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이름
이메일
뉴스레터 수신받겠습니다.
  

Article_ 니체의 춤 철학


2014년 1월
2014.01.16
니체의 몸, 예술생리학 그리고 현대무용 (III)


  편집자 주: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가 현대철학에 끼친 영향을 사람들은 흔히 지축을 뒤흔든 지각변동에 비유한다. 니체는 스스로 자기로 말미암아 세계사가 두 동강이 난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시대가 신봉했던 진리와 가치 체계를 전도시켰으며,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제시한다. 니체는 철학뿐만 아니라 현대예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현대무용은 몸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니체의 철학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 니체 철학, 특히 그의 몸철학예술생리학이 현대무용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펴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아래의 글은 지난 97일 한국무용기록학회 주최로 이화여대에서 있었던 강연 원고를 바탕으로 한다.  




4. 위버멘쉬Übermensch와 대지의 의미



4.1 네 삶을 사랑하라.


 니체는 놀이하는 아이의 정신을 통해서 니힐리즘 극복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니체가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제안하는 첫 번째 원칙은 ‘네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 즉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구원을 지금 이곳의 삶을 넘어선 곳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해 내가 택한 방식은 운명애이다. 앞을 향해서도 뒤를 향해서도 영원에 걸쳐서 하나도 변경을 요구하지 않는 일, 필연적으로 닥쳐오는 일을 은폐하지도 않고 견딜 뿐 아니라 사랑하는 일.”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비천한 것으로, 불완전한 것으로 그리고 악한 것으로 규정했던 일체의 자기학대적 세계관을 과감히 버리는 것이 니힐리즘 극복의 첫 걸음이다.


 영원회귀 사상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으며 미래에 대한 헛된 망상을 포기하고 매 순간을 영원처럼 살 것을,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전력을 다해 살 것을 가르친다. 니체는 삶에 대한 긍정을 디오니소스 신을 통해 설명한다. 신화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서 반신반인으로 태어난다. 헤라의 질투로 디오니소스는 거인 족에 의해 찢겨죽지만 그는 다시 태어난다. 디오니소스는 자신의 모든 고통을 피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고통을 제의를 통해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의 비극은 바로 디오니소스적 지혜의 산물이다.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가장 낯설고 가혹한 삶의 문제들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있는 삶에 대한 긍정, 가장 고귀한 삶의 전형을 희생시켜 가면서도 고유의 무궁무진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 - 그것이 바로 내가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세계와 삶의 모든 모순적인 것을 긍정하는 운명애는 결코 체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지칭한다.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을 가진 인간은 우연을 필연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가진 자이며, 현실을 한탄하거나 부정하고 파괴하기 보다는 기계적으로 순환할 것 같은 세계와 삶의 과정을 자기고양의 필연성으로 읽어내는 눈을 가진 자이다. 그는 영원회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자이다. 변화와 소멸은 영원과 불멸의 모순이 아니다. 고통은 회피되어야 하거나 신의 품안에서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그것을 가기 극복의 계기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긍정할 때, 세계의 무의미함은 사라질 것이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니힐리즘 극복의 핵심이며, 그것은 세계와 삶의 모순에 대한 긍정에서 가능하다. “나는 언젠가 단지 긍정하는 자이기를 원한다.”

      

4.2 가치를 창조하는 예술가가 되라.


 그렇다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은 현실에서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는가? 우선 니체는 힘의 극대화를 원칙으로 하는 ‘힘에의 의지’를 신뢰할 것을 주문한다. 그렇다면 힘에의 의지가 극대화되는 삶의 형태는 어떤 것인가? 니체는 예술에서 그 단서를 찾는다. 니체에게 “예술은 진리보다 한층 더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예술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위대한 형성자이며, 삶에의 위대한 유혹자요, 삶의 위대한 자극제”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현상적 차이를 넘어 동일성을 추구하는데 반해 예술은 차이와 다름을 추구한다. 세계를 다르게 보려는 자세는 관점성과 힘에의 의지라는 삶의 원칙에 충실한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영혼 그 자체에서 간격을 새로이 확장하려는 끊임없는 갈망’을 가지고 있다.


 니체는 삶을 위해 예술이 필요함을 고대 그리스인에서 발견한다. 그리스인들은 삶과 죽음, 고통과 즐거움의 공존이라는 원초적 모순을 진리의 차원이 아닌 예술 즉, 비극을 통해 극복하려 하였다. 그리스 비극은 왜 고통이 삶에서 필연적인 것이며 그것은 어떻게 자기긍정과 자기극복으로 승화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인류 역사상 가장 건강한 민족이었던 그리스 인들이 왜 비극을 필요로 했던가는 왜 삶을 위해 예술이 필요한가에 대한 대답이다.


 니체에게 예술은 그림, 음악 혹은 무용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니체는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더 이상 예술을 인간 행위의 특수한 영역으로 제한하는 것을 거부한다. 인간이 가치를 창조하는 한 그는 예술가이며 세계 자체는 예술작품이다. “스스로 분만하는 예술작품으로서의 세계”는 예술 생산자와 소비자, 혹은 생산자와 생산품간의 어떠한 분리도 무의미하다. 예술가적 삶의 태도는 특정한 삶의 양식을 강요하는 모든 독단적 형태의 형이상학, 신학적 그리고 도덕적 세계를 거부하고, 스스로 가치창조의 주체로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술은 삶의 최고의 자극제가 되고 건강한 삶을 회복시키는 치료제의 역할을 한다. 그 때문에 “예술은 인간을 구원한다.”


