는 학자라면 그렇게 현장으로 바로 떠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공연자들은 용감무쌍하게 현장조사의 모험에 나선다. 인류학적으로 훈련을 받지 못한 그들이 수집해왔다는 자료들은 진공청소기에서 뿜어 나온 듯 난삽하다. 분류의 기준이나 예술적 해석도 없이 ‘무대’를 빌어 단지 ‘이색적’이라는 이유로 나열될 뿐이니 ‘인류학적 쇼’에 불과하다. 그래서 의문이 든다. 공연을 하는데 ‘인류학’이나 ‘박물관학’이라는 수식어는 왜 필요했을까? 창작자가 인디아나 존스에 심취했거나 개 이름이 인디아나이거나 둘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2. 춤은 누구나 이해하는 몸짓 언어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예술이며, 어느 나라에서든 소통이 가능한 몸짓 언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춤은 말이 아닌 몸짓으로 이루어지기에 만국 공통어(universal language)로 착각하기가 쉽다. 그런데 헐리웃 영화에 익숙한 우리는 히치하이킹 손짓이 “차를 태워줘”라고 이해하지만, 아프리카 어느 민족에게는 최대의 모욕 행위로 간주된다. 인도 사람들은 “그래”라는 긍정의 의미를 머리를 가로 짓는 행위로 표현하는데, 우리는 “아니”라는 부정의 표현으로 읽는다. 이와 같이 몸짓 언어에는 문화적 경계가 분명하며, 문화적 경계를 넘기 위해서는 번역이 필요하다. 이 사실을 학문적으로 제기한 학자가 ‘무용인류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조안 케알리이노호모쿠(Joann Kealiinohomoku)이다. 케알리이노호모쿠 박사에 의하면, “춤은 문화적 맥락 속에서 구조화된 움직임의 체계이며, 민족마다 선호하는 움직임이나 독특한 상징을 내장”하고 있어서 쉽게 읽혀질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화되었다는 발레조차도 그 진원지인 이탈리아와 발전지인 프랑스의 문화코드를 내포한 민족춤(ethnic dance)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타문화의 춤 혹은 문화로서의 춤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움직임뿐만 아니라 그 춤이 생성된 사회적, 문화적, 지리적 맥락은 물론이고, 그 춤을 촉발시킨 민족의 인지체계와 미학까지도 함께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수행하는 학자들이 무용인류학자들이다. 이들은 주로 인류학과와 무용학과 내의 무용인류학(Dance Anthropology), 민족무용학(Dance Ethnology), 민족무용지학(Dance Ethnography)에서 양성된다.* 최근에는 인류학과 무용학의 두 학문적 영역을 포함하여 춤을 문화적으로 연구하는 다양한 방법론을 묶어서 ‘에스노코레오로지(Ethnochoreology)’라고 부른다.


 이 분야의 학자들은 춤 연구를 통해 타문화의 춤이 가진 의미, 그리고 익숙한 춤이라도 새로운 시각에서 발견한 춤의 또 다른 의미를 밝혀준다. 그러므로 무용인류학자들은 춤의 의미를 문화적으로 해석 혹은 번역해주는 연구자들이며, 이들의 연구결과물은 일종의 번안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인류학자 알란 메리엄(Alan Merriam)은 “춤은 곧 문화이고, 문화는 곧 춤”이므로, 문화로서의 춤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즉, 춤을 문화로서 바라보고 인류학적으로 연구하자는 의미이다.** 이 주장은 발표자가 1995년 하와이대학교 석사학위논문에서 내린 다음과 같은 춤의 정의와 일맥상통한 것이다: 즉, “춤은 한 민족사회의 문화를 반영하는 거울로서 춤(움직임, 주제, 목적)을 통해 그 사회의 관습, 믿음, 역사, 철학 등을 엿볼 수 있으며, 또한 춤(수반되는 음악, 의상, 무대)을 통해 그 사회의 음악, 복식, 미술 등의 예술을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따라서 춤은 그 사회문화의 구심체이다.”


