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유의 코로나 팬데믹 위기 속에서 해외 공연단체의 내한공연을 모두 취소하고 디지털스테이지라는 온라인 상영 방식을 선보였던 LG아트센터가 올해는 온라인 상영과 오프라인 공연이라는 투 트랙 전략으로 기획공연을 진행한다. 온라인 상영 프로그램은 지난해 내한공연을 계획했던 매튜 본의 <레드슈즈>를 비롯해 국내 관객들 앞에 선보인 적 없는 네 편의 ‘매튜 본 컬렉션’과 아비뇽페스티벌 출품작 다섯 편(연극 4편, 무용 1편)의 ‘아비뇽 시네마’로 구성되었다.
지난해 유료로 상영한 램버트댄스컴퍼니의 <내면으로부터>, 크리스탈 파이트의 <검찰관>과 티모페이 쿨랴빈의 <오네긴>이 좋은 반응을 얻은 것도 기획공연에 온라인 유료관람 서비스를 포함시킬 수 있게 된 배경으로 읽힌다. 이뿐 아니라 국립극장에서는 2014년부터 영국국립극장의 공연물을 온라인으로 상영하는 NT 라이브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바 있고 코로나 팬데믹을 겪고 있는 공연예술계가 네이버TV의 후원라이브로 다수의 공연들을 온라인에서 유료 서비스하고 있는 점 또한 온라인으로 만나는 공연을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것으로 만들고 있다.
여성과 남성을 모두 매혹하는 현대의 카르멘, 그리고 진부한 팜므파탈로 남은 돈 호세
매튜 본 컬렉션은 3월 한 달 내내 <레드슈즈>, <카 맨>, <신데렐라>, <로미오와 줄리엣> 네 편을 금요일과 토요일에 각 2회씩 상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각 상영분은 6시간 동안 공개되어 당일 내 다시 보기가 가능하도록 했다. <카 맨>은 2015년, <신데렐라>는 2017년, <레드슈즈>와 <로미오와 줄리엣>은 2019년 공연물로 장소는 모두 런던 새들러스웰스의 공연실황이다.
오페라 <카르멘(Carmen)>의 제목을 위트 있게 오마주한 매튜 본의 2000년작 <카 맨(The Car Man>은 비제의 음악을 사용하되, 줄거리는 영화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를 각색해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었다. 원작은 제임스 M. 케인이 1934년에 소설로 발표했고 이후 할리우드에서 46년과 81년 두 차례 영화화되었는데, 매튜 본은 이를 무대용 작품으로 각색하며 원작소설의 주인공이 아닌 46년 영화의 주연배우 라나 터너에게서 주인공 이름을 따왔다.
오페라 <카르멘>과 영화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모두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몰린 남자가 애정 관계에 있는 여자를 살해하는 이야기지만 매튜 본의 <카 맨>은 원작의 치정극을 한 번 더 비틀어 더욱 잔인한 막장드라마로 치닫는다.
배경은 1960년대 미국 중서부,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하모니마을이다. 디노가 운영하고 있는 자동차 정비소 겸 식당에 어느 날 신원을 알 수 없는 떠돌이 사내 루카가 찾아온다. 제목의 ‘Car Man’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곧 디노에게 고용되어 정비공으로 일하게 되는 루카는 담배공장에서 돈 호세를 유혹한 카르멘의 남성형이다. 즉, 매튜 본의 <카 맨>은 남자 카르멘을 중심에 두고 벌어지는 치정과 살인의 이야기다.
디노의 아내 라나는 애정 없는 결혼생활 속에서 권태를 느끼다 루카와의 위험한 사랑에 빠져들고, 둘은 밀회 장면을 목격한 디노를 우발적으로 살해한다. 그러나 <카 맨>이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의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은 여기까지로, 이후의 전개는 원작과 완전히 다른 길을 간다. 루카의 수컷다운 매력에 빠지는 건 라나만이 아니다. 라나의 여동생 리타의 연인이자 자동차 정비공인 안젤로 역시 루카에게 매료되고, 루카는 라나와 안젤로 사이를 오가며 애정 행각을 벌인다.
루카와 안젤로의 자동차 러브신은 암시적으로 연출되었지만 12세 이상 관람가 등급으로는 상당히 수위가 높으며, 이 장면 외에도 정비공들이 휴식시간에 샤워를 하는 장면이나 정비공들과 연인들 간에 펼쳐지는 난교를 연상케 하는 장면 등 작품 전체는 터질 듯한 성적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적 에너지는 주인공들을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몰고 간다.
매튜 본은 접점이라곤 없는 두 작품, <카르멘>과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를 솜씨 좋게 엮어 현대의 새로운 남성 카르멘을 창조해내고 있다. 그렇다면 매튜 본의 새로운 돈 호세는 누구일까. 라나에 의해 디노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안젤로에게 심중이 기운다. 그러나 복수를 위해 탈옥한 안젤로가 루카를 다시 마주하고도 애증에 복받쳐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루카와 안젤로 사이에 오가는 감정을 깨닫고 배신감에 휩싸인 라나가 루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만다. 매튜 본의 돈 호세는 안젤로가 아니라 라나였던 것이다.
매튜 본은 반전과 서스펜스, 역동적인 안무와 폭발적인 에너지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이 긴장감 넘치는 무대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지만 캐릭터의 조형 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긴다. 집시 카르멘을 떠돌이 일용노동자 루카로 성별 전환하고 그에게 매혹되는 또 다른 정비공 안젤로의 존재를 통해 대부분의 극에서 이성애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사를 뒤집은 것은 놀랄 만한 재해석이지만, 또 다른 주인공으로 드라마의 축을 지탱하고 있는 라나는 그 캐릭터의 낡음과 진부함으로 다시금 놀라움을 안겨준다.
늙은 자본가 디노의 젊고 예쁜 트로피와이프인 라나가 결혼생활의 권태를 느끼고 있는 것은 부부관계 내에서 지위가 낮고 경제력이 없기 때문이지(라나는 디노의 식당 카운터에서 돈을 관리하는 게 아니라 여동생 리타와 함께 서빙을 하며 디노는 라나를 고용인 대하듯 부린다) 남편과의 성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아서가 아니다(물론 성생활 또한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카르멘이 담배공장에서 일하며 관리자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후일 도둑질과 살인을 저지르는 것 역시 낮은 사회적 지위와 빈곤 때문이지만 원작자인 메리메도, 후대의 각색자들도 이보다는 그가 집시이기 때문에 정절을 지키지 않고 자유분방한 연애에 몸을 맡기다 마침내 살인을 유발한다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라나의 모델인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의 주인공 코라도 프랭크와 합심해 남편을 살해하는 데 성공하지만 곧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돌리는 프랭크에 대한 지독한 불신에 빠진다. 성적 일탈이 주는 해방감은 너무도 빨리 휘발된다.
이 작품이 20년 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현재의 시각으로는 지체되어 보이는 것이라고 변명하기에는 작품 속 또 다른 돈 호세인 안젤로가 살인에 이르기까지의 서사를 촘촘하게 부여받은 것에 비해 너무나 게으른 접근이며, 안젤로에게 살인범 누명을 씌우는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라나가 강간미수를 연출하도록 한 장면은 여성이 마음먹고 상황을 조작하면 저지르지도 않은 성폭행 혐의를 뒤집어쓸 수 있다는 남성들의 무고 신화를 드러내는 전형적인 여성혐오다. 라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루카를 살해함으로써 새로운 돈 호세가 되지만 정작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돈 호세의 안타까운 서사는 안젤로에게 넘겨준 채 진부한 팜므파탈로만 남고 말았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LG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