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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_ 세계 공연에술의 현재


2019년 1월
2019.02.26
생태예술이 품고자 하는 것, 바인즈 아트 페스티벌의 두 번째 이야기

생태예술(EcoArt)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관련된 개념들을 정리한 바 있는 베스 캐루서(B. Carruth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태예술은 단순히 환경에 관한 혹은 환경 속에 있는 예술을 뜻하지 않는다. 생태예술은 생태계의 안위, 인간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들에 대해 맺는 관계들, 우리와 장소를 공유하고 있는 종들과의 관계 등을 거론하는 작업이다.”


  베스에 의하면 생태예술은 또한 특정한 예술 매체에 고착되지 않는 매우 융통성이 있고 적응적인 장르이다. 생태예술의 관건은 그 안에 내재된 어떤 원리, 이론 같은 것이지 수단적인 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몸짓, 동식물체, 벽화, 디지털 매체, 인공지능 등등 매체와 방법에 매몰되고 그 기술적, 도구적 디스플레이에 매몰되곤 하는 작금의 풍토를 새겨보고 반성하게 하는 언급이다. 생태예술은 자연세계의 펼침과 운행, 자연과 인간관계를 표현하고 실현하고 개혁하며, 생태계 속의 인간 존재임을 느끼게 하고 성찰적, 실천적 행위를 유발하는 데 목적을 둔다. 그러다 보니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듯이 지고의 자연과학적 상태는 지고의 예술적 상태임을 실천으로 보여주면서 자연과학과 예술 그리고 이를 담지하고 가동시키는 사회와 문화를 넘나든다. 인터디시플리너리(interdisciplinary)라는 용어는 지식세계에서는 학제적임을 뜻하지만 생태예술에서는 세상과 인간의 원리들이 구체적 사물과 행위 속에서 서로 통하고 연결됨을 뜻한다. 그것도 사물과 행위를 통한 예술적 구현, 감성적 응축과 표출에 나타난 원리들의 연결과 자각과 성찰을 뜻한다. 인간중심주의가 아니기에 생태예술은 자연 속 인간의 전체 망 속에서 이를 구현하고자 한다.


  바인즈 아트 페스티벌(Vines Art Festival)은 그냥 보면 참 엉성하고 소박한 동네잔치이다. 이 페스티벌에서는 학예회하는 수준으로 시낭송도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나무에 소원지도 붙인다. 물론 그 소원지가 자연에 대한 자신의 시적 감수성이나 작금에 큰 걱정거리가 되는 송유관 가설에 대한 저항, 대지, 강, 바다 관점에서의 저항과 사회적 담론을 담고 있다. 음악, 낭송, 몸동작을 매개로 사물에 대해 한번 더 걸러낸 사고 투여이기는 하다. 그러나 엉성하기는 엉성한 이벤트이다. 젊은이들이 많은 축제인지라 연희자도 관객도 곳곳에서 힙합을 즐긴다.

 



2018년 8월 9일, 다운타운 이스트 항구 주위 크랩 파크(Lek’lekí)에서의 다민족 청년 힙합. 현대무용가 마리사 골드가 이끄는 난장. 사진은 바인즈 아트 페스티벌 웹페이지에서 인용.


  하나하나의 행사나 설치미술을 보면 세련되거나 세상 말로 엣지(edge)가 있는 것은 없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든 표출방식이 자기를 향하거나 자아에 대한 위무이거나 자기 현시적인 것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어떤 고정 관념을 자기 언술이나 행위에 들씌우는 것도 찾기 힘들다. 4년된 이 축제의 최근 2년을 지켜보니 매해 무려 10여 일 동안 5-6개 장소에서 개인 발표자와 팀을 합쳐 70여 팀이 평균 1회 반복을 하니 거의 150개의 공연, 설치미술, 스토리텔링과 구술 회의가 벌어진 셈이다. 마지막 이틀 동안 트라우트 레이크에서 열리는 축제를 보면 5-6개의 나무 그늘과 호숫가에서 프로그램에 따라 장소를 바꿔가면서 연희가 벌어진다. 그 전에 열리는 행사는 생태예술의 발상지인 다운타운 라운드하우스 커뮤니티 야외, 수십년 역사를 가진 그랜빌 아일랜드, 본래 원주민 구역이었던 주택가 숲과 바다 키칠라노 비치, 다운타운 이스트 으슥한 거리 뒤편 선창가의 크랩 파크, 그리고 바다 건너 스쾌미시 원주민사회의 토착식물 정원 하모니 가든에서 열린다.





