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_ 니체의 춤 철학
편집자 주: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가 현대철학에 끼친 영향을 사람들은 흔히 지축을 뒤흔든 지각변동에 비유한다. 니체는 스스로 자기로 말미암아 세계사가 두 동강이 난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시대가 신봉했던 진리와 가치 체계를 전도시켰으며,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제시한다. 니체는 철학뿐만 아니라 현대예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현대무용은 몸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니체의 철학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 니체 철학, 특히 그의 ‘몸철학’과 ‘예술생리학’이 현대무용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펴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아래의 글은 지난 9월 7일 한국무용기록학회 주최로 이화여대에서 있었던 강연 원고를 바탕으로 한다. |
그리스 비극의 부활과 바그너 극음악
소크라테스주의는 마치 여름 석양의 황혼처럼 유럽문화에 거대한 그늘을 드리운다. 니체가 체험한 근대 유럽문화도 예외는 아니다. 소크라테스주의의 이성에 대한 과도한 확신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오류를 교정하려는 여유를 상실했다. 기계적 세계관은 인간 밖의 자연과 인간 속의 자연 모두를 수와 양으로 재단한다. 진보의 척도는 누가 혹은 어떤 사회가 얼마나 더 기계적 세계관에 맞게 생각하고 행위하여, 물질적 부를 얼마나 많이 축적하는가에 달려있었다. 개인의 행복과 국력은 화폐의 축적과 비례하고, 이것을 위해 개인들은 시장에서 끊임없이 경쟁해야하고 국가간에는 재화를 축적하기 위한 전쟁이 빈발하게 된다. 예술을 비롯한 일체의 문화도 화폐의 위력에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예술은 자본의 장식물과 사교를 위한 오락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의 고귀함을 찾는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일 따름이다. 19세기 유럽에 몰아친 각종 종말론과 염세주의는 계몽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탈출구는 없는가?
근대가 봉착한 막다른 골목에서 니체가 찾은 출구는 독일철학과 독일문화이다. 그 중에서도 니체에게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과 바그너의 음악극 정신이 진정한 출구의 역할을 한다. 사실 니체의 처녀작인 『비극의 탄생』(1872)은 두 사람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칸트에 대한 치밀한 연구에서 비롯된다. 칸트는 세계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 현상세계와 우리의 인식능력을 넘어선 물자체(Ding an sich)의 세계로 구분하는데,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표상(Vorstellung)의 세계와 의지(Wille)의 세계로 설명한다. 칸트에서 물자체의 세계는 현상 세계에 매우 제한적인 방식으로 개입하지만 쇼펜하우어에게 표상의 세계는 전적으로 의지의 지배를 받는다. 그에게 의지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하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계획된 행위를 유발하는 마음의 작용이 아니라, 맹목적인 충동 혹은 힘의 형태로 드러난다. 일체의 유기체와 생물은 바로 이러한 맹목적인 의지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것의 가장 적나라한 표출이 성욕이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표상의 세계를 ‘아폴론적인’ 세계로 의지의 세계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아폴론적인 ‘개체화의 원리’와 디오니소스적인 ‘개체화 파괴의 원리’도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에서 기원한다. 또한 예술이 가진 구원의 힘을 쇼펜하우어는 니체에 앞서 간파하고 있다. 인간은 오직 예술을 향유할 때만이 “탐욕스런 의지로부터의 충동에서 해방되고, 욕망의 감옥에서 해야만 하는 일로부터 해방되어 쉴 수 있으며, 익시온의 바퀴도 멈출 것”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은 그대로 니체의 것이 된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모든 미학의 가장 중요한 인식”으로 평가한다. 