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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019.04.05
볼쇼이발레단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할 때

볼쇼이발레단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발레단인 만큼 보유하고 있는 레퍼토리가 상당하지만 그 중에서 그리가로비치의 작품을 빼놓을 수는 없다. 볼쇼이발레단이 명실 공히 러시아를 대표하는 양대 발레단의 하나이자 세계적인 발레단이 된 것은 소비에트 시절 그리가로비치의 작업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리 그리가로비치는 1964년부터 1995년까지 20년이 넘도록 볼쇼이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 활약하면서 많은 작품을 안무하였다. 당시에 그가 안무했던 작품들은 볼쇼이발레단의 대표작이 되었으며 현재까지 볼쇼이발레단을 특징짓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50여 년을 이어 온 이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볼쇼이만의 특징이라 하면, 남성 무용수들의 부각과 드라마틱한 안무를 꼽을 수 있다. 그리가로비치는 기존의 고전 발레인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지젤> 등을 각색하여 남성 무용수의 비중을 높였다. 형식적인 부분을 조금 들어내고 작품을 유기적으로 압축시켜 놓았기 때문에 같은 고전 발레이지만 전통적 형식을 따르고 있는 마린스키발레단과 비교했을 때 좀 더 역동적이다.

 

  그리가로비치의 오리지널 안무작인 <석화>(이 작품은 볼쇼이로 오기 전 마린스키발레단의 전신인 키로프발레단에서 초연을 했다. 현재 볼쇼이발레단에서는 공연하지 않으며 스타니슬라브스키 극장이 레퍼토리로 보유하고 있다), <사랑의 전설>, <로미오와 줄리엣>, <이반 뇌제>, <스파르타쿠스> 등은 그의 특징을 뚜렷이 드러낸다. 산발적인 움직임으로 시작하여 마침내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모여드는 군무의 구성, 남성 무용수들의 힘차고 원시적인 동작들, 갈등 구도에 있는 세력들 간의 교차 등장을 통한 빠른 장면 전환 등은 40-50년 전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그리가로비치 안무의 특징이다. 높은 기교의 테크닉을 구사하는 동작 모두가 내러티브와 유기적으로 얽혀있기에 형식적 군더더기가 없어 더욱 극적으로 작품 자체에 몰입할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이 여느 모던 발레와도 구별되는 그리가로비치만의 매력이다.

 

   볼쇼이발레 공연을 찾는 관객들을 몇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을 테지만, 크게 보자면 볼쇼이발레단의 명성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관광객 부류와 좋아하는 무용가와 작품을 보려고 종종 발레 공연을 찾는 공연애호가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인들에게 발레란 소중한 전통예술과 같은 의미여서 그들은 이에 남다른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고전 발레는 당연히 그러하거니와 그리가로비치와 같이 소비에트 시대의 안무가가 남긴 발레 유산은 자신들만 가지고 있는 독창적인 것으로서 러시아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냉전 시대에 라브로브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그리가로비치의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작품을 통해 소비에트 리얼리즘 발레의 우수성이 서방세계에 소개되어 충격을 주었으며 현재까지 그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러시아 발레의 뛰어난 테크닉과 예술성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시대의 발레리나/발레리노들(울라노바, 플리세츠카야, 바실리예프, 막시모바, 세멘냐카, 라브로브스키, 베스메르트노바, 무하메도프, 베트로프, 아나니아시빌리 등 그리가로비치가 볼쇼이 예술감독을 역임하던 시절에 활동하던 무용수들이다)이 활약했던 그 시절을 러시아인들은 ‘황금시대(Golden Age)’라고 부른다. 매 시즌마다 그리가로비치의 작품이 서너 개는 꼬박꼬박 무대에 오른다든지 <파리의 불꽃>이나 <브라이트 스트림> 같은 소비에트 발레 작품이 현대 러시아 안무가 라트만스키에 의해 재구성되어 다시 공연되는 것은 러시아 발레팬들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리가로비치의 몇몇 작품은 시즌에 따라 돌아가면서 공연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매 해 한 두 번씩은 꼭 무대에 오른다. 이번 시즌에는 201810월과 20192월에 공연을 하였다. 필자는 29일 공연을 관람했다. 미하일 로부킨이 스파르타쿠스를, 알렉산더 볼치코프가 크라수스를 맡았고, 애기나와 프리기아는 올가 스미르노바, 안나 니쿨리나가 각각 맡았다. 모두가 흠 잡을 데 없이 뛰어난 테크닉과 연기력으로 춤을 추었다. 이미 <이반 뇌제>를 통해 그리가로비치 스타일의 주역무용수로서 인정을 받은 미하일 로부킨은 이반 바실리예프만큼의 스타성 기교를 구사하지는 않았지만 안정적인 춤을 구사하며 프리기아와의 사랑 가득한 이인무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공연의 수확은 크라수스와 애기나였다. 그들은 필자가 지금껏 보았던 <스파르타쿠스> 중 가장 카리스마 넘치고 매혹적인 퇴폐미를 마음껏 발산하는 로마 장군과 애첩이었다. 발레무용수들의 테크닉이 갈수록 상향평준화 되고 있는 세계 춤계의 상황에서 춤과 공연의 질적 수준을 좌우하는 것은 감정표현과 연기력이 될 것이다. 이번 공연의 크라수스와 애기나는 그런 점에서 역시 볼쇼이라는 찬사가 어울릴만한 무대를 보여주었다.