라운드하우스 커뮤니티 센터에서의 공연, ‘모든 몸 부위들로 춤을, 안식처 이야기’(All Bodies Dance-Sanctuary). 몸속의 공간을 어떻게 유지하고 변환시킬 것인가? 이 변환을 통해 움직이는 몸들과 도시 공간의 움직이는 몸체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Allbodiesdance 무용단이 안식처와 자아의 관계, 공공 공간들에 깃드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살피는 연행을 벌였다. 바인즈 아트 페스티벌에 제출된 작품 의도 참조. 바인즈 아트 페스티벌 웹페이지 수록 사진 인용.



  이곳들에서는 각기 한 장소에서 트래킹도 하고 한 곳에 모여서 연희를 한다. 그랜빌 아일랜드는 낡은 공장지대 건물을 그대로 두고 갤러리, 극장, 무용학교, 파머스 마켓, 선구점, 선착장, 해변 호텔, 그리고 미디어아트, 설치미술, 회화 등으로 특화된 에밀리 카 대학교가 들어선 곳이다. 100여 개의 예술 전문 공연장, 갤러리, 아트숍, 학교들이 공장건물을 그대로 리모델링해서 쓰며 야외미술로 특화된 비엔날레도 거대한 시멘트 공장 탑들과 인근을 이용해 벌어지는 곳이다. 수십 년 역사를 지닌 이곳은 인접한 바다와 공장 건축물의 리모델링과 예술시설, 수많은 점포와 음식 코너들로 채워진 파머스 마켓으로 예술과 관광을 동시에 끌어내는 명소이다. 프린지 페스티벌도, 국제 무용제도, 연극제도 여기서 열린다. 이곳에 관한 역사 서적과 장소 창출에 관한 논문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 그랜빌 아일랜드에서 수십 년 전부터 조성된 공장건물 아트 벙커나 극장, 갤러리, 숍들은 그저 펑퍼짐하게 내어밀어 놓고 이 사람 저 사람 스쳐 지나며 허름하게 하루를 즐기게 한다. 이리 오너라 저리 가거라 하는 법 없이, 의식적으로 무얼 자꾸 고취시키려는 것 없이 그야말로 여기저기서 자유롭게 향유하게 만든다. 선구점, 선구 제조장, 예술 공방, 화구점, 직조와 공예품점이 무척 많은데 그랜빌 아일랜드의 이 도시재생은 이곳에 맞는 생산과 유통이 일어나고 경제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한다. 값싼 임대료를 오랜 세월 그대로 유지하기에 이곳은 예술가가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랜빌 아일랜드 다리 밑 옛 공장 길거리를 쌈지공원으로 만든 곳. 여기에 원주민 전통의 연어와 담요 디자인을 입혀 해마다의 페스티벌 길목으로 삼았다.



