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이름
이메일
뉴스레터 수신받겠습니다.
  

Review_

2015년 9월
2015.09.26
진정 ‘아시아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 린 화이민 Cloudgate의 <稻禾(Rice)>


 벼, 쌀. 진부한 소재, 제목이다. 동양인의 주식(主食)이고 구체적인 사물이지만 거기서 무슨 춤을 끌어 낼 수 있을까? 벼와 관련된 쏠쏠하고 탄탄한 스토리, 상상력을 자극하는 텍스트라도 있다면 가능할까? 아시아의 생명, 목숨 줄과도 같은 곡식이니 얼마나 많은 신화, 전설이 벼를 다루고 쌀과 얽혀있을까? 그런 걸 찾아내면 그럭저럭 한편 만들 수 있을 것도 같다.

 

 잠시 눈을 밖으로 돌려보자. 서구의 안무가, 연출가가 그들의 주식인 밀, 빵이라는 제목으로 무용을 만든다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밀’이라는 개념과 연결될 파격을 찾아내기가 만만치 않을 터. 밀을 의인화한 신화, 전설을 차용해 춤으로 구성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식이다. 밀은 생명, 양식, 구세주라는 클리셰가 눈에 선하다. 어떤 춤이 있을까 찾아보니 작곡가 들리브(Delibes)의 발레음악에 맞춰 아더 생 레옹(Arthur Saint-Léon)이 안무한 발레 <코펠리아(Coppélia)>가 있다. 3막의 코믹 발레인데 1막에 밀의 춤(Wheat Dance)이 나온다. 연인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남녀 주인공이 밀 이삭을 들고 추는 춤이다. 밀을 상징하는 여무용수들이 밀을 들고 있다. 밀은 소품으로 쓰일 뿐, 춤의 주제와는 별 상관이 없다. 분류하고, 분석하고 범주화하는 서구의 사유방식으로는 밀은 춤이 되기 어렵다. 밀이 속한 범주의 중력을 벗어날 가속도, 상상력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하나의 사물을 춤으로 창조하기보다는 상태, 감정, 현상을 묘사하는 춤이 그래서 더 많다. 근대 서구 안무가들의 춤은 대부분 신화, 전설, 오페라, 표제 음악, 연극, 소설 등 기존의 스토리에서 모티브를 따온다. 현대 무용 안무가들은 주로 기존의 춤 장르로부터 발전한, 또는 단절된 몸의 움직임을 구조화, 계열화 하고 거기에 추상적인 제목을 붙이는 작업을 했다.

 


 그런데 대만의 안무가 린 화이민은 기존의 신화, 전설 같은 스토리, 모티브도 없이 벼로 70분짜리 무용을 만들어냈다. 벼가 환유하는 '자연의 순환’이 그가 채용한 이야기다. 작품 <벼>는 쌀 대신 사계절 변화하는 논을 영상으로 보여준다. 논은 순환의 장소다. 봄에 모내기하고, 여름에 김매고, 가을에 낟알을 거두고, 겨울에 불을 놓는다. 그리고 다시 물을 대는 봄이 온다.

 

 춤은 이렇게 시작한다. 모내기 전의 논바닥에 물이 차 있다. 탄력으로 부르르 떠는 라탄(rattan, 야자과 덩굴식물)의 줄기 봉을 들고 남자 무용수가 무대를 가로지른다. 커다란 나무를 감싸 안듯 두 팔을 벌리고 여자무용수들이 발을 구른다. 쿵쿵대는 발소리와 무용수들이 들이켜고 내쉬는 숨소리가 섞인다. 고여 있는 논물 위로 바람이 물결을 만들며 스쳐가고 무용수들의 춤이 조응한다. 발아, 성장, 수분(受粉), 결실, 추수의 고리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 논이라는 공간 속에서 순환의 마디, 마디가 이어진다. 물, 바람, 비, 흙, 불, 연기, 그리고 벼. 춤은 논과 관계하고 조응한다. 논에서 이뤄지는 순환을 표현하되, 개념화, 범주화하지 않는다.

 

 벼의 꽃이 피고 수분이 되는 과정을 묘사한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다. 축소된 4각의 논 영상, 바닥의 녹색물결, 뒷벽에 춤추는 벼의 무리들. 푸른 움직임을 침대 삼아 남녀 무용수 한 쌍이 사랑을 나눈다.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우아하게, 느린 동작, 다양한 자세로.

 


 천둥소리, 폭우 쏟아지고 물결치는 논. 붉은 색 옷을 입은 여자가 출산 하려는 듯 몸부림친다. 다리를 넓게 벌리면, 낟알이 맺힌 벼, 잘 익어 고개를 숙인다. 차차 붉어지는 논의 영상. 화면은 자꾸 줄어든다. 벼이삭이 익으면 화면이 열린다. 추수의 시간이 다가오면 타악기 소리 격렬하게 울리고 남자들 리탄 봉으로 바닥을 내려친다. 타작의 소리, 쨍쨍하고 처절하다.

 

 다음 순환의 마디는 죽음과 정화다. 논에 불이 붙는다. 낫으로 베고 남은 벼 밑동이 타들어간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논바닥이 가뭄에 산불 번지듯 불길에 휩싸인다. 바닥은 금방 시커멓게 변한다. 풀풀거리는 재가 바람에 날린다. 다음 봄, 새 벼들이 빨아들일 거름이 된다. 여성들은 암중모색한다. 고난의 겨울을 날 방법을. 라탄 봉을 십자가처럼 어깨에 지르고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논바닥에는 서서히 물이 차오른다.

 

 린 화이민은 자연스러운 순환의 흐름을 논 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생생하게 전달한다. 벼라는 유기체는 벼를 담은 공간 ‘논’과 다르지 않다. 공간 자체도 유기체며 순환한다. 서양의 사유방식은 공간과 시간을 사물이 출연하는 무대, 범주라는 추상개념이다. 린 화이민의 무용에서 공간과 시간은 변화하고 순환하는 생명체다. 춤은 이 생명체를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몸짓이다. 그의 춤은 벼의 순환을 거창하게 개념화, 추상화하지 않는다. 해석하거나 상징하지도 않는다. 춤은 논의 변화에 조응(correspondence)할 뿐이다. 왜 서구인들이 린 화이민의 작품에 열광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분석하거나 해석하거나 추상화하지 않는 춤, 가장 자연스러운 자연이기 때문이다. 그 자연스러움이 얼마나 자신들의 방식과 다르다는 것을, 모방할 수 없음을 알기에 서구인들은 감탄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서구에서 얼치기로 배워온, 설익은 개념 놀이에 빠진 자들의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춤 한 판을 린 화이민은 선사하고 돌아갔다.

 

 

글_ 손현철(KBS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시인)
사진_ LG 아트센터 제공

twitter facebook

만드는 사람들 _ 편집주간 최해리 / 편집장 장지원 / 부편집장 윤단우 / 편집자문 김호연, 이희나, 장승헌
시각 및 이미지 자문 최영모 / 기자 김현지, 윤혜준 / 웹디자인 (주)이음스토리

www.dancepostkorea.com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로 31-15 (합정동, 리츠하우스) 101호 / Tel_ 02.336.0818 / Fax_ 02.326.0818 / E-mail_ dpk0000@naver.com
Copyright(c) 2014 KDR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