쇼펜하우어의 예술에 대한 통찰은 음악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 비롯되며, 그에 따르면 여타 예술과 달리 음악은 세계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모사한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구체화된 음악으로 또한 구체화된 의지로 칭할 수 있다.” 니체는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이론에 감탄한다. “음악 - 쇼펜하우어는 그것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그는 쇼펜하우어를 자신의 스승으로 칭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쇼펜하우어에게서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 헤맨 스승과 철학자를 발견하였다고 예감했다.” “우리는 쇼펜하우어의 가르침대로 음악을 의지의 직접적인 언어로서 이해하며, 음악이 우리에게 말하며, 불투명하지만 매우 생생하게 움직이는 정신세계를 구체화” 한다. 니체에게서 비극이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그리고 ‘디오니소스적인 정신으로부터’ 기원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쇼펜하우어의 음악에 관한 근본적인 사유는 니체에 앞서 바그너에 의해 재발견되었고 니체는 바그너가 쇼펜하우어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고 감탄한다. 말하자면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와 니체를 정신적으로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쇼펜하우어의 음악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는 그대로 바그너에게도 전달된다. 바그너에 따르면, 근대의 과도한 분화와 개체화의 원리로 초래된 부작용은 근대 문화 속에서 파편화된 개인과 그들이 만들어낸 문화, 특히 예술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본다. 예술은 그리스 문화에서처럼 더 이상 개인과 공동체, 인간과 자연의 이상적 조화에 기여하는 공공제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예술은 시장에서 교환되는 일종의 상품이 되었고, 또한 개인의 오락물이나 장식품으로 전락했다. 바그너의 생각에 동의하는 니체는 자신의 시대, 예술이 처한 궁핍한 처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예술은 저질의 오락적 대상이 되었고, 미학적 비평은 허영심 강하고 산만하고 이기적이며 게다가 불쌍하게도 독창적이지 못한 사교계의 접착제로 이용되었다. (...) 그 결과, 예술에 관한 말들이 지금처럼 무성했던 적이 없었고, 동시에 지금처럼 예술을 무시한 적도 없었다.”
바그너는 예술이 가진 본래의 힘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그것의 모델을 그리스 비극에서 발견한다. 그리스인이 신화를 통해 세계와 삶의 문제에 관한 가장 깊은 통찰력을 얻었듯이, 바그너 역시 신화가 가진 원초적 힘에 주목한다. 그는 게르만 신화가 개체화의 극단적 병폐로 신음하고 있던 당대인들과 분열된 시민사회를 공동체적 전망 아래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바그너의 확신은 그의 ‘극음악(Musik Drama)’으로 구체화된다.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를 그리스 비극의 완벽한 부활로 확신한다. 바그너의 음악극은 오페라와 달리 줄거리나 대사의 비중을 최소화하여, 사건이나 이야기보다는 음악이 만들어 내는 상황과 분위기 자체를 보다 중요한 것으로 보고 그것을 음악극에서 실현한다. 즉 바그너는 음악이 가진 본질적 힘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도 그의 음악극은 디오니소스적인 음악이 주도권을 가진 그리스 비극과 유사점을 가진다.
더욱이 바그너가 음악극에서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불협화음은 삶의 근본적인 모순성을 음악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으며, 그것은 마치 그리스 비극에서 디오니소스합창단이 주는 효과와 비견될 수 있는 것이다. “비극적 신화가 산출하는 쾌락은 음악에서 불협화음에 대해 느끼는 즐거움과 같은 고향에서 유래한다.” 음악적으로 의미가 있는 불협화음은 궁극적으로 들음을 통해 동시에 듣는 것을 넘어서는 것을 가능하게 할 때이다. 그것이 바로 비극에서 추한 것과 부조리한 것이 예술로 승화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비극적 사랑과 파국은 음악을 통해 극단적으로 고양된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감정의 도가니에 빠져든 관객은 음악극의 종료와 함께 그리스 비극의 관람자들이 얻는 것과 동일한 지혜를 얻게 된다. 음악극의 관객이나 비극의 관람자가 얻는 지혜란, 삶은 그 어떠한 ‘경악과 모순’에도 불구하고 “파괴할 수 없이 강력하며 즐거운” 것이다.