  바인즈 아트 페스티벌에서는 2018년에 옛 창고를 주차장으로 쓰는 곳 한 코너 쌈지 공원과 주차장 내부에 북미 북서부 원주민 디자인의 상설 설치물을 만들고 ‘인간 몸과 공간 이동’에 관한 실험 연희를 했다. 그 설치물과 행위가 그랜빌 아일랜드의 컨셉에 그대로 녹아들었기에 이 축제가 이곳의 방점을 찍은 셈이 되었고, 이는 가을, 겨울에 이어지는 각종 축제와 무용제, 연극제 등에 기여하는 연계 포인트가 되었다. 그랜빌 아일랜드는 여름이면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밀려든다. 그렇기에 바인즈 아트 페스티벌의 작은 한 행사라도 스쳐 지나는 관객은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의 행사는 경우가 다르다. 트라우트 레이크의 본 행사에는 하루 종일 오가는 관객이 대략 200여 명 정도이다. 일반인들은 피크닉을 겸해서 오며, 유랑하는 청년층들은 행사 후에 자신들 판을 벌리러 온다. 본 행사장 외 다른 곳들에는 사오십 정도의 사람들이 찾는다. 여름철 하루에 수십 개의 축제와 예술행사가 일어나는 광역밴쿠버에서 곳곳이 관객을 나누어 갖기에 바인즈 아트 페스티벌도 그 정도의 숫자이다. 생태예술 축제인만큼 꽤 관심이 있고 자연에 대한 의식적 경험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정도이다. 동성애 축제 프라이드 페스티벌이 다운타운을 가득 메우는 것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처럼 개최일수도 많고 장소도 많으며 프로그램 진행 숫자도 150회가 넘는 이 축제, 그러나 아주 소소하게 모이는, 그리고 진행도 엉성하고 세팅도 허름한 이 축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주 한참 동안을 이 문제를 갖고 헤맸다. 개개 작품이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를 넘어서 이 축제 전체가 사람들에게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했다. 많은 이들이 모이게 사람들에게 격문을 보낸다든지 연줄을 타고 홍보를 하지도 않는 축제, 요즘 사람들에게 선명한 하나의 킬러 콘텐츠를 던져 끌어들이려 하지도 않는 축제, 자원봉사와 기부에 대한 홍보 정도로 만족하고 되는대로 벌이는, 그러나 엄청나게 긴 기간 동안 하루에 2-3시간씩 행사를 벌이고 마지막 하루에 종일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축제이다. 축제의 핵심인 장소적, 시간적 집약성을 외면하는 축제이다. 왜 그럴까?


  이 의문을 풀 실마리를 이번 겨울 하루 이틀 전에 얻었다. 그간 헤매다가 겨우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축제와는 상관없는 별개의 워크숍에서였다. 노스 밴쿠버의 아스펜, 시더, 덤불, 연못, 습지로 들어찬, 야생조류 트러스트라는 곳에서 시즈 위스(Cease Wyss,T‘uy’t’tanat)가 워크숍을 했다. 그녀는 스쾌미시(Squamish) 원주민, 스똘로 원주민, 메티스 원주민, 하와이안 원주민 그리고 스위스인 혈통을 이어받고 밴쿠버 이스트에 살면서, 스쾌미시 원주민사회 내에 작은 커뮤니티 가든을 운영한다. 2018년 여름 바인즈 아트 페스티벌에서는 그녀가 운영하는 커뮤니티 가든에서 일대의 바닷가, 강변까지 토착식물 필드 트립(field trip)을 맡아서 했다. 이 트립은 모여서 예술행사를 벌이는 것의 바탕이 되는 일이다. 곳곳의 땅을 밟고 산야의 동식물과 대지를 느끼고 학습하는 길놀이들이 깔려 있다. 그녀는 밴쿠버 일대에서 널리 알려진 자생적 민족식물학자(ethnobotanist)이고 특히 연안 샐리쉬 어족(語族) 원주민 식물학자이다. 또한 연안 샐리쉬 기법의 양털짜기, 시더나무 껍질 짜기 공예가이며 뉴미디어, 인터디시플리너리 예술가, 커뮤니티 예술가이기도 하다. 근래에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곳곳에서 옛날 방식의 벌 기르기, 벌의 보존과 벌을 테마로 하는 시각예술이 성행한다. 벌은 꽃가루를 나르고 수분을 시키며 식물이 지속가능하게 하는 자연과학적 역할을 한다. 동시에 사람들에게 생태계의 메신저로서, 생명의 촉매자로서, 생명의 서식, 회유 주체로서 살아 숨쉬고 웅웅거리는 생태계를 창출해내고 사람들에게 생태계의 이해와 실용적 이용과 감성적 향유를 제공해주는 과학적, 예술적 작동자이다. 시즈 위스는 커뮤니티 가든에서 벌을 기르고 벌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하는 원주민으로 페스티벌 필드 트립에서도 벌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그녀가 2019년 1월 29일 토착식물과 생태계에 대한 워크숍과 필드 트립을 했을 때에는 우연히도 바인즈 페스티벌의 의의나 의미에 대한 실마리를 주었다. 트립 도중 숲 속 한 곳에서 그녀가 멈춰섰다. 5-6년생쯤 되어 보이는 작은 시더나무 한그루와 몇 종류의 작은 베리 나무들이 있는 곳이다. 위스가 이번 겨울에 주목한 것은 아주 어린 시더이다. 그것을 놓고 그녀는 조상 이야기를 했다. 꼭 이만한 작은 나무가 백인과의 접촉 당시에 있던 것이 지금 시내를 덮는 거목들이다. 조상 대대로 시더 나무껍질은 옷감과 바구니와 모자의 재료였고 나무그루는 토템과 카누의 재료 그리고 나무 속에서 조금씩 떼어내는 판자는 집의 건축재료, 잎사귀는 혼을 씻기는 종교 도구이고 잎사귀 태운 것도 종교도구이다. 시더는 몇 세대의 조상 이야기를 해주며 바로 지금 앞의 작은 시더가 앞으로 오랜 세월을 흐르면서 조상-자손의 혈통을 표현할 것이다. 어린 시더나무 가지와 잎의 형상에서 생생력과 인간관계를 본다. 나이 먹은 시더는 가지와 잎이 아래로 쳐져 있지만 어린 시더는 잎을 지탱하고 있는 가지가 하늘을 향한 작은 손바닥 같다. 그것은 새롭게 생명력을 불러일으킴이고 감싸 안음이다. 작은 가지와 잎이 부드럽게 허공을 감싼다. 그걸 조상 때부터 배워서 모든 원주민들이 손등을 밖으로 하고 손가락들은 하늘을 향하며 두 팔이 부드럽게 감싸 안는 몸짓을 한다. 이것이 환영과 포용의 몸짓이고 원주민의 모든 일의 시작, 만남의 시작은 이 몸짓부터이다. 이 몸짓이 춤의 발단이기도 하며 그것은 만물을 감싸 안는 것에서부터 의례나 행사가 시작되는 것임을 알게 한다.





