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공연이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무용 부문은 M발레단의 〈오월바람〉(1월 11일(토)-12일(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과 언플러그드바디즈의 〈호모 파베르〉(1월 11일(토)-12일(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를 시작으로 에스디아트엔코(Soo d Art & Co)의 〈군림〉(2월 1일(토)-2일(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라만무용단의 〈新청 랩소디〉(2월 14일(금)-15일(토),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미나유 안무의 〈Body Rock〉(2월 19일(수)-20일(목),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정형일발레크리에이티브의 〈Swan Lake; The wall〉
공연의 스타트를 끊은 〈오월바람〉은 기획안 단계에서 〈5.18=8.15〉였던 제목을 본 공연에서 바꾸었는데, 안무가는 5.18 당시 계엄군에 의해 탄압받던 광주 시민들의 모습이 일제강점기 시절 광복만을 기다리던 식민지 치하의 국민들과 닮았다고 생각해 처음 제목을 정했다가 5.18이라는 단어가 아직까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는 판단하에 현재의 제목으로 변경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올해는 광주민주화운동이 40주년을 맞는 해이며 명칭 또한 5공화국 당시 ‘광주소요사태’나 ‘광주사태’로 부르던 것을 노태우정부 시절 결성된 민주화합추진위원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정한 뒤 1997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제정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2001년에는 ‘5.18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관련 피해자들은 국가유공자로, 5.18묘지는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안무가가 어떤 점에서 5.18이라는 단어 사용이 사회적 논란이 된다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원 제목이 〈5.18=8.15〉임을 생각한다면 5.18이라는 단어의 사용보다는 5.18을 8.15와 무리하게 연관지은 시도가 논란의 원인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해볼 수 있다. 이미 영화 〈1987〉에서 6월민주항쟁을 노태우의 6.29선언을 건너뛴 채 2016년의 촛불광장과 연결하는 시도를 한 바 있다. 영화의 창작자가 이처럼 상이한 두 시대를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연결해 관객들의 호응을 얻어낸 것처럼 8.15와 5.18이라는 상이한 두 시대를 ‘해방’이라는 동일한 키워드로 묶어 해석해내려 했다는 추론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무용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들이 스토리텔링과 해석, 메시지와 안무의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많은데, 〈오월바람〉 역시 그러한 안타까운 작품 중 하나다. 안무가는 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5.18정신이라고 말하며 5.18정신은 꼭 혁명이나 시위를 의미하지 않고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던 광주 시민의 열망, 즉 ‘자유’에의 의지를 담아내려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인간적 삶의 필수 조건인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
그러나 자유를 억압당하고 목숨마저 위태로은 절대 위기의 순간 앞에 선 당신!
자유인으로서 당당한 죽음과 비굴한 굴종의 삶 중 어떤 길을 선택하겠는가?
〈오월바람〉의 작품 내용을 요약한 이 글은 사실 안무가의 전작인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의 내용에 보다 가깝다. 〈오월바람〉은 80년 봄, 대학 무용실에서 처음 만난 두 무용과 신입생이 풋풋한 사랑을 키워가지만 계엄군 점령하에 여주인공 혜연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정신착란을 일으킨 끝에 사랑하는 연인 민우의 품에서 숨을 거두는 이야기다.
혜연의 비극은 ‘자유인으로서 당당한 죽음과 비굴한 굴종의 삶’ 중 당당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벌어진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 작품에서 5.18은 평범한 대학생으로 평범하게 사랑하며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도 있었던 젊은 두 남녀를 갈라놓은 외부의 재앙이다. 계엄군의 폭거가 광주 시민들에게 외부의 재앙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계엄군이 파괴한 것이 민주 시민의 존엄이 아니라 평범하고 작은 행복이었다는 안무가의 해석이 관객들에게 5.18정신을 바르게 전달하고 있는지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메시지의 허약함은 차지하고라도 작품의 만듦새는 너무 헐거우며, 캐스팅된 무용수의 활용 또한 매우 비효율적이다. 주인공 혜연과 민우를 제외하고 솔리스트 무용수는 총 5명인데, 혜연의 엄마와 계엄군 리더 충환, 충환을 따르는 계엄군 장교, 그리고 충환과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인물인 ‘권력녀’와 ‘광대’가 등장한다. 오월 광주를 다루는 작품에 광대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의아할뿐더러 작품에서 특별한 역할을 부여받은 것도 없이 이름도 없이 ‘권력녀’라고 게으르게 네이밍되어 충환과 몇 번의 파트너링을 보여주고 퇴장하는 이 인물의 존재는 의문 그 자체다.
계엄군 리더와 같은 이해관계로 묶여 있는 여성이기에 ‘권력녀’라는 타이틀을 주었다면 권력에 대해서도 여성주의에 대해서도 몰이해한 것일 뿐 아니라 계엄군 리더와 남성 군무로 표현해도 충분했을 것을 안무가의 전작에 출연했던 무용수를 작품의 윤곽이 나오기도 전에 미리 캐스팅해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캐릭터로 소모한 것은 아닌가 의심이 갈 지경이다.
