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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_ 춤비평 담론


2017년 1월
2017.01.31
현대무용의 추상성; 미디엄으로서의 ‘춤추는 몸’을 통해 구현되는

 종종 생각해보곤 한다, 형식 실험을 추구하는 무대예술가 여러분 가운데, ‘미디엄으로서의 몸’에 관한 인식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 자의식을 지닌 경우는 몇이나 될까? 왜 유달리 현대무용계에선, 현대적/당대적 실험의 가치를 역사화해서 교육하고 공유하는 일이 잘 이뤄지지 않을까? 현대무용의 뮤지엄을 만들기 어려워서? 현대무용사 책만큼 지겨운 것은 없기 때문에? 현대무용을 평론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이의 수가 몹시 적어서? 한국/현대/무용의 역사에서의 현대성과 당대성은 무엇이었는지, 또 후기-당대에 돌입한 현재, 현대무용은 어떤 가치의 (재)창출을 요구받고 있는지 담론하는 이를 찾기가 몹시 어렵다. 다원주의의 통치성과 결탁한 포스트모더니즘을 오독한 나머지, 타자성, 지역성 운운하며 하찮은 몸짓을 바탕으로 안무하는 서사적/감상적 경향이면 다 옳다고 착각하는 젊은이들도 많으니, 역사적 독해력을 상실한 이들끼리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상황이 퍽 우려스럽기도 하다.

 간단한 질문을 던지고 답해보도록 하자: 전후 현대무용에서의 추상성이란 무엇이었을까? (당신은 답할 수 있는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현대무용이 새로운 세계 질서에 맞춰 재전개되는 과정에서, 두드러졌던 ‘추상으로의 추동’을 되돌아보면, 의외로 추상성의 실체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부족했으며, 또 여러 인식론적 혼선이 빚어졌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양차대전 사이의 서유럽 현대예술계에서 대두했던 ‘자연으로부터 도출해낸 추상’, ‘정신적 추상’, ‘탈자연의 추상’, ‘기계를 의태하는 추상’, ‘산업자본주의에 비평적으로 대응하는 추상’ 등의 문제에 뒤늦게 화답하려는 욕망과, 물질이자 사건의 현장이자 동력원으로서 기능하는 몸을 재발견하는 현상학적 자각이, 동양주의적 선사상이나 극단적 아나키즘이나, 플럭서스와 상황주의 등의 아방가르드적 메소드와 근본 없이 뒤섞였다. 무대 위에서 경외와 숭고를 창출해내는 일에 초점을 맞춘 현대무용이 있었는가 하면, 자연주의적 모방의 동작을 극복하고 신체성에 연원하는 추상적 육체 언어를 계발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 현대무용도 있었다.

 예를 들어, 마사 그레이험(Martha Graham, 1894-1991)은 젊어서는 피카소와 초현실주의자 세대의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이 창안해낸 새로운 메소드를 총정리해낸 말년의 전성기 시절엔 자신보다 연배가 아래인 추상표현주의 미술가들의 성취에 큰 자극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무대를 캔버스처럼 이해하고 허공에 추상적 그림을 그리려는 충동을 잘 자제하지 못했다. (그의 의상 감각은 스키아파렐리에게 영향을 받았고, 공간 연출 감각은 호앙 미로 등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몸동작과 의상을 활용해 순간적으로 추상적 장면을 연출해내는 감각은 만 레이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에게 영향을 받았다.)