2019년 1월 29일, 위스가 팔과 손의 동작, 어린 시더나무 가지와 잎새 모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오른쪽 사진은 그녀가 토착식물로 가꾸는 정원. 옛날 방식의 벌 기르기도 한다. 벌이 도시 전체의 식물에 수분을 하고 생태계를 유지하기에 벌 기르기와 벌을 테마로 한 생태예술이 북미 곳곳에 발달해 있다. 맨 오른쪽 사진은 2018년 8월 바인즈 아트 페스티벌 웹사이트 수록본.



  시더 가지와 잎의 형상, 그것의 포용력, 어린 나무의 생생력, 그것이 가진 인간 사회의 불러 일으킴 이것들이 자연물로부터 인간사회와 춤에 이르는 멀티디시플리너리의 연속이다. 하늘을 가리는 숲 천정에서부터 나무등걸의 지의류 식물, 바닥의 덤불과 풀과 동물들이 하나의 생태계이다. 허클베리는 꼭 시더나무 옆에 있을 때 잘 자란다. 시더나무의 포용력 때문에 만물이 함께 사는 것이다. 인사 예법에서부터 춤과 의례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구성원의 연설에 대한 답례까지 모두 시더로부터 배웠다. 대략 이런 내용으로 생태학적 인식에서부터 사회구성원의 관계에 대한 인식 그리고 미적, 종교적 인식까지가 이 시더나무 문화복합(culture complex)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위스의 이 말로부터 비로소 바인즈 아트 페스티벌을 이해할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페스티벌에서는 시더나무 그늘들이 주요 장소가 되고, 연행이 진행되는 장소적 포인트가 되며 특히 원주민 연행에서는 그 가지와 잎새가 몸짓과 스토리텔링의 테마와 제재가 된다. 그전에는 원주민사회에서 흔히 보던 몸짓, 페스티벌에서 보던 몸짓의 유래를 몰랐다. 그러다가 위스의 말을 들으며 페스티벌을 생각했다. 페스티벌을 보면 많은 원주민 연희들이 연안 샐리쉬어로 ‘오 존중하는’(O Siya:m)이라는 말과 두 팔을 벌린 몸짓에서 시작된다. 시민들, 여러 민족집단 구성원들이 익숙하게 이를 받아들이고 그들 스스로가 익숙한 몸동작인 양 행한다. 축제 마지막 날은 마무리 의례로 되어 있다. 이 의례에서도 여러 민족집단 연희자들과 시민들이 원주민 몸짓에서부터 시작하며, 2018년 여름에는 여럿이 ‘무엇이 이 땅에서 내 생애 속으로 들어오고 경험되고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특히 8월 13일에 있었던 지적 장애 스토리텔링 참여자들이 질곡과 환경으로부터의 신체와 정신 풀림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러한 이야기하기 방식은 단순한 서술을 넘어 의례적 언설과 같은 것이었다. 이어 일어서서 둥그렇게 원을 그린 사람들 하나 하나를 몇몇의 연희자들과 원주민 원로들이 방문하면서 시더나무 잎사귀와 행사기념 장식물을 전했다. 사람들은 두 팔을 벌리고 이들을 맞고 포옹했다. 마지막 절차는 축제를 이끈 이들에게 원주민 담요를 걸쳐주는 것이었다. 이 일련의 행동들을 보면 아주 간단한 팔과 손의 몸짓이 그리고 시더가 축제 전반의 지배적 상징(dominant symbol)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생태학적, 사회적, 미적, 종교적 원리 같은 것들이 뭉쳐진 핵심적 상징으로서, 사회적 포용의 상징으로서 그리고 멀티디시플리너리의 인식 세계를 이끄는 의미 발화체로서 이것들이 있었다. 바인즈 아트 페스티벌의 연행과 사물들은 이 작은 상징들이 발화하는 의미들의 품 속에 있다. 시민들이 딱히 각각의 상징물을 지시적으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들이 조성하는 전체적 분위기와 감성을, 생태계로부터 자아로까지 연결되는 뭉뚱그려진 문화복합체의 포용성을 향유하려 한다. 


