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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언택트 공연 5 - 여성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 로열발레단 <첼리스트> & <울프 웍스>

  #OurHouseToYourHouse 시리즈로 온라인 상영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로열발레단에서는 5월 상영작 〈아나스타샤〉에 이어 6월에는 〈첼리스트(The Cellist)〉, 7월에는 〈울프 웍스(Woolf Works)〉로 실존 인물에게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연달아 선보이고 있다. 〈첼리스트〉는 제목 그대로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의 생애를, 〈울프 웍스〉는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무대화한 것이다. 

 

  재클린 뒤 프레는 다발성 경화증으로, 버지니아 울프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그 비극적인 죽음이 생전에 남긴 예술 못지않게 널리 회자되었는데, 두 공연 모두 여성 예술가가 맞이한 비극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생애와 작품의 무용적 재현에 집중하고 있다.  이는 예술가가 예술가를 대하는 지극히 당연한 태도처럼 보이지만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발레 작품들이 죽은 여자를 제단에 올리고 추모하는 데 서사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음을 떠올린다면 이 두 공연을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란 어렵다. 공연을 보고 나면 창작자인 예술가가 앞선 시대를 살아간 예술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나아가 얻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두 공연은 지난호에서 아나스타샤가 ‘예의’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 것처럼 결국 창작자의 ‘예의’로 돌아오게 된다. 

 

 

악기와 연주자, 그 아름다운 파드되


  ​​〈첼리스트〉는 올해 2월 17일부터 3월 4일까지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초연으로 올려졌고, 공연기간 중 2월 25일자 공연은 극장에서 온라인으로 생중계되었다. 그리고 지난 5월 29일부터 6월 11일까지 로열오페라하우스 유튜브 채널을 통해 재상영되며 다시 한번 화제가 되었다. 당시의 온라인 상영은 코로나 팬데믹 상황으로 인한 결정이 아니었지만 3월 중순부터 로열오페라하우스를 비롯해 영국 전역의 공연장들이 대부분 운영을 멈추고 잠정 휴관에 들어갔으니 결과적으로는 코로나 이전 시대, 정상적으로 시즌이 운영되던 시절의 마지막 공연이 된 셈이다. 무대 공연과 실황의 동시 상영이라는 이 특별한 시도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공연계에서 참고할 만한 모델로 남았다.

 

 

Bill Cooper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용수들이 맡은 역할에 붙여진 이름이다. 안무가 캐시 마스턴은 주인공들을 재클린 뒤 프레나 다니엘 바렌보임 같은 실존 인물들의 이름 대신 ‘The Cellist’, ‘The Conductor’라고 명명해 이 작품이 뒤 프레와 바렌보임의 비극으로 끝난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첼로 연주자와 지휘자라는 음악가들의 이야기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심지어 뒤 프레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첼로에도 ‘The Cello’가 아닌 ‘The Instrument’라는 이름을 붙여 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것이 음악임을 다시금 강조한다. (그럼에도 지휘자 역을 맡은 무용수 매튜 볼은 음악계의 거물인 바렌보임을 연기하는 것이 ‘엄청난 협박’으로 다가왔다고 배역에 대한 부담감을 토로했다.)

 

  음악과 음악가에 관한 이야기답게 작품은 뒤 프레의 음악으로부터 출발한다.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마스턴은 이 이야기를 뒤 프레라는 특정 예술가의 삶에 고정시키지 않으려 했지만 이 공연을 보는 이들이 뒤 프레의 이름을 지우고 작품을 감상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여 이번호 리뷰에서는 마스턴이 채택한 보통명사 대신 실제 인명으로 기재한다.) 

 

  공연이 시작되면 무용수들이 뒤 프레의 연주가 녹음된 LP판을 가지고 나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음악을 표현하는 데 있어 LP판이라는 소품 사용은 너무 직접적인 방식이기는 하나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음악과 매끄럽게 어우러지며 관객들을 곧 이어지는 뒤 프레의 어린 시절로 무리 없이 데려간다. 어린 뒤 프레가 첼로를 처음 만나 소리를 만들어내는 즐거움을 발견하고 연주자로 재능을 키워가는 과정, 부모, 특히 어머니의 보호로부터 벗어나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뒤 프레의 성장과 바렌보임과의 만남, 짧지만 눈부셨던 음악가로서의 전성기, 병마와의 싸움과 음악적 쇠락 등 인생의 파노라마가 압축적으로 전개되는 동안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무용수 마르셀리노 삼베가 연기하는 첼로의 존재다. 