전작인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과 비교하자면 세부 줄거리만 다를 뿐 인물의 구도가 판에 박은 듯 유사하다. 〈오월바람〉은 슬픈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인 두 남녀와 어머니, 계엄군 리더, 권력녀라는 다섯 인물이 주축이 되어 줄거리를 이끌어가고 있는데, 이는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에서 안중근과 그의 아내 김아려, 어머니 조마리아, 일본 순사와 게이샤를 내세운 것과 동일한 구도다. 원 제목이었던 〈5.18=8.15〉의 실마리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주인공으로 한 전작에서 찾을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게다가 〈오월바람〉의 권력녀와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의 게이샤는 〈스파르타쿠스〉에서 크라수스의 정부로 등장하는 예기나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오월 광주를 다룬 문학작품에서 ‘순결한 내 누이의 젖가슴을 도려낸 끔찍한 총칼’과 같은 표현으로 여성의 피해자성을 노래하는 것은 흔히 관찰되는 경향인데, 이 〈오월바람〉도 그러한 광주문학의 경향성과 궤를 함께한다. 예술작품에서 여성은 대개 순결, 순수, 평화, 피해자를 상징하고 남성은 그러한 순수와 평화를 깨트리러 온 침략자라는 이분법적 도식을 취하기 십상이지만 실제 광주에서 여성들은 무력한 피해자만이 아니라 시민군에 힘을 보태며 함께 싸운 동지들이기도 했다. 작품의 기조가 러브스토리라 해도 그 안에서 여성은 가련한 피해자가 아니라 싸움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으며, 이는 물론 창작자의 여성관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혜연이 죽음을 맞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원인제공자들인 충환과 권력녀가 장미꽃을 한 송이씩 들고 추모하는 연출은 광주의 오월을 직접 겪었다는 안무가의 역사의식을 의심케 하는 장면이었다. 그들에게 혜연의 죽음을 추모하게 한 의도는 무엇인가? 계엄군을 광주에 투입한 전두환이나 노태우가 5.18묘지에 꽃을 바치면 평화와 화합의 시대가 열리는 것인가? 안무가가 말했던 것과 같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했을 뿐인 광주 시민의 소망을 무참히 짓밟은 그들에게 추모의 기회를 부여한 것은 어떤 의미인가?
작품의 주제나 전개 방식, 스토리텔링 등에 비하면 다소 지엽적인 문제라 하겠으나 안무의 독창성 측면에서도 고민한 흔적이 크게 보이지는 않는다. 일단 타 작품과 유사한 장면들이 너무 많은데, 계엄군에게 끌려가는 광주 여성들의 군무 장면은 〈오네긴〉에서 타티아나 생일의 그랑제떼 군무와 판박이이고 고문을 당하고 서서히 미쳐가는 혜연의 마지막 장면은 〈지젤〉 매드씬에서 영감을 받은 듯 보이며, 죽어가는 혜연과 이를 안타까워하는 민우의 마지막 파드되는 〈마농〉의 3막 파드되와 매우 닮아 있다. (안무의 일부는 유니버설발레단의 〈춘향〉에서 해후 파드되 속 움직임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혜연이 리본에 휘감겨 괴로워하는 장면은 안무가가 국립발레단 부예술감독 시절 안무한 〈왕자호동〉의 편지씬이 이식된 것으로 보이는데, 〈왕자호동〉에서 호동과 낙랑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고뇌를 표현한 것과 달리 혜연을 휘감은 리본은 고문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만이 아니라 발레 안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지만, 혜연이 고문을 당하는 장면에서 충환이 혜연을 안고 바닥을 구르는 안무는 설사 안무가의 의도가 그렇지 않았다 해도 객석의 관객들에게는 겁탈로 받아들이기 충분했다. 유니버설발레단과 국립무용단의 <춘향>에서도 고전소설에서 칼을 쓰고 감옥에 갇힌 춘향은 무용 무대 위에서는 남성 군무진에 의해 고문을 당하는 것으로 표현되며, 유니버설발레단의 〈심청〉에서도 청은 인당수에 빠지기 전 역시 남성 군무진에게 유린당한다.
여주인공의 수난을 표현하기 위해 이렇듯 남성 군무진에 의한 폭력(그것도 성적 폭력으로 받아들여지기 충분한)을 연출하는 것에 대해 이제는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시대이며, 이러한 안무가 바뀌지 않고 계속해서 등장한다는 것은 안무가의 고민이 그만큼 얕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월 광주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성고문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 사실이 창작의 알리바이가 되어선 안 된다.
우리나라 발레를 평가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는 이제 우리나라 무용수들의 역량이 세계무대에 내놓아도 뒤처지지 않는 수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뛰어난 무용수들이 나오게 된 시점에 안무가들에게 무엇보다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그 무용수들이 더 나은 작품에서 춤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책임감일 것이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M발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