  한편 시더만큼이나 사람들에게 상징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영토’라는 개념이다. 영토는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심리적인 ‘포용’을 뜻하고 있다. 몇 가지 컨템포러리 콘텐츠들을 제외하고는 스토리텔링, 연극, 시낭송, 춤, 설치미술, 걸개그림 등 상당수가 ‘누구에게도 양도된 바 없던, 빼앗긴 영토, 머스퀴암(Musqueam), 스쾌미쉬, 써릴-와터스(Tsleil-Waututh) 사람들의 영토들에서’ 열리고 그 땅이 안아주고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담는다.



2018년 8월 18일 바인즈 아트 페스티벌은 트라우트 레이크 한 구석을 행사장으로 했다. 여기에 세운 입간판. “양도된 바 없던, 빼앗긴 영토, 머스퀴암, 스쾌미시, 써릴-와터스의 영토에 우리가 있다”고 써놓았다. 11일간 모든 행사장들에서 이 메시지가 ‘마음의 문턱넘기’ 구실을 했다.




2018년 8월 19일, 마지막 의례. 원주민 연장자와 축제 연희자, 기획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돌면서 식물 잎새와 기념물을 준다. 원주민 의례에서의 증인 의식과 같은 방식이다. 오른쪽 사진은 축제 기획자에게 베푸는 원주민 담요 의식.



  바인즈 아트 페스티벌에서의 자연은 여러 층위에서 작동한다. 근래에 원주민사회와 시민단체들의 가장 큰 저항 대상인 송유관 문제가 수많은 연행과 전시 담론으로 제기되며 그것은 ‘누구에게도 양도되지 않은’ 원주민 영토의 어머지 대지(mother nature)와 그 속을 다니는 자연과 생존의 메신저, 연어의 생태적 메신저 아래의 담론이다. 멀리 북쪽 심시안(Tsimshian)과 하이슬라(Haisla) 원주민사회에서 자라나 인근 헤일축(Heiltsuk) 사회로 입양된 크리스탈 스미스(C. Smith)는 작가이다. 그녀는 밴쿠버 옆 버나비(Burnaby) 북쪽 바닷가로 향할 송유관에 대한 저항 투쟁 현장에서 묵고 있었다. 여기서 ‘연어 캐러번’(Salmon Caravan)이라는 연어 상징 조직 활동을 하다가 2018년 8월 17일 밤 축제에 참여했다. 식민주의에 의해 황폐해지는 땅에 대해 그리고 행동하는 원주민들에 의한 자연과 문화의 탄성회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북치고 노래 불렀다. 싱글 마더인 그녀는 자기 아이를 옆에 데리고 이야기하고 모든 이들에게 이 아이를 지속가능성의 상징으로 감싸 안음을 호소했다.



