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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2015.07.29
친일예술가를 위한 변명

  일본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1950년에 만든 <라쇼몽>은 세계 고전 명작으로 손꼽히는 영화입니다. <라쇼몽>은 숲속에서 살해된 사무라이의 죽음을 두고 사무라이의 부인, 사무라이를 죽인 산적, 목격자인 나무꾼의 엇갈린 진술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 세 명의 진술은 엇갈립니다. 이 영화는, 진실은 하나이지만 사람마다 보고, 듣고, 느끼고, 해석하는 것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과 사람의 이기심이 진실을 왜곡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이 영화를 통해 “하나의 사건을 여러 가지의 시각으로 재현하는 방식”이란 뜻으로 ‘라쇼몽 효과(Rashomon Effect)’가 유래했고, 이 기법은 철학, 해석학, 심리학 등 학문분야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저는 원로무용가의 생애사(生涯史)와 특정 무용주제를 다루는 구술사(口述史) 분야의 연구자로서 2008년부터 지금까지 구술채록현장에 나가고 있습니다. 구술채록현장에서 만나는 무용가, 교육자, 행정가 등으로부터 증언을 채집하다보면, 라쇼몽 효과를 저절로 떠올리게 됩니다. 사건의 실체는 분명 하나인데, 구술자마다 자신이 처했던 상황에서 따라 어찌나 다르게 진술을 하는지… 그래서 구술사 연구자들은 ‘기억의 주관성’에 대해 설명할 때 영화 <라쇼몽>을 예시로 곧잘 사용합니다.


  제가 영화 <라쇼몽>을 극적으로 사용했던 때는 2009년 최승희 춤축제 국제포럼에서입니다. ‘다시 최승희를 말한다’라는 주제로 열렸던 이 포럼에서 저는 <한국에서의 최승희 춤 연구, 어디까지 와 있나?>를 발제했습니다. 최승희에 대한 연구를 주제별, 역사적으로 다루면서 무용연구자들이 최승희를 전설적인 무용가로서만 다루지 말고 춤의 실체에 대해서도 접근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요구에는 근대무용 연구자들이 에둘러가는 최승희의 친일문제가 포함된 것입니다. 주최 측에서 친일문제를 피할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 있었고, 한 개인의 무용사를 다루면서 과오가 있다고 해서 진실을 외면하거나 특정 시기를 누락하는 것은 올바른 연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있는 그대로를 보고했을 뿐, 친일청산이나 애국논리와 같은 거창한 의도가 전제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생각은 참으로 순진했습니다. 그 자리는 최승희의 기라성 같은 제자들과 가족들이 생존해서 “최승희 선생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증언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승희’라는 이름 석 자만 들어도 가슴을 설레는 사람들, 제2의 최승희를 꿈꾸는 무용학도들, 그리고 최승희의 고향이라고 알려진 홍천의 주민들이 객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또, 당시는 최승희가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대상에 오르내리고 있어서 민감하던 때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친일”이라는 용어를 꺼냈으니 객석이 술렁거리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토론석상에 오르기 전에 주최측에서 “친일”에 대한 발언을 자제해달라는 쪽지를 주었습니다. 공개토론에서 제자 중의 한명으로부터 “당시의 전시상황을 모르는 어린 친구”라며 질책을 들었고, 우호군이라고 믿었던 학자는 “넓은 땅덩어리를 활보하던 중국무용가의 반일행적과 좁은 땅에서 어렵게 활동하던 우리 무용가의 친일행적을 어떻게 비교가능한가”라며 힐난했습니다. 토론자 한분은 어딘가에 전화를 하시더니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명단에서 우리 최승희 여사가 빠졌다고 합니다“라고 전해주었습니다. 청중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로 열광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때 그 장소에서의 발언들, 액션들 하나하나가 마치 영화의 장면들처럼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제가 그 당시를 이렇게 묘사하는 것도, 저의 기억이란 것도 저의 입장에서 맞추어진 ‘라쇼몽 효과’일 수 있습니다. 제가 그날 발언의 기회를 얻어서 했던 것도 영화 <라쇼몽>에서 부각되었던 ‘시점(視點)’에 관한 것입니다. 즉, ”영화 <라쇼몽>에 등장하는 세 명의 진술자들처럼 최승희의 친일문제에 대해 접근하는 사람들의 시점은 제각각이며, 나는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최승희의 예술성과는 별개로 신문기사와 같은 명백한 증거에 의거하여 최승희의 친일행적을 언급했을 뿐이며, 앞으로도 그녀의 친일행적과 그 결과인 창작작품을 외면하지 않고 연구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조선무용’을 세계만방에 알렸던 ‘조선이 낳은 세계적인 무용가’, ‘동양의 이사도라 던컨’ 최승희가 친일행적을 한 것이 믿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최승희는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이든, 자신의 무용을 지키기 위한 것이든, 분명히 친일 언동과 행각을 기록에 남겼습니다. 일본 신사에서 참배하며 “내 조국은 일본”이라며, “나의 임무는 일본 예술문화를 위해 정진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군사후원연맹 후원금, 조선군사보급협회 운영기금 등으로 7만5,000원(현 50억원)의 거액을 헌납하였습니다. 이런 지울 수 없는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최승희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녀의 “친일행위는 인정되지만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드물게 조선문화를 세계에 알린 점 등이 고려되어” 대상에서 기각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의도적으로, 주도적으로 협력했던 우리 예술가들의 행적은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지금과 같이 IT 매체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 대중적 파급 효과가 높았던 예술을 통해 내선일체를 합리화하고, 또 지원병을 강요했던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분명한 반성과 비판이 필요했습니다. 선대 예술가들의 업적만 미화하고 과오는 은폐, 축소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인식입니다. 이제 이런 역사의식은 극복해야합니다. 무조건 과거를 미화할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은 반성하고, 또 비판을 통해서 한 단계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불거지고 있는 국립국악원의 국악인 동상공원과 관련한 친일 논란에 주목이 갑니다. 언론과 국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김기수, 함화진의 동상을 철거하라는 지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에 대한 국립국악원의 대응이 마뜩치 않습니다. 동상공원에 흉상으로 세워지는 국악인들이 있었기에 국립국악원이 오늘날과 같이 국가의 중추적 음악기관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민 정서에 위배될 정도라면 재검토하겠다“라는 대응은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친일파 동상에 친일 행적을 추가기재하겠다”은 반응은 참담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섯 동상 중에서 부역행위를 한 두 동상에 그들의 친일행적을 기록한 판을 걸어 두겠다는 소리로 들립니다. 언론이나 대중이 원하는 바는 두 국악인의 과거 행적을 따지고 물어 “친일파”로 분류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동상공원의 표식에 “이 공원에 들어선 선대 국악인들이 남긴 업적과 영향력은 지대했지만 일제의 폭압 아래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도 남겼으므로 이에 대해 통탄하며 앞으로의 거울로 삼겠다”는 국립국악원의 입장 표명이 중요했던 겁니다. 광복 70주년이 다가옵니다. 친일 예술에 대한 지혜로운 대처가 필요할 때입니다.


 


글_ 편집주간 최해리(무용인류학자,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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