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_ 춤비평 담론
춤비평 담론은 오늘의 춤계에 필요한 내용들을 무용비평가들의 시각에서만이 아니라 타분야 전문가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코너이다. 그 첫 번째 인물인 문화정책 박사, 메타기획컨설팅 부소장 정종은의 글로 예술현상에 주목해보자. |
예술 개념의 진화 과정
고대 희랍에서는 시, 음악, 무용 등이 미분화된 상태로 실연되는 것을 ‘뮤즈에 사로잡혀’ 이루어지는 활동, 즉 신적 영감이나 광기와 연결되는 ‘뮤지케’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했으며, 반대로 회화, 조각, 건축 등과 같은 활동은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을 발휘하여 규칙을 발견하고 실행하는 ‘테크네’ 개념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후자에 속하면서도 건축은 회화나 조각과는 구별되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것은 그 일차적 목적이 감상이라기보다는 직접 ‘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이 『국가』에서 실행했던 이데아의 모방의 모방이라는 비난으로부터 건축은 어느 정도 자유로웠던 셈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존재론적 위상을 차지하고 있던 회화·조각과 건축이 한 가족으로 묶인 것은 바로 1550년, 메디치 가문의 오른팔이던 조르주 바사리(1511~1574)가 『르네상스 미술가 열전』이라는 저서를 통해 디세뇨(disegno) 개념을 주창하던 시점에 이르러서였다. 이 때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의 체계가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체계는 미술가의 머릿속에 떠오른 정신적인 이념을 손을 통해서 재현 또는 구현하는 활동을 토대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약 200년 뒤, 프랑스에서 계몽주의가 한참 창궐하던 1746년, 바뙤(1713~1780)는 『단일한 원리로 환원되는 예술』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아름다운 자연의 이상적인 모방이라는 원리가 회화, 조각, 건축 등 르네상스 이래로 디세뇨(disegno), 즉 미술이라고 불려온 조형적인 활동과 시, 음악, 무용 등 공연과 연계된 활동을 관통하는 원리라고 규정하고, 이러한 새로운 토대를 중심으로 시·음악·무용·회화·조각을 한데 묶는 새로운 개념을 주창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beaux arts / fine arts)’ 개념인데, 이에 근거하여 달랑베르는 몇 년 뒤 출간된 백과전서에서 ‘건축’까지를 포함하는 근대적 예술 개념 및 체계를 발전시키게 된다.
예술 이론의 변천 과정
이렇게 성립된 ‘예술’ 개념은 18세기 이후로 현재까지 크게 6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이론상의 주요한 변화를 겪게 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미학적 답변 중 가장 오래된 것이자 18세기 고전주의 시대를 풍미했던 이론은 다름이 아니라 모방론이다. 예술가는 이상적인 자연의 모방을 위해 고대의 전범을 따라 철저하게 규칙을 실현하는 과학자로 이해되었다. 프랑스혁명이 공포정치로 귀결되면서 널리 확산된 낭만주의 시대에는 모방론에 이어 표현론이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게 된다. 이 시대에는 예술가가 이성의 법칙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의 감정을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자율적이고 감상적이고 상상력이 뛰어난 천재의 이미지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추상예술이 발흥하면서 모방론과 표현론은 아포리아에 직면하게 된다. 클라이브 벨이나 그린버그와 같은 이론가들이 주장한 것은 예술가는 이제 이성의 법칙은 물론 감성의 표현이란 부담에서 벗어나, 예술 장르 및 개별 작품의 순수한 형식 또는 의미 있는 형식을 구성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형식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모방론, 표현론, 형식론이 일종의 본질주의적 접근을 취하면서 예술이 지향해야만 하는 것을 배타적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와이츠의 ‘예술정의불가론’ 이후에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색이 한결 복잡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가령 딕키는 기존의 예술이론들이 예술에 대한 평가적 정의를 추구해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기술적 정의, 그중에서도 예술계로부터 감상의 후보자격을 수여받는다는 예술의 비가시적인 본성에 주목하여 자신의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미학계에서 ‘제도론’보다 더 주목을 받고 있는 이론은 단토의 ‘다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단토의 주장은 아주 명쾌하다. 예술의 종언! 예술이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팝 아트의 등장과 더불어, 서구에서 존재해온 예술에 대한 고유한 믿음체계가, 다시 말해서 예술의 역사에 대한 내러티브가 붕괴되었다는 것이다. 예술을 재현적인 것으로 보고, 시간이 지나면서 예술이 ‘시각적 외관’의 정복에 더 능숙해진다고 보았던 ‘바사리 내러티브’, 그리고 20세기 이후 시각적 외관 대신에 ‘매체의 물질적인 고유성’을 추구하고자 했던 ‘모더니즘 내러티브’. 이러한 마스터 내러티브가 워홀의 팝아트 이후 힘을 잃게 되었으며, 기존의 ‘자격박탈의 역사(History of Disenfranchisement)’는 종말을 맞았다는 것이다.
