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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과도한 구성과 가능성의 춤 - 김평수의 <소나기 - 잠깐 내린 비>

부산문화재단이 2014년을 시작으로 매년 공모하는 ‘청년연출가 작품 제작 지원’ 사업의 목적은 부산지역 청년연출가들의 창작 욕구를 해소하고 공연예술 분야의 작품 제작 지원을 통해 지역공연문화 활성화 및 자생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장르에 상관없이 경쟁하기 때문에 극적 구성이 강한 연극, 뮤지컬 분야가 유리한 면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용의 약진이 눈에 띈다. 무용이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것은 2015년 박연정의 <똥>, 2017년 김수현의 에 이어 올해 김평수의 <소나기 - 잠깐 내린 비>가 세 번째다. 




<소나기 - 잠깐 내린 비>의 모티브는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이다. 소설 <소나기>는 한동안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잘 알려진 국민소설이다. <소나기 - 잠깐 내린 비>는 소설 내용과 달리 소녀가 죽지 않았다. 소녀의 집안은 산업화에 떠밀려 도시로 이사 갔다. 몰락한 시골 양반 집안이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존경과 명예는 애당초 기대하지 않았지만, 가족이 먹고 살 길부터 찾아야 할 정도로 도시 생활이 절박할지 몰랐다. 소녀와 가족은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고, 소녀는 식당과 편의점을 전전하며 자기 한 몸 건사하기에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도시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개미지옥 같은 곳이었다. 살려고 발버둥칠수록 점점 수렁으로 빨려들기만 했다. 




소년도 도시로 향했다. 소녀가 떠난 후 고향 청년 대부분이 도시로 향했고, 혹시 소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도 있어 무작정 집을 떠났다. 일을 찾아 도시로 간 소년과 소녀는 한국사회의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한 존재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시커먼 아가리 속에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집어넣었다. 조선작의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의 주인공 영자는 도시에서 식모, 버스차장, 창녀로 전전하다가 불에 타 죽는다. 소설은 산업화와 가부장제에 밀려난 도시 하층민의 삶을 생생하게 그린다. <소나기 - 잠깐 내린 비>의 소녀에게 영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소나기 - 잠깐 내린 비>는 ‘프롤로그’, ‘1장 소나가’, ‘2장 잠깐 내린 비’, ‘에필로그’로 짜였다. 작품의 배경과 분위기를 제시한 프롤로그와 1장에서 소녀와 소년의 순수한 사랑과 천진난만했던 시절이 흥겹고 격동적인 군무로 표현된다. 2장의 배경은 도시다. 순수를 잃어버린 채 단지 살아남기 위해 자본이 던진 욕망이라는 먹잇감을 좇는 영혼들. 하지만 그 욕망의 열매는 영원히 그들 몫이 아니었다. 2장에는 이 시대 방황하는 청년들의 모습, 소년과 소년의 재회, 시간을 되돌려 삶을 온통 흔들었던 그날의 비를 맞기까지를 담았다. 2장 후반부터는 잃어버린 순수의 갈증을 채우고, 자본의 욕망을 씻어 내릴 소나기를 맞이하며 마무리한다.

김평수를 제외한 춤꾼 9명이 젊고 어리지만, 기량은 만만치 않다. 기량 편차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움직임과 감정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간혹 보이지만, 작품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장별 구분이 뚜렷하고, 서사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군무와 솔로 듀엣을 골고루 배치한 안무의 치밀함도 엿보인다. 이러한 장점은 안무 계획이 분명했고, 계획을 충실하게 따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장점이 단점으로 작용할 때도 있었다. 장별 구분을 주로 암전으로 해결했는데, 빈번한 암전이 오히려 흐름을 끊는 역효과를 주었다. 또한 85분이라는 공연 시간은 흐름을 처지게 했다. 서사를 놓치지는 않았다고 해도, 곳곳에서 끊기고 늘어진다면 관객이 흐름을 놓칠 가능성이 커진다. 안무는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라지만 안무자 입장에서는 자세하게 전달하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강조를 위한 반복과 불필요한 설명이 더해졌다. 자신의 구상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 작품 길이는 이렇게 해서 길어진다. 친절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되면 관객이 개입할 여지가 줄어든다. 작품에는 연출적으로 철저하게 계산한 빈틈이 있는 것이 좋다. 
 

연출력은 배우고 경험해야 한다. 한국 무용교육은 안무법과 연출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젊은 춤꾼들은 자신의 감각과 경험에 의지한다. 완성도 높은 대작이 잘 나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김평수의 안무와 연출력은 높은 편이다. 우선 자신이 구상한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풀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이것은 중요하다. 많은 춤꾼이 이 지점에서부터 헤맨다. 김평수가 85분을 춤으로 풀어낸 것은 다음 단계로 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청년연출가 작품제작지원’ 사업의 목적은 청년 예술가의 창작 욕구 해소에 있다. 여기서 창작 욕구란 자신의 역량을 한계까지 사용한 창작을 말한다. 30분 안쪽의 중단편을 소극장 규모에서 공연하는 것과 중·대극장에서 60분 이상 공연할 작품을 짜는 일은 차원이 다르다. 쉽게 경험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이 사업이 중요하다. 선정된 청년 예술가는 자신의 역량이 어디까지인지 알게 된다. 변화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부산시립무용단 안무자 같은 공공무용단 안무자 선정에서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20명 이상으로 대극장용 작품을 안무한 경험이다. 부산에서 활동하는 춤꾼 중에 이 조건을 만족할 사람은 거의 없다. 지역 무용계가 지역 공공무용단 안무자를 해당 지역에서 뽑아야 한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잘 안 되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런 부분 때문이다. 경험할 기회를 주는 것이 ‘청년연출가 작품제작지원’ 사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소나기 - 잠깐 내린 비>에서 기대할 것은 가능성이다. 작품의 개선의 가능성이 얼마나 있는지를 봐야 한다. 다행히 다년도 지원 심의에 통과해 내년에 재공연할 수 있게 되었었다고 한다. 암전 사용을 최소로 하면서 흐름 단절을 막을 방법을 찾고, 캐릭터를 드러내는 안무를 재구성하고, 도식적 군무 구도에 변화를 주어 명확한 표현과 주제 전달력을 높여야 한다. 재공연을 기다리는 이들의 기대를 창작의 동력으로 삼기 바란다.


글_ 이상헌(춤비평가)
사진제공_ 박병민(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