바그너의 음악은 19세기 시민사회의 파편화된 개인들을 하나로 묶고 인간을 자연으로 회귀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니체는 확신했으며, 그를 혁명가에 견준다. 그러나 니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에게 걸었던 자신의 기대가 잘못되었음을 간파한다. 니체가 쇼펜하우어에게 실망한 것은 무엇보다도 예술의 기능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이었다. 쇼펜하우어에게 예술은 “의지의 진정제(Quietiv des Willens)”를 의미한다. 그에게 예술은 순수한 관조(觀照)에, 세계에 대한 무관심한 직관에서 성립한다. 예술은 우리가 표상의 세계, 즉 인과율에 지배받는 기계적 세계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표상은 의지의 산물인데 하나의 표상(인식)이 충족되면 또 다른 표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과정은 하나의 충족된 의지가 다른 이루어지지 않는, 즉 결핍된 의지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일체의 의지는 부족과 결핍에서 생기며 그것의 충족은 또 다른 고통으로 연결되고, 한 의지가 끝나면 또 다른 의지가 따른다. 의지는 고통을 낳고 고통은 이렇게 영속적으로 이어진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러한 고통을 끊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자살이고, 차선책으로 의지를 진정시키는 것인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우리가 의지의 연쇄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욕망이 발생하기 이전의 중립상태를 찾아야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관심한 관조이다. 예술은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다. 인간은 의지를 진정시킴으로써만 고통을 멀리할 수 있고, 예술이 진정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다. 예술은 그에게 인간이 잠정적이지만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통로이다. 인간은 오직 예술을 향유할 때만이 “탐욕스런 의지로부터의 충동에서 해방된다.”
니체는 예술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진정’론에 맞서 “삶을 위한 거대한 자극(große Stimulans zum Leben)”론으로 맞선다. 쇼펜하우어에서 개별자의 의지는 맹목적인 하나의 세계의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개별자는 맹목적인 세계의지에서 비롯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쇼펜하우어는 “인식 하는 주체가 의지 없는(willenlosen) 인식 행위의 순수한 주체로 고양되기” 위해서 인간의 의지를 부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와 반대로 니체는 인간의 의지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의지의 형이상학으로서 쇼펜하우어의 세계의 의지 즉, 맹목적인 하나의 의지를 부정한다. 쇼펜하우어의 하나의 세계의지는 니체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무수한 의지만이 존재할 뿐이다. 쇼펜하우어적인 맹목적이며 알 수없는 세계의지(Weltwille)에 대한 의탁은 개별자들의 의지와 자발성의 부정을 의미하며 이것은 곧바로 그의 염세적인 세계관의 근거가 된다. 쇼펜하우어에서 예술은 고통을 완화시키는 진정제의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염세적 세계관을 니체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우상의 황혼』에서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이렇게 요약한다: “그는 예술, 영웅주의, 천재, 미, 위대한 동정, 인식, 진리에 대한 의지, 비극을 차례차례로 ‘의지’의 ‘부정’ 혹은 의지를 부정하려는 욕망의 결과로 발생하는 현상들로 해석하였다 - 이것은 그리스도교를 제외하고는 역사상에 존재했던 최고의 심리학적 날조이다. 좀 더 세밀히 보자면, 그 점에서 그는 단순히 그리스도교적 해석의 상속자이다.” 니체에게 예술은 삶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표현이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이 우리에게 전하는 지혜를 인생에 대한 체념으로 보고 있는 반면에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비극을 비롯한 예술의 궁극적 기능은 삶을 긍정하는 것으로 확신한다. 1887년의 한 단편에서 니체는 이렇게 확언한다. “나는 나의 본능이 쇼펜하우어의 본능과는 반대를 추구했다고 단언한다: 즉 비록 삶의 그 어떤 커다란 무서움에도, 그 어떤 모호함에도 그리고 그 어떤 기만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삶의 정당화를 추구했다:- 그것을 위해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는 형식을 내손에 가지고 있었다.”
