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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017.07.02
젊은 희곡과 젊은 연극 방식이 빚어낸 〈망각하는 일본인〉


 위의 포스터 사진을 보면, 여러 가지 크기의 글자들이 혼란까지는 아니더라도 질서정연하지 않게 나열되어 있다. 이 공연의 제목은 포스터상에 큰 글자로 쓰여진 <망각하는 일본인(忘れる日本人/THE JAPANESE, WHO FORGET)>. 단어들이 질서정연하게 연결되지 않은 것처럼, 이 연극은 작가에 의해 쓰여진 희곡 속의 언어들이 연출가에 의해 해체되어, 어떤 논리적인 연결고리를 이루고 있지 않다. 신진 극작가 마쓰바라 슌타로(松原俊太郎)가 쓴 희곡 역시 그리 질서정연하지는 않다. ‘기대와 망각’이라는 주제를 짊어진 남녀, 그리고 각각의 인물들이 그리 개연성 있는 스토리를 연출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희곡은 공연일까지 전부 발표되지 않은 연재 희곡으로, 관객은 원래 스토리를 모른 채로 관극에 임해야 했다.

 극장의 선전 문구는 다음과 같다.

의자 없는 방, 출구가 봉쇄된 공원, 언덕 중간에 위치한 우리집...
결코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세 곳의 장소, 세 개의 시간
언제나처럼 포퓰리즘, 안녕하세요 전체주의, 동시다발(하는) 우둔함, 아아 이데올로기...
매직미러로 빙 둘러싸인 ☓같은 바로 지금
우리와 당신 사이에 <애정>이 가능할까
침묵하지 않는다. 손을 놓지 않는다. 희망 같은 말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
기대와 망각이 만들어내는 리듬을 타라! 
(가나가와 예술극장 홈페이지 kaat.jp 참조)

 이 말들은 무엇보다도 공연의 내용과 분위기를 잘 표현해낸다. 스토리와 언어를 해체한 이 연극에서 배우들이 말하는 대사로 작품의 스토리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배우들은 가끔씩 굉장히 비판적이고 래디컬한 말들을 빠르게 내뱉는다. 그리고 다시 누군가의 인생으로 개입하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비일상적인 세계로 넘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극단 치텐(地点) 특유의 높낮이가 다른 발성으로 내뱉는 대사들, 배우들은 어떤 철학적인 사유의 세계로도 한 발을 내딛는다.

 극단 치텐은 지금까지 고전 작품을 다수 무대에 올려 왔다. 근대 연극의 대표 작가인 체호프의 작품을 올리면서도 당시의 리얼리즘 연극을 수용하지 않는, 거부하는 듯한 참신한 스타일을 선보였다.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이 극단이 도쿄(東京)에서 발신하는 연극을 처음 접한 것이 체호프의 <벗꽃동산>이었다. 그리고 연속해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올렸다. 이번 작품 <망각하는 일본인>이 극단 치텐의 연출가인 미우라 모토이(三浦基)가 연출하는 ‘일본 작가의 작품’을 처음으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이 작품 이후 교토로 돌아가 이들은 또 다시 근대 연극의 아버지인 헨릭 입센의 <헤다 가블러>를 공연했다.

 이 극단의 공연에서 특별한 재미를 느낀다기 보다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참신함이 호기심을 유발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망각하는 일본인>은 관극하기 전부터 그런 종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번엔 고전이 아닌 일본 작가의 작품인 데다가 젊은 작가의 어찌 보면 노골적일 수 있는 언어 표현을 연출가 미우라 모토이는 어떤 식으로 풀어낼까. 고전 작품과는 어떤 점이 달라지게 될까... 도쿄에서는 아니지만, 이미 미우라 모토이는 마쓰바라 슌타로의 처녀작을 자신의 연출로 공연한 적이 있다. 왜 이 연출가는 이 작가의 작품을 연출하게 된 것일까...

 무대는 전과 같이 큰 사각형으로 둘러싸여 있다. <벛꽃동산>에서는 1엔 짜리 동전으로 사각형을,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사각형의 하얀색 사면을 무대로, 이번에는 줄로 무대를 크게 사각형화했다. 그리고 정중앙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배가 지지대 위에 놓여 있다. 배우들은 그 배를 올라타기도 하고 배 주변에서 움직이기도 하고, 들어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각각 다른 일본인들을 형상화한 의상의 배우들이 무대를 누빈다. 이 극단의 배우들은 항상 움직임이 독특하다. <벚꽃동산>에서는 거의 앉은 채로 연기를 하는가 하면, 같은 움직임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손과 발을 바닥에 댄 채 허리를 들고, 다리만을 앞 뒤로 움직이는 동작을 보통 사람들이 걷는 것과 동일하게 공연 내내 반복한다. <망각하는 일본인>에서는 발을 바닥에서 떼지 않고, 발가락으로 움직이며 이동하는데, 이 동작도 공연 내내 반복된다.

 무대의 방식, 배우들의 독특한 동작, 발성 등등 그건 모두 극단 치텐의 것이었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아 온 무대와 비교해 무엇보다 눈에 띄는 점은, 배를 항해시키기 위해 들어 올려 이동시키는 장면에서 관객들을 참여시킨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치닫는 이 장면에 도달하기까지 극단 치텐의 공연들이 그랬던 것처럼 해체된 언어를 비일상적인 발성으로 내뱉는 배우들의 대사와 독특한 움직임의 반복에 조금 관객들은 익숙해져 있다. 사회 비판적이고 래디컬한 대사들이 가끔씩 자극을 주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요소들이 반복된다면, 조금 지루해하는 관객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배를 들어 올려 항해 준비를 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참여하면서 공연의 분위기는 다시 고조되는데, 이 분위기의 되살아남, 또는 가장 흥미진진한 이 장면을 통해 공연은 전체적으로 좋은 균형을 잡게 된다.




 지금까지 공연된 극단 치텐의 공연 중에서 이런 균형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이런 균형감을 접하고 공연 후에 만족감을 마음에 담고 극장 밖으로 나섰다. 이런 균형감은 과연 관객을 참여시킨 연출법만으로 달성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마쓰바라 슌타로라는 작가의 언어가 중간 중간 주는 자극이 일조한 것이었을까. 당연할 수 있지만, 이 둘 다였던 것일까... 이런 생각들이 뇌리를 스치면서, 극단 치텐의 다음 작품에 기대 또는 호기심이 생겨났다. 다음 작품에서는 또 어떤 참신함을 보여줄 것인지. 이번에 달성했던 연극으로서, 작품으로서의 좋은 균형감 외에 또 다른 어떤 만족감을 이 극단을 보여줄 것인가...

 이번 작품은 사회를 향한 소란스러운 외침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건 젊은 작가의 감각이었을 것이다. 그런 소란스러운 외침을 무엇보다 잘 형상화낼 수 있는 극단이 치텐이 아니었을까. 젊은 감각의 작가와 젊은 감각의 연극 방식이 만나 이뤄낼 수 있는 알맞은 조화를 보았다는 뿌듯함을 이 공연으로 인해 느낄 수 있었다. 


글_ 심지연(부경대학교 강사, 일본 동경대학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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