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er EUNJUNG
지난 2월 20일(목)과 21일(금) 양일간 문화비축기지에서 윤상은의 <죽는 장면>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창작실험활동지원사업 중 하나로 공연되었다. 공연예술창작산실 창작실험활동지원사업은 기존의 결과 중심, 완성 공연 중심의 지원사업과 달리 창작자가 창작 중인 작품의 일부를 쇼케이스, 피칭, 전시 등을 통해 시연해 과정을 무용 관계자는 물론이고 관객들과 적극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이다. 이에 창작자들은 리서치, 워크숍, 장르 협업, 피칭, 쇼케이스 등 자유로운 방식으로 사업을 기획하고 참여할 수 있다.
윤상은은 18~19세기 낭만발레 시대 이후 발레의 대표적인 여성상이 되어버린 사랑 때문에 목숨을 잃는 여성 주인공, 그중에서도 죽음으로 박제된 이미지를 생산하는 ‘죽는 장면’에 주목했다.
<죽는 장면>은 낭만발레에서 고전발레에 이르기까지, 오늘날까지도 발레단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살아남아 지속적으로 공연되고 있는 다섯 편의 발레 작품, <라 실피드>, <지젤>, <라 바야데르>, <잠자는 숲속의 미녀>, <백조의 호수> 중 여성 주인공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발췌해 작품 속 죽음의 의미를 묻는다.
윤상은이 무대에서 죽는 장면을 재현하는 동안 무대 뒷벽에는 작품의 간단한 줄거리를 비롯해 이들 작품이 만들어지게 된 시대적, 문화적 배경과 이러한 여성 주인공의 상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 그리고 무용수의 독백처럼 느껴지는, 사랑에 대한 열망과 갈등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자막으로 띄워지며 춤을 떠받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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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백색 발레 이미지를 정립하며 발레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작품이 된 <지젤>과 <백조의 호수>에서는 각각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와 로베르토 볼레가 주역을 맡은 라스칼라발레단의 공연과 질리언 머피와 앙헬 코레야 주역의 아메리칸발레시어터 공연이 영상으로 재생되며 전막 발레의 대형 프로덕션 안에 완벽하게 녹아들어 있는 클래식 발레리나의 모습과 연습복 차림으로 그들의 죽음의 순간만을 발췌해 연기하고 있는 윤상은의 모습을 대비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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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속의 유명 발레리나도, 영상과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는 윤상은도 동시대를 살고 있는 무용수들이지만 두 무용수의 움직임은 보는 이들에게 전혀 다른 인상을 전달한다. 영상의 작품 주인공들이 비극적인 줄거리와 일치를 이루며 아무런 위화감 없이 죽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과 달리 윤상은은 이 죽음들이 ‘연기’임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영상 속 무용수들이 그 인물로 살다 죽음을 맞는 반면, 윤상은은 현실에서 살아 있는 여성으로 죽음을 연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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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작품인 <라 바야데르>의 죽음 장면 재현을 마친 윤상은은 발레 작품 속 캐릭터의 감정이 아닌 현실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것처럼 연기하던 애절한 표정을 지우고 울음을 터트린다. 그 울음은 그가 연기한 발레 작품의 주인공들은 결코 보여주지 않을, 현실의 어떤 여성이 내보일 법한 꾸밈없는 울음이지만, 이조차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닌 울음이 나오는 상황에 몰입하고자 하는 한 겹의 연기가 덧대어진 듯이 그는 소리 내어 우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울음을 멈추고 현실로 돌아온다. 마치 이 정도 울면 될까 아니면 좀 더 울어야 할까 고민하는 것처럼.
그리고 윤상은의 연기 사이사이에 자막으로 끼어들어 뜻대로 되지 않고 이리저리 꼬이기만 하는 ‘쿨하지 못한’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딜레마, 그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절대적인 사랑과 일상의 곤고함 앞에서 어느새 비루해져 있기 십상인 현실 연애 사이를 오가며 마주하는 분열에 맞닿아 있다.
