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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의 신’이라 불린 불세출의 무용수 바슬라프 니진스키(Vaslav Nizinskii, 1890-1950)

 

 

 

[사진1] 훤칠한 외모를 자랑하는 니진스키


 당대는 물론이고 현대에도 인정받을 만큼 빼어난 외모의 소유자였던 바슬라프 니진스키(Vaslav Nizinskii)는 최초의 스타 남성무용수로서 그의 이름 뒤에는 항상 ‘춤의 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었다. 니진스키는 폴란드 출신의 무용수 부부 사이에서 1890년에 태어나 양친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춤과 음악에 남다른 소질을 보이며 성장했다. 이러한 천부적 재능을 바탕으로 니진스키는 1898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마린스키 극장의 단원으로 활약하며 일찍이 실력을 인정받는 무용수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1908년에 니진스키는 발레 뤼스(Ballet Russes)의 수장인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으로 기록된다.


 


 

[사진2] <장미의 정령(Le Spectre de la Rose)>을 춤추는 니진스키


 발레 무용수로서 흠 잡을 데 없을 만큼 뛰어난 신체조건과 기량을 한 몸에 갖춘 니진스키와 당대 최고의 발레 흥행사이자 기획자였던 디아길레프의 만남은 세계 발레사의 발전을 이끄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둘은 그야말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Win-Win’의 관계로, 니진스키에게 디아길레프는 그가 최고의 스타 무용수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 든든한 후원자였으며, 디아길레프에게 니진스키는 불세출의 무용수로서 흥행 보증수표와 같은 존재였다. 1909년 봄 파리, 니진스키가 발레 뤼스의 일원으로 출연하는 첫 데뷔무대를 지켜본 관객들은 그의 깃털처럼 가볍고 아름다운 몸짓에 일제히 숨을 죽였고, 공연이 끝나자 박수갈채와 찬사를 아낌없이 쏟아냈다. 특히 니진스키는 관객들의 눈을 의심케 할 정도로 오랫동안, 그리고 높이 도약하는 점프력으로 정평이 나있는데, 그가 <장미의 정령(Le Spectre de la Rose)>에서 보여준 놀라운 도약은 지금까지도 무용계의 전설로서 회자되곤 한다.


 니진스키의 풍부한 예술적 재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가 무용수로서의 활동을 넘어서 안무가라는 또 다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발레뤼스의 안무를 맡았던 포킨이 1912년 디아길레프와의 불화로 불현듯 발레단을 떠나자 그 빈자리를 니진스키가 채우게 되었다. 그의 대표작인 <목신의 오후(L'après-midi d'un Faune, 1912)>와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 1913)>은 기존의 발레의 틀에서 크게 벗어난 파격적 작품으로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으며 엄청난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두 작품 모두 초연 당시에는 관객들의 온갖 야유와 비난을 피할 수 없었으나, 후에 발레사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열어준 작품으로 재평가됨으로써 오늘날까지 여러 가지 버전으로 재안무, 공연되고 있다.

 



 

[사진3] 니진스키의 안무작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


 이처럼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눈부신 명성까지 손에 거머쥔 니진스키는 겉보기에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으나 그의 내면은 늘 곤궁했다. 어린 시절 경험한 부모의 이혼과 가난, 혁명과 전쟁, 그리고 디아길레프와의 불온전한 관계와 같은 불운의 그림자는 날이 갈수록 더욱 선명해져 그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특히, 디아길레프와의 결별은 니진스키의 삶에 또 한 번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1917년 발레 뤼스를 떠난 니진스키는 그의 부인, 자녀와 함께 스위스의 생 모리츠(St. Moritz)에 정착하여 새로운 삶을 모색하였으나 생각만큼 녹록치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니진스키가 쓴 『일기: 고독한 영혼의 길(The Diaries of Vaslav Nijinski)』에 드러난 그의 심경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29살이 되던 해인 1919년에 니진스키는 취리히의 한 정신병원에서 정신분열을 진단을 받기에 이르렀으며, 1950년 4얼 8일 런던의 한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야했다.


 화려한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가장 높은 곳을 향해 날아오르던 그가 날개를 잃은 듯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경험했을 상실감을 떠올려보면 그가 어찌해서 ‘비운의 천재’로 불릴 수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남들보다 다방면에서 빼어났기에 그만큼 무겁고 평범하지 못한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했던 비운의 천재 니진스키. 그가 조금 더 좋은 환경 속에서 오로지 춤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면 세계 발레사에 또 어떤 괄목할만한 업적들이 쓰였을까 라는 아쉬움 섞인 즐거운 상상을 펼쳐본다.

 

 

글_신찬은(성균관대 예술학협동과정 석사3기)

 

 

사진출처:
사진1_
http://www.russianballethistory.com/NijinskyN3.jpg
사진2_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a/ac/Vaslav_Nijinsky_in_Le_spectre_de_la_rose_1911_Royal_Opera_House.jpg/220px-Vaslav_Nijinsky_in_Le_spectre_de_la_rose_1911_Royal_Opera_House.jpg
사진3_
http://cccdanse.com/reviews/1913-2013-100-ans-dinepuisables-sacres-du-sacre-du-printemps-de-nijinski-au-sacre-197-de-dominique-br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