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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_ 니체의 춤 철학


2013년 11월
2013.11.12
니체의 몸, 예술생리학 그리고 현대무용 (I)


  편집자 주: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가 현대철학에 끼친 영향을 사람들은 흔히 지축을 뒤흔든 지각변동에 비유한다. 니체는 스스로 자기로 말미암아 세계사가 두 동강이 난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시대가 신봉했던 진리와 가치 체계를 전도시켰으며,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제시한다. 니체는 철학뿐만 아니라 현대예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현대무용은 몸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니체의 철학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 니체 철학, 특히 그의 몸철학예술생리학이 현대무용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펴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아래의 글은 지난 97일 한국무용기록학회 주최로 이화여대에서 있었던 강연 원고를 바탕으로 한다.  





니체, 파괴와 생성의 철학자


 니체는 1889년 1월 3일 이탈리아 토리노의 칼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의식을 잃는다. 다음 세기는 자신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니체의 예언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왔다. 그의 철학에 대한 찬양은 10년간의 의식불명의 광인이 된 니체만이 듣지 못했을 뿐이었다.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1888년에 출간된 자서전인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다이너마이트’에 비유한다. 다이너마이트가 새로운 길을 내기위해 굴을 뚫고, 낡은 건물을 해체하듯이 니체는 자신의 철학이 병든 유럽문화를 폭파시키고 새로운 길을 여는 역할을 할 것이라 확신한다.


 유럽문화는 왜 해체되어야하는가? 니체는 유럽문화를 ‘생리학적인 자기모순’으로 규정한다. 그 이유는 유럽문화가 ‘몰락하는 가치들, 즉 허무주의적 가치들’을 신성한 것으로 신봉하기 때문이다. 유럽문화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 비롯된 형이상학과 그리스도교 도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데아’나 그리스도교의 ‘신’은 초월적 존재이면서도, 모든 존재자들과 가치의 출발점이다. 인간 역시 이데아와 신의 섭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 이곳’의 구체적인 삶을 거부하고 추상적인 환상을 쫓아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형이상학적-신학적 세계관은 무에 대한 사랑이며, 따라서 생리학적 차원에서 자기모순인 것이다. 신과 피안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근대에서도 형이상학과 그리스도교적 전통은 내적으로 면면히 흐르고 있다. 이데아나 신의자리에 이성, 정신, 주체가, 그리스도교 도덕의 자리에 양심이나 보편적 도덕률이 대신한다. 영원한 행복의 거처인 신의 나라는 이제 세속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유토피아가 그것을 대체한다. 근대는 전근대의 극복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전-근대의 신학적-형이상학적 전통을 세속화시켰을 뿐이다.

니체는 모든 가치들의 근원을 파헤치는 이른바 ‘계보학적 탐구’를 통하여 형이상학과 그리스도교적 가치들의 절대적 권리와 정당성 요구를 물음에 부친다. 계보학적 탐구의 결론은 모든 가치들이 현실의 삶에서 출발하며 가치의 창조자들도 인간 자신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관점에서 형이상학과 그리스도교 도덕은 원인과 결과를 전도시킨 결과물이다. 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을 지배하게 된 배경에는 온당치 못한 약자들의 강자에 대한 원한이 있다. 유럽 가치의 기원을 파헤쳐 그것의 허구를 폭로한 니체는 자신의 주장을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로 요약한다. 니체에게 신이란 그리스도교적 신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세계와 인간에게 절대적 가치와 규범을 제시했던 일체의 절대주의적 주장 모두를 지칭한다. 모든 가치의 발원자인 신의 죽음은 신에게서 비롯된 모든 의미와 가치의 종말을 뜻한다. 지금까지 인간들을 지배했던 가치의 몰락과 새로운 가치의 부재상태를 니체는 ‘니힐리즘’이라고 부른다. 니체는 니힐리즘을 삶의 최대의 적으로 보고 있고 그것이 곧 바로 유럽문화를 황폐화 시킬 것이라 예언했다. 오늘날 사회 전반에 퍼진 화폐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 알코올, 마약 그리고 자살 등은 인간 삶을 지탱시킬 수 있는 가치의 부재, 니힐리즘의 고착화를 반증한다. 니체에게 신의 죽음은 재앙이자 또한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신이 사라진 곳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니체 철학의 과제이다.


1. 세계와 실존의 본질은 무엇인가?

 

1.1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다.