크리스털 스미스와 그녀의 딸. 작가인 그녀는 2018년 8월 18일 트라우트 레이크에서 식민주의와 원주민사회의 황폐화에 대해, 그리고 원주민들의 자연적, 문화적 탄성회복과 파워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의 딸을 이야기의 증인으로 삼고 그녀를 옆에 데리고 이야기했다. 바인즈 아트 페스티벌 웹페이지 수록 사진.



  8월 13일 다운타운 이스트 항구에 붙은 크랩 파크(Lek’lekí)의 마당에서는 요즘 널리 유행하는 소매틱 무브먼트 클래스를 ‘갈까마귀 영혼의 춤 소사이어티’(Raven Spirit Dance Society)에서 주관했다. 소매틱 무브먼트의 특징인 몸으로, 내향적으로 생각과 감성을 모으는 몸동작들을 두 명의 원주민 강사가 가르쳤다. 그것에는 연안 샐리쉬 원주민사회 춤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독수리 날개 펴고 휘감아 걷기가 반영되었고, 끊임없이 발밑의 대지로부터 몸까지를 들여다보고 생각하게끔 호흡과 몸짓을 구사하도록 강조되었다. 자연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사회화의 기본으로 아는 원주민사회의 문화, 다시 되돌이켜 제 몸에 들어 온 자연의 힘을 춤으로 반응하는 원주민사회의 문화, 이것을 향유하도록 하는 것이 이 클래스의 기조였다. 이 클래스 이후에 둘레둘레 토론 행사(circle discussion)가 진행되었다. 지적, 정서적 장애자, 이 사회적으로 내쳐지기 쉬운 사람들의 경험 스토리텔링과 듣는 이들의 자기 경험 스토리텔링이 이어졌다. 듣는 이들이 자신도 일생에서 겪어 보았던 장애 경험을 이야기하고 서로 공감하고 뒷자리에서 계속 이야기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길거리에서, 학교에서 그밖의 곳곳에서 다른 이들은 볼 수 없는 수많은 장벽들과 사회적 이슈들이 이야기되었다. 여기서도 자연에 대한 경험이 개재되었다. 자연환경이 어떻게 지적, 정서적 장애에 영향을 미치고 그 반대 방향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 막막하게 처한 자기 존재, 처절한 도전을 해야 하는 자기 존재를 경험하고 좌절하고 뒷전으로 숨는 것이 지적 장애의 세계이다. 이야기 마당의 제안자들은 이 처절한 도전에서 매달릴 곳, 마음 붙일 곳으로 있어 준 자연을 이야기했다. 무섭게 자기 밖으로 이분화되고 스스로를 소외시켜 버릴 뿐이었던 자연이 자신의 내면과 연결될 때 스스로가 살아 일어나게 됨을 이야기했다. 초라하게 십여 명이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진지하게 토로하고 서로에 대해 공명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울먹이는 소리, 감싸 안는 몸짓들이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분출되었다. 이야기는 장소(환경)와 사람 존재를 제재로 하여 지적 장애, 정서적 장애로부터 생기는 외화(外化)와 소외를 되돌려 주는 역할을 했다. 이 행사의 슬로건이었던 ‘당신이 귀기울여 들으면 이야기가 그곳에 있다’는 말은 이야기의 힘을 말해준다. 자연도 이야기 속에 녹아 들어가 사람들이 직면해야 했던 벽으로 그리고 기대었던 품으로, 특히 스쾌미시에서 온 젊은 원주민 여성에게는 자기 확인의 표식으로 존재했다.






2018년 8월 13일, 다운타운 이스트 항구 인근 크랩 파크에서의 이야기 마당. 지적 장애에 대한 경험과 자신의 생명력에 대한 감성 이야기, 그리고 사람들 간의 공명과 경험 나눔.



  70여 개인과 단체가 벌인 이벤트들은 자연과 사회에 대한 다양한 이슈들로 곳곳의 장소와 사람들을 불러일으켰다. 조용히, 때로는 엉성한 힙합으로, 때로는 실험적 컨템포러리 댄스로 이 땅, 이 곳, 이 때의 자연과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표현하려 했다. 그 복잡하고 다양한 것들, 불과 수십 명씩 관객을 모으는 수많은 이벤트들을 되돌이켜 보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게 있다. 자신의 멋을 표현하려 하기보다는 그저 허름해도 무언가 이야기하려 하고 세상에 이슈를 던지고자 한다는 것이다. 또 동네사람들 잔치 구경하고 떠들듯이 관객들이 일상적 반응을 하는 가운데 이슈들이 수용되고 성찰되고 자기 경험의 감성적 표출을 이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주제가 뚜렷하다. 그 오고가는 커뮤니케이션이 뚜렷하고 판이 형성되는 것이 뚜렷하다.