4.3 대지를 사랑하는 위버멘쉬가 되라


 니체가 생각하는 건강한 인간이란 위버멘쉬(Übermensch)이다. 위버(über)는 ‘뛰어넘는’ 혹은 ‘건너가는’의 뜻을 가진다. 즉 인간을 뛰어넘거나 건너가는 존재가 위버멘쉬이다. 그러나 위버멘쉬는 초인이 아니다. 초인은 상식인의 경계를 초월하는 힘과 능력을 가진 존재로, 신적인 인간을 의미한다. 위버멘쉬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자신을 극복하는 인간의 분투를 의미한다. 위버멘쉬는 비록 고통스럽지만 기존의 가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한다. 위버멘쉬는 초월적 세계를 설파하는 그리스도교적 신앙도 이성의 법칙에 따라 세계를 이해하는 주지주의적 철학도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지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위버멘쉬는 대지의 의미이다.” 대지는 힘을 찬양하며, 그렇기에 몸을 긍정한다. 대지는 어떠한 목적도 없이 고통과 기쁨이 영원히 회귀하는 디오니소스적 세계의 다른 이름이다. 이러한 세계를 피하지 않고 긍정하는 자가 위버멘쉬이다. 따라서 위버멘쉬는 대지에 충실하며 “천상의 희망을 말하는 자를 믿지 않는다.” 천상의 희망을 말하는 자는 “삶을 경멸하는 자들이고 쇠잔해 가는 자들이며, 스스로 독을 먹은 자들이다.” 위머멘쉬는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하는 자이며, 따라서 그는 일상의 안락만을 추구하거나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그릇된 세계관을 신봉하는 근대적인 인간, 즉 ‘마지막 인간’이 아니다. 근대인의 다른 이름인 마지막 인간은 신이 죽은 사회에서 화폐만을 유일한 가치판단의 원천으로 보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며 쾌락에만 탐닉하는 허무주의자들이다. 니체는 그들에게서 위대한 개인의 죽음과 군중의 평균적 삶을 본다. 그들에게서 인간의 자기극복, 가치의 창조는 불가능하다. 위버멘쉬의 행복은 근대인이 생각하듯이 고통의 제거나 회피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적극적 극복을 통해 성취된다. 위버멘쉬에게 힘의 상승은 곧 행복이고, 그것의 쇠약은 곧 불행이다.


 니체의 확신에 따르면 인간에 있어 진보는 결코 집단에 의해서 성취될 수 없다. “종으로서의 인간은 진보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진보는 탁월한 개인에 의해서만 성취될 뿐이다. 위대한 개인은 ‘자기 스스로 법칙을 부여하는 자’이며 ‘자기 스스로를 창조하는 자’이다. 그렇다고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는 생래적인 계급에 근거한, 말하자면 귀족과 같은 특정 부류의 인간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비록 니체가 귀족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가진 것은 사실이나 계급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관 때문이다. 니체에게 위버멘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취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그리스도교나 계몽주의가 가르치듯이 생래적인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노력한 결과물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위버멘쉬가 될 수 있다.



글_ 정낙림(예술철학가)
독일 부퍼탈대학 철학박사, 경북대 강의교수, 한국니체학회 이사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14개(1/1페이지)
ARTICLE
발행월 제목
2014년 12월 [니체의 춤 철학] 니체의 몸, 예술생리학 그리고 현대무용 (XIV)
2014년 11월 [니체의 춤 철학] 니체의 몸, 예술생리학 그리고 현대무용 (XIII)
2014년 10월 [니체의 춤 철학] 니체의 몸, 예술생리학 그리고 현대무용 (XII)
2014년 9월 [니체의 춤 철학] 니체의 몸, 예술생리학 그리고 현대무용 (XI)
2014년 8월 [니체의 춤 철학] 니체의 몸, 예술생리학 그리고 현대무용 (X)
2014년 7월 [니체의 춤 철학] 니체의 몸, 예술생리학 그리고 현대무용 (IX)
2014년 6월 [니체의 춤 철학] 니체의 몸, 예술생리학 그리고 현대무용 (VIII)
2014년 5월 [니체의 춤 철학] 니체의 몸, 예술생리학 그리고 현대무용 (VII)
2014년 4월 [니체의 춤 철학] 니체의 몸, 예술생리학 그리고 현대무용 (VI)
2014년 3월 [니체의 춤 철학] 니체의 몸, 예술생리학 그리고 현대무용 (V)
2014년 2월 [니체의 춤 철학] 니체의 몸, 예술생리학 그리고 현대무용 (IV)
2014년 1월 [니체의 춤 철학] 니체의 몸, 예술생리학 그리고 현대무용 (III)
2013년 12월 [니체의 춤 철학] 니체의 몸, 예술생리학 그리고 현대무용 (II)
2013년 11월 [니체의 춤 철학] 니체의 몸, 예술생리학 그리고 현대무용 (I)

만드는 사람들 _ 편집주간 최해리 / 편집장 장지원 / 부편집장 윤단우 / 편집자문 김호연, 이희나, 장승헌
시각 및 이미지 자문 최영모 / 기자 김현지, 윤혜준 / 웹디자인 (주)이음스토리

www.dancepostkorea.com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로 31-15 (합정동, 리츠하우스) 101호 / Tel_ 02.336.0818 / Fax_ 02.326.0818 / E-mail_ dpk0000@naver.com
Copyright(c) 2014 KDR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