 전후 현대미술의 핵심이었던 우연성의 활용이라는 의제나, 공백을 작품의 핵심으로 제시하는 인식의 대전환이나, 테크놀로지와 육체 언어를 접목하는 등의 기초 과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구현해낸 현대무용계의 선각자는, 존 케이지의 평생 연인이었던 머스 커닝험(Merce Cunningham, 1919-2009)이었다. 유달리 너그러웠던 그는, 동세대와 인접 세대의 다양한 예술가들에게 고루 영향을 미치며 널리 협업한 것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반면, 폴 테일러(Paul Taylor, 1930-)는 로버트 라우션버그, 재스퍼 존스, 엘스워스 켈리 등과 교유하며 보다 진일보한 추상미술의 핵심을 받아들였고, 실재하는 동작을 ‘발견물(파운드 오브제)’처럼 취한 다음, 원래의 맥락과는 다르게 재구성해 안무하는 일에서 남다른 재주를 뵀다. 하지만, 그는 미니멀리스트로서 혁신을 추구하기보다는, 안일한 중산층의 미의식에 부합하는 아리따운 작품을 안무하는 안전하고 지루한 길을 택했다.

 그런데, 몸은 균질화와 변형이 불가능한 재료이기 때문에, 미니멀리즘이 대두하는 시기에 이르면 묘한 상태에 봉착하고 만다. 샐리 그로스(Sally Gross, 1933-2015)나 이본느 라이너(Yvonne Rainer, 1934-) 처럼, 무대가 아닌 일상적 공간이나 화이트큐브처럼 이해된 무대 위에서, 비예술적/일상적 동작을 포집하고 반복해 연속성에 기초한 추상성을 구현해낸 미니멀리스트 안무가들은, 이미 제도 비평적 장소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입은 상태였지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끝까지 명확하게 자각해내지는 못했다. (이본느 라이너는 애초에 기존의 현대적 춤—음악성과 운동 신경과 적절히 훈련된 건강한 몸을 요구하는—을 출 수 없는 머리와 몸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춤을 추자면, 보통의 몸으로 소화할 수 있는 작품—의식의 흐름을 따라 동작을 구축하는 방식의—을 안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균질화한 동작의 반복과 연속을 통해 현상학적 추상성을 가장 잘 구현해낸 안무가라는 현대무용사의 왕관은, 천재적 연출가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 1941-), 개념미술의 창시자 솔 르윗(Sol LeWitt, 1928-2007) 등과 협업했던, 루신다 차일즈(Lucinda Childs, 1940-)의 몫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로버트 윌슨과 마찬가지로 루신다 차일즈는 음악가들의 미니멀리즘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리적 현존의 미니멀한 추상성을 추구한 현대미술계의 미니멀리스트들보다는, 그 현상학적 자각의 초점을 과정의 수립과 유희로 옮겨놓았던 개념미술가들에게 더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사물과 육체의 비정상적 조우를 통해 제도 비평적 현존성을 구현한 이후로 그는, 시대의 총아로 대접받았던 동료 필립 글래스의 영향 아래, ‘전유된 요소들의 추상적 반복과 구축을 통한 영상적 서사성의 추구’라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때문에, 그는 미니멀리즘의 대표 안무가라기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개척자로 소개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역사적 요소와 이미지 요소의 전유와 활용, 그리고 서사성의 본격 회복과 타자적 육체와 육체 언어의 포용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적 가치는, 탄츠테아터(무용극)를 창시한 피나 바우쉬(Pina Bausch, 1940-2009)에 의해 보다 더 분명하게 구현됐다. 재창안된 혼성적 양식이라 할 수 있는 탄츠테아터가 국제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후, 아시다시피, 탈냉전 이후의 현대무용계에서 추상성의 추구라는 가치는 급속히 망각됐다.

 하면, 현대무용의 추상성을 기동시켰던 인식론적 전환이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한국현대무용의 역사에서 추상성은, 또 그와 짝은 이루는 인식론적 전환은, 언제 어떻게 어디까지 구현됐을까? 후자에 관해 내가 답하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전자에 관해서라면, 현대미술에서의 ‘수행적 몸’이라는 주제를 재고찰하기 위해서라도, 보다 진전된 논의를 전개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해선 추후 (정금형 작가론을 통해) 답을 제시해보도록 하겠다.


글_ 임근준(미술·디자인 평론가)
사진_ ⓒ Pina Bausch 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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