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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_ 일본 공연예술의 현재


2017년 2월
2017.03.27
할 말이 많은 연극 〈흰 꽃을 감추다(白い花を隠す)〉
 요즘에는 우연치 않게 많은 말들과 접하고 있다. 소설과 같이 대사가 장황한 희곡을 몇 편이나 읽었고, 최근 번역한 대본이 굉장히 많은 말들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특히 수다스러운 사람 중에는 설명적인 어조로 상대방에게 전적으로 이해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몇 마디 문장밖에 힌트를 주지 않아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가라고 골몰히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연극에서도 가끔 이런 것들을 느낄 때가 있다. 어떤 사건들을 말로 설명하여 관객에게 완벽히 그 상황을 이해하게 만드는 연극이 있는가 하면, 어떤 시적인 이미지가 주가 되어 관객에게 많은 상상을 요구하는 연극도 있다. 둘 다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시하라 낸(石原燃) 원작, 극단 P컴퍼니(Pカンパニー)의 연극 <흰 꽃을 감추다>는 ‘종군위안부’라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다룬다. 내용면에서는 종군위안부에 관한 다큐멘터리 제작 회사의 사람들이 부딪히는 갈등과 한 가족의 갈등이라는 두 이야기가 맞물려서 진행된다. 이런 내용의 구조상 이 작품은 ‘종군위안부’라는 민감한 테마를 보통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로 풀어낸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규모 다큐멘터리 제작 회사에 TV 다큐멘터리 제작 의뢰가 들어온다. 그 내용은 과거 일본군에게 피해를 입은 종군위안부제도를 재판하는 법정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제작 회사 사람들은 종군위안부 피해자들이 법정에서 한 증언을 바탕으로 역사적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성실하게 작품 제작에 임한다. 그런데 방송 예정의 방송국에서 지속적으로 내용을 변경해 달라고 요구하고, 급기야는 재판에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인사를 등장시켜 다큐멘터리 자체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려 한다. 제작 회사 사람들은 그런 방송국의 의도에 의아해하면서도 어떤 큰 압력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제작 회사의 간부인 ‘오오토모’는 다큐멘터리를 다른 사람이 날조하게 만드는 것보다 수정 지시를 받아들여 자체적으로 수정하는 것이 낫다며 부조리한 상황을 받아들인다. 개인적으로는 전에 회사 동료였던 한 ‘여성’과 결혼을 앞두고 있었으며,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그녀는 오오토모가 자신과 아이를 위해 부조리한 상황에 맞서는 걸 반대하고 견뎌내라는 입장이었다. 결국 다큐멘터리의 한 스텝은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조리한 상황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회사를 그만 둔다. 오오토모의 아이가 태어나고 사건에서 일 년 정도가 지난 어느 날, 그는 회사에서 독립해 아내가 경영하는 찻집에서 연출가와 미팅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TV에서 당시의 다큐멘터리 날조와 관련, 해당 방송국의 ‘관계자’가 당시의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 압력이 있었음을 털어놓는다. 방송국 관계자는 당시 왜 고백을 하지 못했냐는 질문에 자신의 가족을 길바닥에 나앉게 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오오토모는 TV를 보고 뭔가 깨달은 것처럼 괴로워하다가 아내와 아이를 남겨둔 채 집을 떠난다.

 이 작품은 실제로 2001년에 NHK에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 자체가 굉장히 설득력이 있다. 가족과 주변 상황을 위해 부조리한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 오오토모의 갈등을 중심으로, 자신의 언니와는 달리 지금까지 자신의 상황에 반항하지 못한 채 받아들이기만 해 왔던 아내의 갈등이 더해진다. 그녀가 경영하는 찻집에 거의 매일같이 등장하는 한 노인은, 종군위안부 피해자를 자진해서 협조한 사람들로 매도한다. 이 인물을 통해 작가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일본에 꽤 많다고 알려주려는 의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 2017년 2월 7일자)과의 인터뷰에서 “피해자의 증언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고도, 우리들의 문제로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조직 속에서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은 건 가족의 관계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과 가까운 문제로 생각해 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런 작가의 의도는 작품을 보면서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고 나서, 이 작품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무언가를 좀 더 말하고 싶어 한다는 걸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공연 속의 말들은 넘쳐난다고 할 만큼 너무도 많았다. 어찌 보면 TV드라마를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수다쟁이의 많은 말을 듣고 나서도 우리는 많은 걸 생각할 수 있지만, 말들이 함축하는 몇 개의 이미지만으로도 우리는 좀 더 풍부한 말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 연출적인 면이라고 나는 지적하고 싶다. 두 가지의 갈등, 그리고 부조리적 상황을 연출이 말만이 아닌 어떤 다른 연극적 장치로 보여주었다면 이 연극이 좀 더 풍요로워지지 않았을까. 이런 사회적인 주제를 다룬 연극이, 논쟁적인 테마를 ‘말’이라는 평범한 요소로만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 특히 연극에서는 재판이 벌어진 시간적 경과를 자막으로도 보여주는데, 그건 굉장히 설명적인 어조로 느껴졌다. 할 말이 많은 연극. 그 할 말을 말로만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그 할 말을 좀 더 풍요로운 연극적 장치로 보여줬더라면, 한 관객으로서 더 많은 것들을 상상했을 것이고, 극장을 나와서도 또 다른 이야기로, 장면으로 연결되지 않았을까.

 얼마 전에 일본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공연된 <시간의 저편>(이재상 작/연출)이라는 연극이 있다. 이 작품은 한 교수의 실종 사건을 중심으로 그 교수가 자진해서 집을 나갔으며, 그것이 자신이 인식하는 다른 세계로 넘어간 것이라는 내용의 연극이다. 내레이터 역으로 교수의 친구이자 ‘작가’인 남자가 등장한다. 이 연극 역시 작가의 의식적인 흐름을 굉장히 넘쳐나는 말들로 그려낸다. 이 연극의 내용을 표현하는데 그 말들이 전부 필요한 것인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그런데 이 연극에서는 ‘마술’ 장면을 삽입해, 그 장면이 이 작품의 핵심적인 요소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 작품의 다소 신비적인 분위기, 그리고 ‘자신이 인식하려는 것만을 인간은 인식할 수 있다’라는 작품의 주제가 이 마술 장면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며, 관객에게 사고를 확장시킨다. 관객은 연극 안에서 많은 말들로 설명되는 사건의 경위보다 이 한 장면을 통해 더 풍부한 것들을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건 개인적인 취미일 수도 있겠으나, 말로 넘쳐나는 연극보다 이미지, 행위 등의 여러 가지 연극적 장치가 힘을 발휘하는 연극이, 좀 더 연극적이라고 느껴진다.


글_ 심지연(부경대학교 강사/일본 동경대학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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