 

  마스턴은 ‘The Cellist’라는 제목에 걸맞게 작품의 중심에 뒤 프레와 바렌보임이라는 두 인물이 아닌 첼로 연주자와 첼로를 배치하고 있다. 바렌보임이 뒤 프레의 짧은 음악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을 함께한 동반자였고 스물두 살의 뒤 프레가 바렌보임과 결혼하기 위해 유대교로 개종했다거나 다발성 경화증으로 스물일곱에 은퇴해야 했던 뒤 프레를 뒤로하고 바렌보임이 불륜을 저질렀다거나 하는 사실들이 뒤 프레의 생애를 다룬 전기나 영화 등에서 매우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을 생각하면 낯설기까지 한 접근이다.  


 

 ⓒFoteini Christofilopoulou



  그러나 마스턴은 뒤 프레의 생애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첼로와의 만남이며 첼로가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인생의 동반자였다고 말한다. 따라서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파드되 역시 뒤 프레와 바렌보임이 아닌 뒤 프레와 첼로에게 주어진다. 무릎을 꿇은 채 한쪽 팔을 길게 뻗어 몸으로 첼로의 외형을 모사하는 듯하다가도 금세 선율이 되어 연주자와 한몸처럼 춤을 추는 삼베의 부드러운 움직임은 눈으로 음악을 보는 듯하고 사랑에 빠져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는 뒤 프레와 바렌보임 주변을 맴돌며 파드트루아를 만들어내는 장면은 첼로에 인격이 부여되어 실연이라도 당한 것 같은 안타까움을 전달한다. 

  뒤 프레를 맡은 로렌 커스버슨이 우아함과 생동감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 반면 바렌보임 역의 매튜 볼은 캐스팅에서 느꼈다는 심리적 부담감에 비해 연기도 테크닉도 평면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이조차 안무가의 의도로 느껴질 정도로 작품의 주요한 감정과 움직임은 첼로와 연주자에 집중되어 있다. 다만 첼로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삼베의 연기는 매우 뛰어나지만 흑인 무용수인 그가 사물화된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점은 커스버슨이 생전의 뒤 프레를 연상케하는 우아한 금발 미녀인 것과 대비되어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무대 위에서 만난 작가의 작품과 생애 

  ​〈첼리스트〉의 뒤를 이어 6월 27일부터 7월 10일까지 로열오페라하우스 유튜브 채널에서 상영된 〈울프 웍스〉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가운데 『댈러웨이 부인』, 『올랜도』, 『파도』를 무대로 옮겨 트리플 빌 형식으로 꾸민 작품이다. 웨인 맥그리거의 안무로 2015년 초연된 이 작품에는 당시 무대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알렉산드라 페리가 캐스팅되어 화제가 되었는데, 맥그리거는 이에 대해 그의 나이(당시 52세)가 이 작품을 하기에 적합한 때가 되어서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 작품은 초연 직후 영국 내셔널댄스어워즈에서 최우수 고전안무상(Best Classical Choreography)을, 페리는 가장 뛰어난 연기를 펼친 여성 무용가에게 수여되는 그리쉬코상(Grishko Award for Best Female Dancer)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6년 로렌스올리비에상에서는 최우수 신작무용상(Best New Dance Production)을, 그리고 페리는 무용부문 우수상(Outstanding Achievement in Dance)을 수상했다. 초연 이후 2017년과 2018년 연달아 무대에 올려졌고, 올해는 온라인 상영을 통해 재공연되었다. 일각에서는 전 세계에 불고 있는 페미니즘 제4물결의 바람이 이 작품의 여성주의적 의의를 찾아내고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울프 웍스〉의 첫 번째 작품 ‘I now, I then’ ⓒTristram Kenton 



  울프의 소설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맥그리거는 원작이 있는 작품을 각색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길을 간다. 무대 위에서 『댈러웨이 부인』은 ‘I now, I then’으로, 『올랜도』는 ‘Becomings’로, 『파도』는 ‘Tuesday’라는 제목으로 재가공되는데, 그는 원작의 줄거리를 무대로 충실히 옮기는 대신(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원작의 무게에 짓눌리거나 안무가의 해석 부재로 납작해지는지 떠올려보라) 작품의 모티브가 된 원작 속 인물들의 관계나 서사를 움직임으로 시각화하는 데 집중한다. 이야기의 재미를 음미하는 것이 아닌 인물의 심리와 문장이 만들어내는 심상이나 분위기가 주가 되는 울프의 작품 특징을 이해했기에 가능한 방식이다.