 

  <스파르타쿠스>는 더 이상 소비에트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민중적 발레는 아니다. 1968년 처음 무대에 오르고 50년의 세월 동안 움직임과 무대가 변화를 겪었으며 작품을 대하는 관객들의 마음 역시 달라졌을 것이다. 국가의 지원을 받아 창작된 작품인 만큼 선동성이 뚜렷했던 작품의 이데올로기는 이제 의미가 퇴색되어 오히려 예술성에 가려졌다. 공연 초기의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과장된 동작들 역시 축소되거나 다듬어져 21세기의 발레 작품으로 변화해 왔다. 여전히 드라마틱한 표현방식을 구사하지만 소비에트 발레스러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이다. 필자도 한-러 수교 직후 물밀 듯이 들어왔던 내한공연과 영상물을 통해 <스파르타쿠스>에서 엄청난 충격을 경험했던 일인인지라 21세기 현재 볼쇼이발레의 공연을 볼 때마다 그 기억을 더듬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한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고 세계 발레의 수준과 지형도가 변화하였기에 그 때 그 충격은 아마 이제 기억으로만 끄집어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모습으로 <스파르타쿠스>를 보는 것 또한 의미는 있다.

 

   이쯤에서 볼쇼이발레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해 보게 된다. 현재 발레단은 상당한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지만 매 해 공연하는 작품의 수는 한정적이다. 대표적인 고전 발레의 경우 대중성과 상업성을 생각해서라도 매 년 정기적으로 무대에 오른다. 2000년대 이후 유럽과 미국의 현대 발레 작품들을 받아들여 레퍼토리화 하였으며, 최근 들어 1-2년 마다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여 정체되지 않고 변화하는 발레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오랜 세월 유지해 왔던 고전 발레와 소비에트 발레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발레 트렌드에 맞추어 가고자 하는 볼쇼이발레단의 노력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물론 대환영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발레단이 변화에 주력하는 나머지 볼쇼이만이 내뿜을 수 있는 특색 가득한 소비에트 발레의 유산을 잃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90세가 훌쩍 넘은 그리가로비치가 다시 볼쇼이발레단으로 돌아와 자신의 작품을 가다듬으며 계속해서 무대에 올리고 있는 것 역시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좀 더 욕심을 부려본다면, 한때 무대에 올렸으나 역사 속으로 사라진 그 시절의 작품들을 다시 끄집어내어 무대에 올려준다면 발레를 사랑하는 관객으로서 무척 고마울 것 같다.

 

 



·사진_ 편집장 이희나(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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