 니체는 니힐리즘의 뿌리를 유럽의 형이상학과 그리스도교 도덕에서 찾는다. 니체에 따르면 이데아나 신과 같은 형이상학적 실재나 자기 동일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세계를 지배하는 보편적 법칙도 없다. 세계는 영원한 혼돈과 생성의 흐름 속에 놓여있다. 이러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초월적 이념이나 신이 부여한 법칙이 아니고 ‘힘에의 의지’이다. “내가 살아있는 것을 발견했던 바로 그곳에서 힘에의 의지를 발견했다.” 힘에의 의지는 살아있는 모든 것의 내적 역동성, 즉 “주인이 되고자 하며 보다 더 크고, 강력하고자 함”이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자들의 본성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니체는 힘에의 의지가 세계를 단일한 법칙이나 원리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니체에게 힘은 하나가 아니라 다수이다. 힘에의 의지는 신이나 어떤 초월적 정신의 원리가 아니라 존재자들의 내재적 본성이고, 생존을 넘어선 어떤 통일된 목적이나 목표를 지향하지 않는다.


 니체에 따르면 힘에의 의지는 인간의 생물학적, 지적 그리고 규범적 세계를 지배하는 진정한 원리이다. 결국 형이상학이나 그리스도교적 도덕 그리고 근대의 과학 등도 역시 ‘힘에의 의지’의 산물이다. 그것들은 비록 자신들의 논리를 진리, 선 그리고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타자와 사회를 보다 잘 지배하기 위한 힘에의 의지가 작동하고 있다. 힘에의 의지는 부단한 힘의 강화를 통해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본질로 한다. 니체는 지금까지의 모든 가치들이 삶을 얼마나 강화시켰는가라는 관점에서 재평가한다. 힘에의 의지라는 기준에서 봤을 때, 전통적 가치들은 삶을 고양시키고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하강과 쇠약을 초래한다. 형이상학과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이데아나나 신 혹은 절대정신 같은 초감성적인 것에 모든 권능을 부여한 반면, 자신은 무력하고 악한 존재로 규정한다. 인간이 초월적 존재를 신봉할수록 그 자신은 비참하고 연약한 존재가 되고 그럴수록 힘에의 의지는 약화된다. 즉 지금까지의 인간들이 신봉했던 가치들은 힘에의 의지의 왜곡된 산물이다.


1.2 세계는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이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가장 어려운 사상 혹은 사상 중의 사상으로 표현한다.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란 과거에 발생하였고, 지금 발생하고 있고 그리고 미래에 발생할 모든 것이 이미 발생하였고 다시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가고 다시 돌아온다. 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돌고,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또다시 꽃을 피운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파괴되고, 모든 것은 새롭게 결합된다. 존재의 똑같은 집이 영원히 세워진다.”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는 우선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한다. 통상 우리는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눈다. 그러나 과거는 지나가 버린 것이기에, 그리고 미래는 오지 않은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알 수 없다. 결국 남은 것은 현재인데, 현재 또한 ‘지금’이라고 했을 때 이미 과거가 된다. 시간은 엄밀한 의미에서 무한한 순간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시간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구분하는가? 니체에 따르면 그것은 시간에 대한 도덕적 판단에 근거한다.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그리스도교적 시간관이다. 과거의 원죄로 현재는 고통스럽고 구원은 미래에만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과거와 미래이지 현재는 아니다. 현재는 단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다리의 역할을 할뿐이며 단지 구원의 시간을 기다리며 죄의 용서를 빌고 뉘우치는 시간이다. 영원회귀는 이러한 일직선상의 시간을 거부한다. 또한 영원회귀는 윤회설이나 시작과 끝이 같다는 역사철학적 사변도 아니다. 영원회귀의 핵심은 순간과 영원의 일치에 있다.