니체는 바그너에서 유럽문화의 건강성을 회복시킬 동력을 발견하고 환호했고, 바그너의 음악극에서 그리스 비극의 재탄생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바그너에게 가까이 갈수록 자신의 기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니체는 바그너에 대한 자신의 기대가 그리스적 물음과 현대적인 것을 뒤섞음으로써 왜곡된 것이라고 고백한다. 바그너는 유럽의 쇠락하는 문화를 새롭게 창조해야한다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근대정신을 대신할 대체물을 바그너는 신화에서 찾는데, 그가 찾은 신화는 바로 게르만 신화였다. 게르만 신화 특히 <니벨룽겐의 노래>는 인간의 시원적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영웅의 탄생과 비극적 운명 그리고 비극적 운명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랑 등은 바그너가 자신의 악극을 통해 즐겨 채택하는 주제이다. 그러나 바그너는 그리스의 비극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서사가 아니라 음악이었다는 사실을 고수하지 못했다. 여기서 니체와 바그너 사이에서 비극과 예술 그리고 삶에 대한 근본적 차이가 노정된다.
니체와 바그너 사이에는 음악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이해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바그너는 자신의 저서 『오페라와 드라마(Oper und Drama)』 등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악극에서 전하고자하는 ‘이념’이 음악 자체 보다 훨씬 중요하다. 따라서 음악은 이념의 ‘표현 수단’ 일 뿐이기에, 악극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대사, 즉 연극적 요소이다. 니체는 비극에서 합창으로 표현되는 디오니소스적 음악은 결코 줄거리나 대사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음악 그것 자체가 디오니소스적 정서를 전달한다. 따라서 비극에서 음악자체가 중심역할과 목적이 된다. 두 사람의 음악관의 차이는 니체가 이미 1871년의 유고에서 “음악의 본래적인 드라마성은 있을 수 없다”라는 언명에서 드러난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람의 갈등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즉 니체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음악은 결코 수단이 될 수 없다.” 또는 “개념은 예술의 죽음이다”라는 니체의 주장은 바그너의 음악관과는 거리가 있다. 니체에게 음악은 극의 줄거리와 이념을 전달하거나 상징화하는 수단이 아니다. 더 나아가 음악은 바그너의 악극이 보여주듯이 단순히 청중의 감정을 끌어내기 위한 장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이 점점 더 관객의 감정을 고양시키고 극적 효과를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것을 일종의 최면효과로 비판한다. 결국 니체는 바그너의 악극이 디오니소스적 음악정신을 구현하는 것과 무관함을 깨닫는다.
다시 쓴 『비극의 탄생』의 자기비판을 위한 서문에서 니체는 자신이 바그너에 대한 젊은 날의 생각을 철회한다. “나는 당시 가장 현재적인 것을 사용함으로써 나의 첫 번째 책을 망쳤는데, 이 현재적인 것에 대한 너무 성급한 희망과 잘못된 응용들”이 그 원인이었다. 니체에 따르면 바그너 악극의 최악의 경우는 <파르치팔>이었다. 파르치팔은 그리스도교 신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구원을 간청한다. 바그너의 음악은 그리스 비극의 본질인 디오니소스적 정신을 구현한 예술이 아닌 것이다. 바그너가 그리스도교에 무릎을 꿇을 때 니체는 그에게서 낭만주의자와 반(反)디오니소스적 예술가를 똑똑히 목격했다. 니체에 따르면 바그너에게 예술은 형이상학을 대신하여 이 세상의 고통을 위로하는 최면제일 뿐인 것이다. 결국 니체는 자신의 두 스승인 쇼펜하우어와 바그너가 비극의 본질인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대척점에 서있음을 자각한다. 그들의 예술에서 ‘지금 이곳의 세계와 삶’은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다.
글_ 정낙림(예술철학가)
독일 부퍼탈대학 철학박사, 경북대 강의교수, 한국니체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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