  마리사 골드(Marisa Gold)는 흑인 혈통의 현대무용 전공자이다.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을 졸업하고 북미 곳곳의 소셜 클럽들에서, 대중연희장에서 춤을 추어온, 밴쿠버 일대 예술가들의 젊은 표상이다. 밴쿠버 이스트의 낡은 담벼락과 골목길들과 카페들이 그녀의 연희판이기도 하다. 이러한 곳들에서의 춤은 폭발적이다. 그녀는 바인즈 아트 페스티벌의 주축 연희자이기도 한데 여기서의 몸짓은 평상시 도시 뒷골목과 다른 야생 자연에서의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2017년 그녀의 춤은 몸을 대지에 묻고자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몸을 억누르는 것을 자연을 억누르는 식민주의의 엄습이라 보고 그 몸을 자연 속에 묻어 억누름을 헤치고 식민주의를 떨치고자 하는 되뇌임 말을 하면서 추었다. 2018년 바인즈 페스티벌에서는 달랐다. 정치적 이슈보다는 자연과 사람에 대한 껴안음, 자기 존재의 강렬한 자연 접촉이 그녀의 연희 내내 그리고 연희 이후 사람들을 향한 몸짓에서 추구되었다. 2017년 시더나무 아래 바닥을 훑으며, 바닥 위에 주저앉아 분노의 되뇌임을 하던 모습과 달리 2018년에는 동료와 함께 나무 등걸 속에서, 그 밑에서 나무의 질감과 자기 몸의 질감을 접맥시키는, 그리하여 포용과 감싸 안음의 몸짓을 했다. 이미 20대 후반이 되어가는 여성이지만 그간 꽤나 부모 걱정을 시켰는지 우연히 주차장에서 만난 그녀의 어머니가 내게 성숙해 가는 딸에 대해 흐뭇해했다. 격렬한 몸짓과 투쟁 일변도에서 성숙하게 바뀌어가는 딸, 이번 페스티벌의 전반적인 기조를 잘 말해주는 반응이었다.





2017년 8월 19일 트라우트 레이크에서의 마리사 골드, 바인즈 아트페스티벌 웹페이지 수록사진.





시더 나무를 덮은 지의류 식물. 꽤 오래전부터 마리사 골드는 커다란 나무들과 숲속에서 서고, 앉고, 온몸을 다해 춤추었다. 마리사의 페이스북 수록 사진.







2018년 8월 9일, 헤든 파크. 마리사 골드와 자넬 라이드의 공연. 이 페스티벌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들이다. 같은 친족원인 자연과 하나의 세계를 추구한다는 작품 의도를 제출했다.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는 본래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교의 한 교수가 시각적 경험을 넘어서, 흔히 간과되는 소리 경험의 세계를 찾고 소리의 공간적 전개, 범역, 풍경을 찾고자 한데서 유래한다. 2017년 바인즈 페스티벌에서는 간단한 마이크 집음과 헤드폰으로 들려주기 정도가 사운드스케이프 설치 및 향유 프로그램으로 있었다. 2018년에는 훨씬 복잡해졌다. 8월 18일 본 행사에서는 한 작가가 그동안 수집한 자연의 음들을 전자악기 연주, 스토리 낭송과 결합한 연희가 있었고, 8월 9일 밴쿠버 웨스트 해변(X̱epx̱páy̓em) 헤든 파크숲에서 열린 행사에서는 여러 나무들의 가지마다 주렁주렁 음향장치들을 매달아 소리의 숲을 만드는, 설치미술, 음악, 음향학 실험의 복합 형식이 있었다. 나뭇가지에 작은 목제 음향기들을 매달고 이들이 자연의 음을 다시 음악으로 만들어 보내는 소리를 내보냈고 이 소리들이 숲의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이 일대 공간을 덮는 방식이다. 사람들에게 소리가 감싸는 소리풍경을 ‘보고  듣고 느끼게’ 함이었다. 사람들은 우선 신기해했고 차츰 숲과 들판에 퍼지는 소리들의 밑에서 눈을 감았다.