 영원회귀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동일한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영원회귀는 우선 인간에게 끔찍함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영원회귀는 단조롭고 권태로운 인간의 삶이 영원히 반복되고 결코 종결되지 않으며, 이것으로부터 도망칠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극적으로 보자면 영원회귀는 새로울 것이 없는 삶의 영원한 무의미를 의미하며 이것은 허무주의의 극단적 형식이다. ‘무가 영원하다. 모든 것이 똑같다’ 그러나 영원회귀는 무의미함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니체에 따르면 영원회귀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긍정’이다. 영원회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은 자신이 직면하는 것은 오직 순간이기에, 그것을 긍정하며 매순간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영위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순간들은 그것의 영원회귀를 바랄 정도로 유의미하고 필연적이며, 영원하다. 따라서 모든 삶은 가치가 있다. 영원회귀를 보는 니힐리즘적 태도와 적극적인 긍정의 태도는 결국 힘에의 의지의 차이에서 기원한다. 후자는 매순간 ‘그래 이것이 삶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더’를 외친다. 모든 존재는 정당화되고, 모든 것은 똑 같이 중요하고 필연적인 것으로 된다. “생성은 모든 순간에 정당화되는 것으로 보여야만 한다. 현재적인 것이 미래적인 것 때문에 혹은 과거적인 것이 현재적인 것을 위하여 결코 정당화될 필요가 없다.” 영원회귀의 사유와 더불어 니체는 인간 삶의 끔찍하고 처참한 현실을 긍정하는 길을 제시한 셈이다.


1.3 진리는 하나가 아니다.


 니체는 전통철학에서 말하는 인식의 참, 거짓을 허구로 본다. 먼저 전통철학에서 진리의 최후 근거로 제시하는 이데아나 절대정신과 같은 형이상학적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계는 끊임없는 생성자체이지 그것을 넘어선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알거나 파악했다는 것은 생성의 흐름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진을 찍듯이 정지한 한 순간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제한적 의미의 진리일 수밖에 없다.


 인식의 대상인 세계가 영원한 흐름 속에 놓여있듯이 인식의 주체인 인간 또한 보편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개별자로 존재한다. 인간은 생물학적, 사회적 그리고 역사적 조건을 뛰어넘을 수 없다. 이러한 조건을 뛰어넘은 보편적 인간이념은 순전히 인간 사유의 결과물이다. 결국 인간의 인식은 자기의 관점에서 획득한 세계상이다. 모든 인식행위에는 세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확정지으려는 힘의 의지가 작용한다. 따라서 인식이란 인간이 자신을 유지하기위해 변화무쌍한 세계를 계산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하는 욕망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욕망의 결정체가 언어이다. 언어는 대상세계를 단순화시키고 공동체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약속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세계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지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언어들만 보아도 얼마나 인간들이 자의적으로 세계를 그려내는가를 알 수 있다.


 관점적으로 세계를 파악한다는 것, 세계를 자기 식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삶의 기본조건이다. 니체에 따르면 보다 많은 관점을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은 힘의 의지가 그만큼 강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성의 세계를 하나의 관점에서만 파악하려는 형이상학적-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은 힘을 보존하고 강화하는 데 무능하다. 또한 하나의 관점을 모든 인간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진리로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며 지적 게으름의 산물이다. 니체는 세계를 하나의 텍스트에 비유한다. 텍스트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둘수록 훌륭하듯이, 세계도 해석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계의 본질에 더 다가갈 수 있다.


2. 옛 가치는 전도되어야 한다.


2.1 몸은 큰 이성이다.


 전통철학에서 몸과 정신은 철저히 구분되고 몸은 인간적 속성이기 보다는 동물적 속성으로 간주되었다. 심지어 데카르트는 몸을 기계로 본다. 몸은 열등하며 오류와 악의 근원이 된다. 따라서 인간의 인간됨은 정신의 활동을 극대화하는 곳에서 성취된다. 니체는 몸을 정신과 관계없는 물질의 단순한 집합이라는 전통적 입장을 거부한다. 또한 그는 몸과 정신이 상호 독립해 있다는 이원론을 거부한다. 몸은 정신에 대립하는 반대개념이 아닐뿐더러 몸은 정신에 비해 열등한 것이 아니다.


 세계는 무수한 힘들이 경쟁하고 대립하는 장소이다. 이러한 세계는 언어와 논리의 단선적 장치로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몸은 정신보다 세계에 훨씬 다양하게 반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정신보다 훨씬 더 민감하고 자발적이다. 이것은 해일과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몸의 명령이라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래서 니체는 몸을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고, 감응하며, 또 자발적으로 욕구하는 해석의 기능체로 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오히려 몸이다. 우리는 인간의 몸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 한없이 놀라워할 수 있다.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그렇게 놀라운 통합이 어떻게 가능하였는지! 이 각각의 생명체가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예속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다시 명령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위하면서 전체로서 살고, 성장하고 한 순간 동안 존립할 수 있는지! 이런 일은 분명히 의식을 통해서는 일어날 수 없다!”