 그런데, 이 의미는 낯선 문화의 전통춤을 인류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으로 오역될 위험이 있다. 인류학은 인간이 이룩한 문화 속에서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인류학적으로 춤을 연구한다는 것은 인간이 이룩한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춤을 바라보겠다는 뜻이다. 즉, 춤을 생활과 괴리된 극장, 공연장 등 진공상태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생활과 환경과의 관련 속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학적인 춤연구는 춤의 기능과 특성을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숙고한다. 이런 이유에서 어떤 사회의, 어떤 민족의 춤문화를 연구하고자 할 때는 내부자적(Emic) 관점에서 접근하여 춤추는 몸과 움직임 체계를 사회적, 문화적, 공간적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3. 인류학은 어떠한 학문인가?


 나는 춤을 통해 민족과 그 민족의 문화를 이해하고자 춤을 연구하는 무용인류학자이다. 1995년 하와이대학에서 민족무용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후 20여 년 간 공연기획자, 대학강사, 잡지 편집장, 객원연구원 등으로 여러 현장을 거쳤다. 학위를 받고 온 이후로 현장조사를 올곧게 하지 못했고, 독자적인 이론과 연구방법론을 형성하지 못했기에 한동안 무용인류학자라는 타이틀을 감히 쓰지 못했다. 근자에 와서 박사학위를 받고, 인류학, 구술사, 아카이브와 관련된 여러 프로젝트들을 수행하면서 현장조사의 경험이 풍부해졌으며, 또 나름의 이론과 방법론을 갖췄다고 판단해 무용인류학자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있다.




 ‘인문학적 춤읽기’에서의 강좌를 요청받고 어떤 제목으로 강연할 것인지에 대해 무척 고민했다. 그 와중에 영감을 주었던 책이 있다. 영국의 음악인류학자 존 블래킹(John Arthur Randoll Blaking)의 『인간은 얼마나 음악적인가』이란 저서이다. 제목을 보는 순간, 내가 지난 20여 년간 춤연구에 대해 고민해 온 결과를 펼쳐놓을 제목이 떠올랐다. 바로 <인간은 왜 춤을 추는가?>이다. 이 제목이야말로 춤의 본질을 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겼으며, 평생의 연구 화두로 삼을 생각에 가슴이 벅찼었다. 그래서 이 제목으로 ‘인문학적 춤 읽기’에서 강의를 했고, 이 제목으로 지난 20여 년 간 정리해둔 글들을 모아 책으로 낼 참이었다. 그런데 이 제목을 도둑맞고 말았다. 분노를 삭이며 근 1년을 보냈지만, 더 이상 그러지 않기로 했다. 제목을 훔쳐간 저자를 그만 용서하려고 한다. 대신 내가 그 제목을 작성할 당시에 결심했던 것처럼 그가 그 제목을 평생연구의 화두로 삼아 제대로 된 무용인류학을 펼쳐 보이길 바란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인류학(人類學)이 어떤 학문인가에 대해 되짚어 보고 싶다. 인류학은 분류나 전시를 위한 학문이 아니며 인류와 그 문화를 이해하는 학문이다. ‘인류학적’이라는 용어를 그냥 탐(貪)만 내어서는 안 된다. 인류학은 자신의 창으로 타자와 타자의 문화를 바라보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자신의 문화부터 이해하고 공연자/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했을 때 비로소 탐(探)에 나서야한다. 인류학은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인류학적으로 공연/연구를 하고자 나섰다면 타민족과 타민족의 문화를 진정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부터 갖추길 바란다.



* 최근에는 인류학과 무용학의 두 학문적 영역을 포함하여 춤을 문화적으로 연구하는 다양한 방법론을 묶어서 ‘에스노코레오로지(Ethnochoreology)’라고 부른다.

** 이 주장은 발표자가 1995년 하와이대학교 석사학위논문에서 내린 다음과 같은 춤의 정의와 일맥상통한 것이다: 즉, “춤은 한 민족사회의 문화를 반영하는 거울로서 춤(움직임, 주제, 목적)을 통해 그 사회의 관습, 믿음, 역사, 철학 등을 엿볼 수 있으며, 또한 춤(수반되는 음악, 의상, 무대)을 통해 그 사회의 음악, 복식, 미술 등의 예술을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따라서 춤은 그 사회문화의 구심체이다.”




글_ 최해리(무용인류학자,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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