예술의 종언시대, 예술가의 세 가지 선택지
그렇다면, 이제 ‘예술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술의 종언시대, 보다 정확히는 예술에 대한 규범적인 내러티브의 종말 시대에는 예술가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 이제 예술은 유일한 예술적 가치라는 의미에서의 ‘미’ 또는 ‘미적인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선, 진리, 감정, 형식, 매체의 본질을 제시하려는 강박에서도 벗어나 다양한 목적을 위해 다양한 양식을 활용해도 좋다. 같은 이유로 다원론 시대의 예술은 이전과는 다른 비평을 요청하는바, 예술이란 이러저러해야한다는 배타적 내러티브에 입각한 이론적 반성에 머무르는 대신, 이제는 각각의 작품들이 추구하는 목표와 의미와 구현방식에 대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해명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다원론의 시대에 전문적인 예술가가 취할 수 있는 유력한 선택지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유형화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 전통적인 방식의 탑다운 관점을 고수하면서, 근대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가의 권위’를 지속적으로 확보·확장하려는 전략이다. 전통의 계승이 나쁜 것인가? 물론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시대와는 달리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노오력’이 요구될 것이나 다른 직업인들이나 아마추어 예술가들이 범접하기 어려운 기술과 기교와 철학을 바탕으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고 존경을 받으며 살겠다는 선택은 합리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로는 대중사회를 넘어 초연결사회(hyper-connected society)로 나아가고 있는 현 시대에 걸맞게 일반 대중과 직접적으로 호흡하면서 하고 싶은 예술작업을 해나가며 풀뿌리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바텀업 관점의 선택지도 가능하다. 하지만 IPTV, 모바일 플랫폼 등을 통해 대중의 눈/귀/마음을 사로잡는 콘텐츠가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아프리카 TV’에서 별풍선을 수집하는 BJ들과 경쟁할 배짱이 없는 예술가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성공’이 아니라 ‘행복’을 목표로 삼고, 글로벌이나 내셔널보다는 로컬에 집중하면서 역사적 창조성(historical creativity)을 발휘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탑다운과 바텀업의 절충형태로서, 미들업다운 관점에서 자신의 활동을 설계하는 선택지가 존재한다. 성장이냐/분배냐, 경쟁이냐/협력이냐의 이분법을 벗어나야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하듯이, 기존의 예술계와의 ‘고급진’ 협업이야 당연히 최우선적으로 추구해야할 활동이지만, 그 외에도 콘텐츠산업이나 관광산업과의 연계,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 등 지역사회 활동에 대한 참여 등 위/아래로 언제든지 운동할 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물론 ‘미들랜드’에 이러한 거점을 마련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향후 예술의 가치와 잠재력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실험들은 아마도 이 지점에서 태동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 그렇다면 당신은 이상의 선택지들 중에서 무엇이 가장 마음에 드시는가? 물론 마스터 내러티브의 종언 시대에 정답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글_ 정종은(메타기획컨설팅 부소장)
소개: 정종은은 서울대학교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영국 글래스고대학교에서 문화정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메타기획컨설팅에서 knowledge본부 부소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서울대학교 미학과와 숙명여대 행정학과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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