 〈울프 웍스〉의 첫 번째 작품 ‘I now, I then’은 울프의 실제 목소리로 시작한다. 울프는 1937년 BBC 라디오에 출연해 자신의 에세이 「손재주에 관하여(On Craftsmanship)」를 낭송했는데, 이 녹음본은 세상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울프의 육성이다. 맥그리거는 울프의 목소리를 무대의 배경음으로 삼아 작가와 작품을 연결시키려 한다. 이 시도는 세 번째 작품인 ‘Tuesday’에 와서 울프의 유서 낭독으로 이어지는데, 유서를 읽는 목소리는 배우 질리언 앤더슨의 것이다.

  무대 바깥을 감싸고 있는 것이 울프의 목소리라면 무대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은 페리의 움직임이다. ‘I now, I then’에서는 손님들을 초대해 만찬을 준비하는 것이 평범한 일상인 댈러웨이 부인을, ‘Tuesday’에서는 불안 속에서 괴로워하다 자살을 택하는 로우다를 연기하는 그는 풍부한 표정과 깊은 눈빛, 섬세하면서도 절제된 움직임으로 무대를 장악한다. 특히 원작에서는 한번도 만나지 않는 댈러웨이 부인과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에드워드 왓슨)가 서로를 뒤쫓듯 한 공간에서 추는 춤은 시적인 움직임으로 채워진 무대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울프 웍스〉의 세 번째 작품 ‘Tuesday’ ⓒTristram Kenton 



  그리고 세 작품 중에서는 다소 이질적인 두 번째 작품 ‘Becomings’를 지나 마지막 작품 ‘Tuesday’에 이르면 마침내 울프의 작품과 생애는 서로 만나게 된다. 여섯 인물들의 삶과 죽음이 교차되고 있는 『파도』에서 구심점이 되는 인물은 버나드지만 맥그리거는 원작과 달리 로우다를 중심인물로 세우고 이 인물을 페리에게 맡긴다. 댈러웨이 부인으로 삶을 재발견하고 로우다가 되어 죽음으로써 살아 있는 울프(그의 생전 목소리)와 그가 쓴 작품, 유서와 죽음이 무대 위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원작 속 인물들의 관계와 심리, 시적 문장들이 움직임으로 아름답게 옮겨진 첫 번째와 세 번째 작품과 달리 두 번째 작품인 ‘Becomings’는 『올랜도』의 이미지를 무대로 가져오는 데에는 가까스로 성공하지만 원작의 핵심이라 할 여성과 남성의 성반전에서 오는 전복의 감각까지 가져오지는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두 번째 작품이 아름다운 무대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리히터의 음악에 맞춰 정교한 선과 날카로운 예각을 만들어내는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이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모리츠의 미래적인 의상 덕분이다. 초연이 올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앞으로 공연될 기회가 많은 작품인 만큼 재연이 거듭될수록 더 나아진 무대를 보게 되리라 기대한다.


〈울프 웍스〉의 두 번째 작품 ‘Becomings’ ⓒTristram Kenton


  문학 속에서 사랑으로 인해 파멸한 여성 주인공, 또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여성 인물 또는 여성 예술가의 생애는 창작자에게 강렬한 창작의 영감을 주기 마련이다. (왜 ‘인물’이 아니라 ‘여성’이라 칭하는지는 창작되어 무대에 올려진 숱한 레퍼런스들을 보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첼리스트〉는 악기와 연주자의 파드되를 통해, 〈울프 웍스〉는 작가와 작품을 무대 위에서 만나게 함으로써 작품의 모티브가 된 여성 예술가의 비극에 집중하지 않고도 예술가와 그 예술을 무대에 올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두 작품은 창작자들이 신파적 시선을 거두기만 해도 실제로 일어난 비극에 좀 더 예의를 갖추고 접근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예시다. 그렇기에 두 작품의 의의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로열오페라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