2017년 트라우트 레이크 시더나무 속 소리풍경 실험. 나뭇가지와 잎 속의 커다란 공간에 나뭇잎 소리를 마이크로 모아 헤드폰으로 듣게 한 간단한 장치. 밖에서 나무 속으로 들어오는 바람 소리와 헤드폰에서 들리는 소리가 교차되도록 했다.





2018년 8월 9일 키칠라노 비치의 헤든 파크에 설치된 사운드아트 장치. 조지 라히(George Rahi)가 설치하고 자연의 음을 다시 작곡하여 들려준 “바람이 스치지 않는 나무는 없다‘(no tree is untouched by the wind). 소리공간을 조성하는 음향학적 설계이고 작품이다.






소리가 울리고 흐르는 방향을 짚는 관객.




  지금까지 그 수많은 프로그램들 중에서 극히 일부만을 이야기했다. 이 소소하고 엉성하고 사람도 많지 않은 축제가 왜 여전히 진행되며 지속가능성의 대표가 되었는지, 한마디로 단정할 수 없지만 이곳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엉켜 있는 심정이 있는 것 같다.






2018년 8월 18일, 트라우트 레이크에서의 축제 자리. 연희 한 꼭지마다 시더나무 밑, 자작나무 밑 등 수많은 장소들을 옮기며 그때마다 사람들이 퍼질러 앉고 눕고 즐긴다. 다문화사회, 여러 민족집단 사람들의 얼굴과 몸들이 집결해 있는 축제 장소의 한 부분 풍경이다.



  2018년 축제의 행사 주최 측 의도는 평범했다. 그저 여러 곳에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이 편안하게 보고 즐기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를 위해 평소 파트너인 원주민사회들로부터 ‘resilient root artist’들을 모았고 그들의 문화, 그들의 이슈를 장에 펼쳤다. 2018년에 이들이 겉으로 내세우지 않고 실제 곳곳에 스며들게 한 것은 포용, 그리고 땅으로부터의 생태적, 문화적, 민족적 탄성회복(resilience)였다. 아시아계에서는 필리핀의 벼농사와 전투 무용이 민족무용 보여주기 형식으로 펼쳐졌고 일본의 통상적인 타이코 연주가 있었다. 현대무용과 연극, 시낭송, 스토리텔링, 무용극 등은 환경을 제재로 하고 작금의 환경저항을 주제로 한 것들 혹은 사회적 소외와 도시공간의 소외 극복을 주제로 한 것들이었다. 자연은 생태적, 사회적, 미적, 정서적, 이념적 층위들을 넘나들며 장소와 사람과 축제 연행을 매개했다. 작고 허름한 행사들의 연속, 이 속에서 이 다양한 현상들이 얽혀 있었다. 그런데 의도적이건 비의도적이건 2018년에 연희자, 작가, 미술가들과 관객들의 반응에서 큰 줄기로 나타난 것은 포용이었고 탄성회복이었다. 환경적, 정치사회적으로 많은 장벽과 도전을 직면하고 사는 세월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치유를 필요로 하고 포용을 그리고 생명이 다시 돋아나고 불러일으켜짐을 추구하는 것 같았다.


  한때는 그린피스 탄생 때의 지식인 저널이기도 했고 지금은 예술과 대중문화 대표 저널이기도 한 조지아 해협(Georgia Strait)은 이 축제를 바탕에서부터 사람들의 전망을 보여주는 축제라 했다. 공연예술의 학술적 평가와 연희기획과 박물관-시민의 협력을 맡고 있는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인류학박물관 큐레이터는 자라나고 익어가는 축제, 밴쿠버 사람들답게 자연을 매개로 둘레둘레 모이고 장소를 깔고 앉고 호흡하는, 그래서 뿌리에서부터 자라는 축제라 한다. 초라해 보이지만 커다란 생생력과 성장력을 가진, 그래서 도시와 다문화 사람들 전체를 대표할 축제라 한다. 이 글의 결론을 이 몇몇 평가로 대신한다.





글_조경만(생태인류학자, 목포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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