 몸과 정신의 관계를 니체는 큰 이성과 작은 이성의 관계로 표현한다. “나의 형제여, 그대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대의 작은 이성도 몸의 도구, 즉 그대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며 그것의 장난감에 불과하다.” 정신 혹은 영혼은 독립된 실재로서 몸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고, 오히려 몸의 일정한 존재성, 즉 일정한 자기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정신은 수많은 몸의 활동 중 일부이며 그것의 특징은 세계를 반성적으로 파악하고, 질서지우며 언어화한다. 의식이성은 마치 빙산의 일각과 같은 것이다. 니체의 몸과 이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이성, 언어, 의식 그리고 논리 중심의 전통 철학을 비판하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틀을 제시한다.


2.2 유럽의 도덕은 노예도덕이다.


 우리는 흔히 도덕적 규범들을 불변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선과 악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언제나 동일한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장려해야하고 칭찬 받아야하지만 거짓말은 멀리해야하고 처벌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행위자체는 원래 도덕과 무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적이라는 현상자체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삶의 현상들에 대한 도덕적인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우리가 흔히 도덕의 기원으로 생각하는 ‘양심’의 가책도 사실은 생래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우리에게 주입한 무시무시한 형벌이나 종교적 심판이라는 일종의 협박이 오랜 세월동안 내면화된 것으로 본다.


 니체는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을 도덕규범과의 일치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의 관점에서 재정립한다. “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힘의 감정을, 힘에의 의지를, 힘 자체를 고양시키는 모든 것이다. 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약함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힘이 증가되고 있다는 느낌 - 저항을 초극했다는 느낌을 말한다.” 이러한 기준에서 니체는 전통적 도덕을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으로 분류한다. 노예도덕은 행위를 전통적 방식에 따라 선과 악으로 규정짓는 반면, 주인도덕은 행위를 힘 상승의 기준에 따라 ‘위대함’과 ‘비속함’으로 나눈다. 주인도덕에서 위대함과 탁월함은 경쟁, 정복, 지배 그리고 저항 등의 덕에서 기원하며 비속함과 열등함은 평화, 동정, 온순 그리고 이웃 사랑 등의 덕에서 기원한다. 노예도덕에서 주인도덕의 가치는 완전히 전도 된다. 위대함과 탁월함의 덕목은 악으로 비속함과 열등함의 덕들은 선으로 둔갑한다. 니체에게 노예도덕의 전형은 그리스도교 도덕이다. 그리스도교 도덕은 평화, 동정, 이웃사랑 그리고 평등을 선으로, 육체, 전쟁, 정복, 지배 그리고 위계질서를 악으로 본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교 도덕은 비속함과 열등함을 ‘선’으로 주장하는가? 그것은 현실에서 귀족 혹은 주인에게 저항할 수 없었던 약한 인간들의 원한이 왜곡된 힘의 형태로 표출된 것이다. 그리스도교 도덕은 이 땅에서의 고통을 저 세상에서의 보상으로 전도 시키고, 약함에서 비롯된 모든 가치들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 한다. 그리고 ‘신 앞에서 모든 이는 평등하다’는 구호로 다수의 약자들을 규합하고 소수의 귀족을 타도한다.


 유럽의 도덕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 도덕을 근간으로 하며 홀로서기를 거부하고 ‘무리’에 편승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근대에서 노예도덕은 ‘신 앞의 평등’이 세속화된 ‘법 앞의 평등’을 외치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 속에 구현된다. 대중들은 보통선거라는 행위를 통해 사회에 대한 동등한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고, 법에 의해 경제적인 기회의 평등을 보장받는다. 더 나아가 근대 문화는 권리의 평등을 넘어 능력과 취향의 평준을 지향하며, 그것을 정의의 이름으로 정당화 한다. 대중들 사이에 더 이상 위계질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고, 평가하며, 명령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들은 ‘주권적 개인’, ‘예외자’ 혹은 ‘강자’를 무력화 시키고, 그들을 평균적 존재로 강등시키기를 원한다. 모든 가치의 균등화, 이것은 허무주의의 승리를 말한다. 니체는 모든 인간들이 평등하다는 노예도덕에 대해 ‘사람들은 평등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는 곳에 위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고귀와 비천, 강함과 약함의 덕들을 평등의 이름으로 뒤섞지 말기를 주문한다. 그에 따르면, 주인도덕이 노예도덕에 의해 패배했다는 것은 문명의 타락을 의미한다.



글_ 정낙림 (예술철학가)

독일 부퍼탈 대학 철학박사, 경북대 강의교수, 한국니체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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