사랑이 뜻대로 되지 않고 그 사랑을 마침내 잃었을 때 우리는, 그러니까 여성들은 왜 우는가? 내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 부을 연애 대상을 잃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대상을 잃고 허공으로 날아간 내 사랑이 임자 없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기 때문인가? 연애가 끝난 뒤의 짙은 상실감은 사랑을 잃은 데에서 오는가 아니면 사랑을 받을 대상을 잃은 데에서 오는가?
이 같은 질문이 이젠 ‘쿨하지 않게’ 된 시대에 윤상은은 사랑의 절대성을 지켜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죽음을 감내해야 하는 발레 속 여성 주인공의 이미지들을 새롭게 불러낸다. 우리가 이미 오래전 완성된 고전이라는 이유로, 그렇기에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이유로 묻지 않았던 “그는 왜 죽어야만 했는가?”라는 질문에 이제야말로 대답해보라는 듯이.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던 것은 이것이 쿨하지 못한 질문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 질문은 결국 여성이라는 존재를 사랑이라는 유일한 구원, 사랑이라는 유일한 탈출구, 사랑이라는 유일한 지옥으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갖지 못한 여성이라는 존재가 살아 숨쉴 수 있는 곳은 사랑뿐이기 때문이다.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 그리고 누구의 첩 등으로 ‘누구’라는 이름을 빌려야만 살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여성에게 사랑은 유일한 삶이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지젤>에서 주인공 지젤이 윌리가 된 2막에 이르러 알브레히트의 진실을 알려준 힐라리온을 죽게 내버려두고 자신을 속인 알브레히트를 구원하는 것은 그에게 진실보다 진실을 모른 채 알브레히트를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며, <라 바야데르>에서 니키야가 해독제를 거부한 것 역시 솔로르의 사랑 없이 살아가는 것이 해독제 없이 죽음을 맞는 것보다 더 끔찍했기 때문이다.
<라 실피드>에서 공기 요정 실피드가 독 묻은 스카프로 살해되는 것은 제임스의 사랑,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와 지상에서 함께하는 삶을 거부했기 때문이며,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오로라 역시 그에게 첫눈에 반한 왕자의 키스를 받고 깨어나기 위해 물레에 찔려 죽음과도 같은 잠에 빠져야 했다. 아름다운 발레 속 주인공들이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하다. 그들의 사랑은 죽음을 통해 완전한 것이 되며 그들은 죽은 뒤 완전하게 이상적인 여성이 되어 영원히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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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편의 발레 작품 속 죽음을 그대로 따라가던 윤상은은 그러나 마지막 작품인 <백조의 호수>에 이르자 절벽 위에서 투신해 죽음을 맞이하는 오데트와 달리 무대 뒷벽의 붙박이 벤치에 올라갔다 그대로 다시 내려오는 선택을 한다. 죽지 않고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러한 대비를 위해 윤상은이 선택한 안무 버전은 많은 발레단이 채택하고 있는 해피엔딩 버전이 아니라 두 주인공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잃고 난 뒤 피안에서 다시 만나 사랑을 이루는 아메리칸발레시어터의 케빈 매킨지 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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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대로 되지 않는 연애로 괴로워하다가도 그 연애가 자신을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만들어준 듯한 의외의 쾌감을 털어놓는 목소리 사이에 윤상은은 관객들의 시선을 받는 것이 삶이 되어버린 무용수의 독백을 슬쩍 끼워 넣는다.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받아야 완성되는 무용수의 무대와 또한 사랑이 있어야만 완성되고 그 사랑이 거둬지면 생의 전 의미가 사라지고 마는 발레 작품 속 여성 주인공들의 사랑은 나란히 놓이게 된다.
죽지 않고 삶으로 돌아온 윤상은의 걸음은 이제 “그는 왜 죽어야만 했는가?”를 한 발짝 지나 또 다른 질문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여성의 사랑은 죽음으로 완성되는가?” “여성은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해야 하는가?” “여성의 삶은 사랑에 바쳐져야 하는가?” 같은 것이 바로 그 질문들이다.
글_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제공_윤상은
만드는 사람들 _ 편집주간 최해리 / 편집장 장지원 / 부편집장 윤단우 / 편집자문 김호연, 이희나, 장승헌
시각 및 이미지 자문 최영모 / 기자 김현지, 윤혜준 / 웹디자인 (주)이음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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