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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언택트 공연 6 - 이별살인 가해자에 대한 끝없는 연민, 스페인국립무용단 <카르멘>

8월 들어 조금씩 정상화되는 듯했던 공연예술계가 코로나 2차 대유행이 시작되면서 다시금 얼어붙고 있다. 공공극장들을 중심으로 연일 공연 취소 소식이 전해지고, 조심스럽게 장기 공연을 이어가고 있던 뮤지컬 쪽에서도 출연진 중 확진자가 나오며 조기 종연 소식이 줄을 잇고 있다. 2단계 방역 강화가 전국적으로 시행됨에 따라 이렇듯 움츠러든 공연계에 언제 다시 활기가 돌게 될지는 기약이 없어졌다. 

 

코로나 팬데믹의 장기화로 올해의 기획공연을 모두 취소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된 LG아트센터에서는 온라인으로 눈길을 돌려 디지털 스테이지 ‘CoM On(CoMPAS Online)’ 시리즈를 상영하고 있다. 지난 5월 8일부터 7월 3일까지 매주 금요일 온라인에서 상영한 ‘CoM On’ 시즌 1의 공연 아홉 편이 30만 뷰를 기록하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고, 7월 31일부터는 시즌 2가 진행 중이다. 시즌 1에 이어 시즌 2에서도 무용 공연의 비중이 높아 올해 잦은 공연 취소 소식으로 공연장 방문이 어려웠던 무용 관객들에게는 가뭄의 단비가 되고 있다.  

 

이미 LG아트센터 기획공연으로 국내 관객들과 만난 바 있는 스페인국립무용단의 <카르멘>과 프렐조카주발레단의 <프레스코화> 외에도 로사스무용단의 <레인(Rain)>, 아직 국내 공연계에는 낯선 이름인 요안 부르주아의 댄스필름 <위대한 유령(Great Ghost)> 등이 대기 중이다.

 

이 가운데 스페인국립무용단의 <카르멘>은 2016년 안무가 요한 잉에르에게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안무가상의 영광을 안겨준 작품으로, 지난 8월 7일 네이버TV를 통해 상영된 버전은 2015년 스페인 마드리드의 테아트로 델 라 사르수엘라에서 공연된 실황이다.

 


<카르멘>은 비제의 오페라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원작소설의 존재를 잊어버리거나 다른 장르로도 활발하게 각색되고 있다는 사실이 희미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마츠 에크, 롤랑 프티, 알베르토 알론소 등 자기 세계가 뚜렷한 안무가들이 오페라의 아성에 도전해 자신의 해석을 담은 새로운 안무작을 만들어내면서도 비제의 음악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새로운 작품들이 계속해서 나오지만 원작이 아닌 오페라가 비교 대상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잉에르의 <카르멘>에서 음악을 맡은 작곡가 마크 알바레즈는 알론소가 사용한 로디온 셰드린 편곡의 ‘카르멘 모음곡’을 기본으로 하되 후반부에 새로운 음악을 추가해 파멸로 달려가는 치정극에 음산하고 파괴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알바레즈의 현대적인 음악은 미니멀한 무대세트와 어우러지며 작품의 분위기를 차갑게 가라앉히는 데 일조한다. 

오페라가 세비야 광장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전개되는 열정과 집착의 이야기라면 잉에르의 발레는 지하감옥 같은 어두운 공간에서 인간의 심연과 마주하는 폭력과 살인의 이야기다. 시간이나 장소성이 지워진 공간은 인간 내면의 어둠을 은유하는 듯하고 무대 위에 단출하게 놓인 아홉 개의 프리즘은 본성을 비추는 거울처럼 보인다. 그리고 순수와 무구를 상징하는 소년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해 비극을 지켜본다. 한국인 단원 박예지가 소년을 맡아 작품의 내러티브를 이끄는데, 그의 무용적 역량과 무관하게 이러한 관찰자라는 배역은 전지적 시점으로 작품을 내려다보는 안무가의 자의식을 드러내며 작품에의 몰입을 방해한다. 



