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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_ 춤비평 담론


2015년 10월
2015.10.26
생태예술, 자연과 문화세계의 창출

 생태예술은 아직 정착된 개념이 아니다. 20세기 말 유럽과 미주에서 조금씩 이 용어가 쓰여졌으며 그 전에는 약간 뜻이 다른 환경예술(Environmental Art), 대지의 예술(Land Art) 같은 말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캐나다의 사진작가이자 예술이론가 캐루서(B. Carruther)가 유네스코 보고서를 통해 생태예술(Eco Art)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바 있다. 때로는 갤러리나 공연장을 뛰쳐나가 대지에서 행해지는 예술이라는 뜻으로, 때로는 자연의 지속가능성을 도모하는 실천적인 예술이라는 뜻으로 생태예술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사실은 그 이전의 용어들과 차별화된 개념을 뚜렷이 하고 있지는 못하다. 아직은 정착되지 않은 생태예술 용어의 역사를 이 자리에서 살피는 것보다는 앞으로 우리가 실천적으로, 이론적으로 생태예술의 세계를 창출해 나가고 정착시키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다.

 

 자연은 언제나 예술과 함께 존재해 왔다. 예술의 묘사 대상이 되기도 하고 예술 작품의 재료가 되기도 해 왔다. 나아가 자연은 작가와 작품이 직접적으로 만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세계로서 예술과 상호작용하는 친밀한 벗이다.

 

 자연을 구성하는 동식물과 무생물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움직여가는 세계를 생태계라 한다. 생태계의 이러한 관계들이 자연의 짜임새를 갖추게 하고 균형을 이루게 한다. 생태학은 자연의 생태적 짜임새와 움직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실용적으로는 자연의 지속가능성을 이루도록 하는 과학적 수단이 생태학이다. 한편 학문에서 더 나아가 사람들이 자연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사고방식이 생태학이기도 하다. 생태학적 사고란 자연의 한 부분에 매몰되지 않고 부분들이 서로 관계를 맺어 이룬 짜임새를 찾으며 균형과 성장의 움직임을 찾는 사고방식이다.

 

 생태예술에서의 자연은 단순한 묘사의 대상, 작품의 재료를 넘는다. 또한 단지 자연에 대한 앎이나 감성을 표현하는 것을 넘는다. ‘생태’라는 말이 잘 나타내듯이 생태예술은 작가와 작품이 자연과 직접적으로 만나고 새로운 생태학적 관계와 움직임을 창출하는 예술을 말한다. 자연은 예술이라는 문화의 한 세계와 소통하는 이웃 세계가 된다. 이 두 세계가 만나게 되면 자연만의 단독적인 자연생태계가 아니라 자연과 문화의 문화생태계가 이루어진다.

 


 필자는 「생태예술, 북미원주민 의례 속의 비의도적 구현과 현대사회의 의도적 실천」(무용역사기록학 36호, 2015)이라는 논문에서 버링거(J. Berringer)가 쓴 2001년 독일 한 작은 도시 Dreieich의 사례를 소개한 바 있다. 이곳을 흐르는 강은 한 때 심각한 물리적, 생태적 교란이 있었다가 다시 재생된 자연이었다. 이곳에서 예술가들이 강둑을 따라 연행(演行)을 벌였다. 강의 유기적 생명체계에 미학과 총체적, 명상적 아이디어와 연행 제스츄어를 갖고 접근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강둑을 따라 걷는 사이에 부토 무용수 한 사람이 인어 모양의 캐릭터를 하고 강물에 잠겨 반마일 가량 서서히 걸었다. 이러한 제반 행위들은 재생된 강과 강변의 생태계, 그 유동성과 자연적 성상(性狀)을 따르면서 인간의 움직임을 더함으로써 강을 인간과 연계되는 다른 세계로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2010년대 초 전북 남원 실상사에서는 사찰 건물을 더 짓는 불사(佛事)를 놓고 많은 논의들이 있었다. 이 때 지금은 작고한 건축가 정기용 선생과 건축가 조성용 선생 등이 불사를 단지 건물 짓는 것에 국한하지 말고 실상사 및 인근 마을들과 지리산 일대로까지 확대하고 마을들의 공동체 재생, 지리산 일대의 생태계 보존과 활성화로까지 넓힐 것을 제안했다. 마을들의 공동체 재생은 그 이전부터 실상사에서 추구되던 것으로 ‘마을불사’라 했다. 지리산 일대의 생태계 보존과 활성화는 ‘안성공동체’(眼城共同體)라는 새롭게 만든 용어로 설명되었다. 실상사에서 지리산 정상 천황봉까지가 육안으로 보여지는 공동체이고 그 공동체의 생명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이 불사라는 것이다. 인간이 수행하는 새로운 개념의 불사가 지리산 일대까지 미치고 자연생태계를 넘어 자연과 인간의 문화생태계로 바뀌어 인식된 사례이다.

 

 2012년 5월 19일 전남 무안군 용산리 갯벌에서의 연희들은 온 몸으로 갯벌 생태계 속으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갯벌의 영구한 보존을 기리는 매향(埋香)이라는 의례 후에 벌어진 현대무용을 보면 감성적 차원에서 춤꾼들이 갯벌을 만나고 그 속에 몸을 던져 갯벌과 인간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필자는 앞의 논문에서 당시 춤을 추었던 춤꾼들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한 남성 춤꾼은 처음에는 야외 갯벌에서 춤을 추는 것이라는 정도의 생각만을 갖고 현장에 임했다. 그러나 그의 경험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춤을 시작하기 전부터 경외(敬畏)와 같은 두려운 느낌, 종교적인 느낌이 들었고 줄곧 그 느낌과 생각으로 뻘흙에 앉아 가쁜 숨을 쉬었고 뻘흙 위를 뒹굴며 춤을 추었다. 연희가 끝나고 여러 날 뒤에 이 남성 춤꾼이 필자에게 들려 준 이 이야기는 단순한 갯벌 속의 춤 이야기가 아니다. 물리적인 갯벌을 넘는 어떤 세계를 느낀 것이다. 자연과학적으로는 갯벌과 주변 환경의 부분 부분들이 짜임새를 이루고 갯벌생태계를 이룬다. 그러나 이 춤꾼이 접한 갯벌생태계는 이러한 자연과학적 사실들이 아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어떤 ‘세계’이다. 그에게는 생태계가 자연과학적 실체를 넘어서 경외적인 세계 혹은 종교적인 세계처럼 느껴지며 그는 부분 부분들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그 세계를 맞고 자신의 몸을 그 세계 속에 진입시킨다. 그리하여 갯벌과 주변 환경과 춤꾼들의 몸이 어우러진, 새로운 문화 세계가 창출된다.

 

 생태예술은 예술가가 자신과 작품을 자연의 생태학적 흐름 속에 투여하고 그 전체성의 세계를 느끼며 새로운 문화 세계를 만들어가는 예술행위이다. 생태예술은 생태계를 깨닫고 느끼고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내는, 이해와 자각과 창조의 행위이다.

 

 

글_ 조경만(목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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