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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사유의 순수한 이미지- EGERO 기획공연 <비빔 – 현상>

현대무용 공연에 비보이(B-boy, Break dance-boy)가 출연하거나 비보이팀과 협업하는 일이 더는 낯설지 않다. 비보이는 비보잉 춤을 추는 사람으로 비보잉은 ‘힙합’의 4요소(랩, 디제잉, 그래피티, 비보잉) 중 춤을 말한다. ‘힙합춤’에는 비보잉, 락킹(Locking), 팝핀(Popping)이 포함돼 비보이의 춤은 이 세 가지를 포함한다. ‘힙합춤’은 미국에서 1970년부터 시작해 우리나라에는 1980년대 초부터 유행이 시작됐다. 힙합춤의 시작은 거리이다. 그래서 ‘스트리트 댄스’라고도 부른다. 힙합춤이 발레나 현대무용처럼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이유는 거리에서 시작해 클럽을 거치면서 배틀(battle, 춤 대결) 형식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춤 배틀의 특성상 기술적인 면을 잘 공유하지 않는다. 힙합춤은 배틀이라는 특징을 그대로 공연으로 옮겼다. 에게로 안무자 이용진이 비보잉이 “현대무용과 달리 매우 호전적인 춤 문화를 가지고 있다”라고 한 이유가 힙합춤이 거쳐 온 역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박병민

 

지난달 11, 12일 부산 민주공원 소극장에서 열린 EGERO 기획공연 <비빔 – 현상>(안무, 연출 이용진)에서 비보잉(Possi Crew)과 현대무용(에게로)의 협업이 이루어졌다. 안무자 이용진도 현대무용에 입문하기 전 비보이여서 누구보다 비보이의 생리를 잘 알고, 힙합춤의 특징도 경험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용진은 “현재 컨템포러리 댄스의 흐름에서 스트리트 댄스의 움직임 언어는 배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며, 스트리트 댄스 역시 급변하고 발전하는 가운데 현대무용의 표현적 기법과 다양한 흐름을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한다. 다만, 움직임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는 데 시간과 경험이 필요해 이 공연이 소통을 위한 작업으로 의미가 있다고 전제한다. 이런 기획 의도는 안무에 그대로 드러난다.

 

작품에서 Possi Crew 4명의 춤은 비보이 기술을 극도로 억제한 채로 이루어진다. 안무자가 비보이의 에너지를 적절히 조절하지 않으면 자극적 이미지로만 남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비보이가 현대무용의 언어를 배우고, 현대무용은 비보이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 가늠하는 장이 되었다. 비보이의 폭발적인 신명을 기대한 관객 입장에서는 다소 실망할 부분이다.

 

 

ⓒ박병민

 

<비빔-현상>은 이용진이 안무한 두 전작 <Root>(2012년)와 <흐름>(2015년)의 주제와 움직임을 차용해 재구성하였다. 그렇다고 두 작품의 부분을 붙여넣기 식으로 짜깁기한 것은 아니다. ‘생각의 흐름’, ‘직관’, ‘두려움’, ‘잠재의식’ 등 이용진이 천착해 온 현상에 영향을 끼치는 관념적 모티브의 연속선상에 오래된 새로움을 하나 얹어 놓았다. <비빔-현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춤은 사유의 순수한 이미지’라는 문장이 적절하다. 안무자가 말하는 방식을 대입하면, ‘사유’는 ‘심층적 심리상태’이고 ‘이미지’는 정신이 현상으로 드러나는 ‘표피층’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수한’인데, 이것은 사유(심층적 심리상태)와 이미지(표피층)의 ‘관계’ 혹은 두 층위가 이어지는 ‘과정’이다. 모든 사유가 이미지화하지 못하는 것은 이 관계와 과정의 문제다. 순수하지 못한 이미지도 있을 수 있지만, 순수하지 못하다면 굳이 ‘이미지’의 근거나 배경을 ‘사유’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박병민

 

작품 구성은 단순하다. 심층을 상징하는 검은 옷의 남자(강건)와 표피층을 상징하는 흰옷의 여자(조은정)가 중심이다. 안무자는 반대로 설정했지만, 오히려 두 상징을 바꾸어 보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기 쉬웠다. 강건(심층)의 존재는 일본 전통 인형극 ‘분라쿠’에서 검은 옷을 입고 인형을 조정하는 인형사 ‘닌교즈카이’를 떠올린다. 무대에 있지만 없는 존재인 ‘닌교즈카이’ 3명 중에 인형 얼굴과 오른손 조정을 맡는 ‘오모즈카이’만 얼굴을 드러낼 수 있다. 강건은 간혹 얼굴을 드러내는 존재로 우리가 간혹 알아차리는 ‘심층’이다. 그 뒤에는 얼굴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더 깊은 층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층위는 은유적으로 표현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니 드러나는 ‘이미지’ 바로 아래에서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당하는, 스스로 도저히 드러날 수 없는 층위를 다룰 수밖에 없다. 강건과 조은정은 심층과 표층을 맡아 두 층위의 관계와 흐름을 적절한 완급으로 표현했다. 특히 조은정은 작품을 끌고 나가면서 장이 바뀔 때마다 춤과 감정의 변화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렇다고 조은정이 돋보인 것이 그의 역량 때문만은 아니다. 강건은 중성적 움직임으로 마치 ‘닌교즈카이’가 인형을 조정하는 것처럼 받쳐주었고, 비보이의 정제된 움직임도 조은정을 돋보이게 했다. 이 모든 것이 안무자의 의도이고 두 전작에서 다룬 주제를 솜씨 있게 재구성한 결과다. 


춤은 사변적으로 흐르기 쉽다. 이것이 춤의 약점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강력한 장점으로 작용한다. 언어가 멈춘 자리, 말이 멈춘 순간에 사유를 이미지화한 춤은 그 어떤 표현보다 강력하다. 이용진이 고민한 지점은 춤이 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하지 못하는 역할, 말로 포착할 수 없는 사유, 사유 이전의 직관을 포착하는 몸의 흐름이지 싶다. 몸은 단절적일 수 없다. 단절된 몸은 죽음이고 생명의 몸은 언제나 일렁인다. 몸은 사유를 담고 이미지를 입어 ‘심상(心象)’이 된다. 다만, 이러한 안무 의도가 사변(思辨)으로 치우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래야 춤이 어렵다는 세간의 푸념을 감당하고, 현존하는 몸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글_ 이상헌(춤 비평가)
사진제공_ 박병민(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