사실 순수한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어른들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세계는 예술작품에 사회 비판적 코드를 담고자 할 때 창작자들이 손쉽게 선택해온, 매우 도식화된 진부한 접근이다. <카르멘>의 세계가 잔인하고 폭력적인 것은 카르멘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도둑질과 사기 등 범죄를 생계수단으로 삼는 하층민이기 때문이지만 이러한 사회구조는 소년의 순수한 눈에는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다. 게다가 ‘소년’으로 형상화되는 무구함은 과연 그렇듯 백지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지, 오히려 소년이라는 존재에 불가능한 이상을 담아 편리한 타자화를 한 것은 아닌지 또 다른 질문들을 낳는다.

이 같은 질문들과는 별개로, 안무를 수행해내는 무용수들의 기량과 호흡은 매우 탄탄하다. 목을 꺾거나 몸을 비틀어 발레의 정형화된 동작에 파격을 가하거나 단단한 하체로 바닥을 디디느라 에너지가 공중으로 분산되지 않고 끌어내려져 무게감을 전달하는 움직임들은 카르멘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돈 호세의 마음처럼 무겁고 끈끈한 인상을 전달하며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아홉 개의 프리즘은 벽이 되었다가 문이 되기도 하고, 어느 순간 조명이 되기도, 다시 거울이 되기도 하며 단조로운 무대를 생동감 있게 변화시킨다.


ⓒ Jesús Vallinas

<카르멘>의 리메이크에 도전하는 후대의 창작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유혹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킨 채 죽음을 맞이하는 카르멘이 아니라 순정을 바친 여성에게 배신당하고 살인자가 되어버리는 돈 호세에게 감정이입하며 그의 목소리를 작품에 반영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데, 잉에르의 <카르멘>도 착실히 그 길을 따른다. 

지난 2017년 공연에 무용단과 함께 내한한 피노 알로사 스페인국립무용단 공동 예술감독은 기자간담회에서 극의 흐름이 돈 호세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전반적으로 오페라보다 호세의 역할이 강조됐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은 비교 대상이 원작소설이 아니라 오페라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에 가깝다. 원작소설은 호세가 안달루시아 지방을 여행 중이던 고고학자를 만나 카르멘을 살해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회고담으로 진행되며, 그 안에서 카르멘의 목소리는 철저히 호세의 기억에 의해 재구성된 것이다. 즉, 각색에서 호세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오페라가 애써 만들어놓은 카르멘의 자리를 좁히고 원작으로 되돌아가는 것에 불과하지만 어쩐 일인지 후대의 창작자들은 원작을 지우고 돈 호세의 관점으로 작품을 전개하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기 일쑤다.

이 작품을 카르멘에 포커스를 두어 바라본다면 ‘자신이 지닌 치명적인 매력으로 유혹한 남자를 파멸시키는 팜므 파탈의 이야기’로, 렌즈를 돈 호세 쪽으로 옮겨본다면 ‘순정을 다 바친 여성에게 배신당하고 살인자로 전락하는 순진한 남자의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렌즈에는 함정이 있다. 두 개의 관점은 얼핏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 ‘나쁜 여성의 유혹에 넘어간 죄 없는 청년이 살인자가 되어 인생을 망치는 이야기’로 수렴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정확히 이별살인의 가해자들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카르멘을 죽인 호세는 모든 것이 사랑 때문이었다고, 카르멘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이 그녀를 죽이는 것밖에 없었다고 강변한다.


ⓒ Jesús Vallinas 

관객들은 착실한 군인이었던 그가 도둑 떼와 어울려 다니는 부랑자로 전락한 것으로도 모자라 카르멘의 마음마저 잃고 절망에 빠져 살인을 저지르게 된 데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이렇듯 연민을 자아내는 서사에서 이미 목숨을 잃어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카르멘의 목소리는 빠져 있다. 창작자들은 한 목소리로 호세를 유혹하고 배신했기에 카르멘이 살해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데, 잉에르 역시 이러한 창작자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고 있다. 연일 폭력과 살인으로 얼룩진 이별범죄가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현실에서 우리가 언제까지 카르멘을 죽인 호세를 안타까워하며 이 작품을 바라봐야 하는지, 예술이라는 렌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때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LG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