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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칼럼

블랙페이지

때가 되었다(#Time’s Up) - 무용계 블랙페이지를 쓰다

예술계에 만연한 적폐는 과연 사라질 수 있을까? 특히 도제식 교육과 위계적 질서가 굳건히 뿌리 내린 무용계에서는 성추행과 성폭력, 언어 및 신체 폭력, 논문 및 안무 표절, 지원금 횡령, 심사비 및 티켓 강요, 열정페이와 복종문화 등 적폐 행위들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럼없이 자행됐다. 이런 관행을 근절하기 위한 자정 노력은 미비했고, 일부 무용가들이 정부와 언론에 호소하여도 예술계에서 미비한 인구수를 가졌다는 이유로, 또는 기득권이 음해라고 역호소를 하여서 외면받기 일쑤였다. 그러는 사이에 무용생태계는 걷잡을 수 없이 썩어들어 무용인들의 윤리성과 도덕성에 대한 판단력은 일종의 마비 증상까지 보인다. 

작년부터 전 세계에서 미투(#Me Too_나도 당했다, 나는 말한다), 위드유(#With You_당신과 함께 한다) 운동이 벌어졌고, 이제는 타임즈업(#Time’s Up_시간은 끝났다, 때가 되었다) 운동으로 이행하고 있다. 그러나 미투 바람도 비껴가는 무용계의 현실에 힘없는 무용가들은 좌절하고 있다. 이에 댄스포스트코리아는 ‘무용계 블랙페이지를 쓰다’를 연재하며 타임즈업운동에서부터 역으로 미투운동을 전개하고자 한다. ‘블랙페이지’는 인터뷰, 사례조사 및 설문조사에 근거하여 무용계의 대표적인 적폐 현상을 다루게 될 것이며, 더불어 적절한 대안까지도 제시해 볼 것이다. ‘블랙페이지’를 계기로 무용생태계가 건강하게 숨 쉴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지지를 부탁드린다. 특히 무용인들에게는 적폐로 인한 피해사례의 제보를 요청드린다. 

블랙페이지 1. 열정페이, 기회 부여인가 노동착취인가?

‘예술가는 배가 고파야 한다’라는 명제가 진리처럼 통용되는 예술계에서 노동착취에 가까운 열정페이의 실상은 매우 심각하다. ‘열정페이’란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열정을 빌미로 한 착취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조어(造語)이다. 예술활동은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 역사가 오래되었다. 한편으로는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가난해야 하며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번다는 것은 지탄을 받기도 했다. 더군다나 ‘돈을 밝히면 제대로 된 예술을 할 수 없다’라는 공고한 편견 위에서 예술활동을 노동으로 인식하지 못한 채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무용계에서 열정페이는 무용가 지망생이나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신인들을 대상으로 기회를 준다는 명분으로 대가를 지급하지 않는 일이 관행처럼 자행되어왔다. 


# 1. “일을 그만두면 제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았어요.”

A씨는 박사학위 논문주제를 정하지 못한 채 장고를 거듭하던 중에 아는 ‘선생님’으로부터 공연기획 일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렇게 무용계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공연기획은 글솜씨가 좀 있고, 꼼꼼하게 일처리를 하는 학생에게 선생님이 '도와달라' 는 부탁으로 시작한다. A씨는 학생의 처지에서 기획일을 했던 경력도 없고, 또한 한 번만 하고 말 일이었기 때문에 돈은 안 받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움’ 한 번이 계속되어 갔다. 부족한 예산을 자비로 메우면서 공연하는 선생님의 형편을 뻔히 아는데, ‘기획비’라는 언급은 꺼내기 어려웠다. 공연기획이라는 것은 정확하게 ‘기획’만 할 수 없는 구조이다. 특히 지원금으로 이루어지는 공연의 경우에는 지원금 신청서와 정산보고와 같은 각종 서류작성 뿐만 아니라, 보도자료, 홍보물 제작, 티켓판매 등 홍보 및 마케팅과 공연진행까지 커버해야 한다. 게다가 무용공연의 경우는 업무가 세분되어 있지 않아 이 모든 과정을 한두 사람이 도맡아 하게 된다. 외국인 무용가의 초청공연을 치르면서 A씨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외국인 무용가와의 이메일 커뮤니케이션과 공항 픽업에서부터 체류 기간의 크고 작은 의전활동이 모두 A씨의 몫으로 돌아왔다. “공연이 끝나서 20만 원을 주시더라고요. 선생님의 일을 도와드리는 동안 처음 받은 돈이었어요. 통장에 이체해주신 것도 아니고 지갑에서 십만 원 수표 두 장을 꺼내서 주시는 걸 받는데 기분이 이상했어요. 내가 이 돈 받으려고 밤새 영어로 이메일 쓰고 항공권 알아보고 내 돈으로 기름값 써가며 공항에서 호텔까지, 호텔에서 공연장까지 모시고 다니고 그런 거였나… 너무 허무하더라고요.” A씨는 더 이상 기획 일을 못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선생님은 그동안 제자도 아닌 A씨를 믿고 경험을 쌓을 기회를 주었는데 이렇게 배은망덕한 경우가 어디 있냐며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일을 그만두면 무용계에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협박성의 발언도 했다. “제일 황당한 건 제가 이렇게 일을 그만두고 나면 무용계에서 저를 써줄 사람이 있겠냐는 말씀이었어요. 이렇게 책임감 없는 사람을 어떻게 다른 선생님들께 추천해줄 수 있겠냐면서 ‘무용 일 이제 안 할 거니?’ 같은 말씀도 하셨어요. 이런 대우 받으면서 일 못하겠다는 건데 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시더라고요.” 이러한 화법은 잘못을 상대방에게 돌리고 죄책감을 심어주는 일종의 ‘가스라이팅’ 수법이다. 가스라이팅이 통하지 않자 평판을 언급하며 입지를 위협하는 것 역시 전형적인 통제 기법이다. 무용계 내 예술노동자들이 이렇듯 죄책감을 느끼고 평판에 대한 불안을 느끼며 부당한 대우를 견디거나, 아니면 부당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 채 다른 분야로 떠나는 일은 부지기수이다. 


#2. 열정페이를 강요하는 선생님들

무용가들이 무대 데뷔를 하거나 공연할 기회는 주로 스승의 공연, 스승의 지인의 공연, 또는 선배들의 공연이다. 특히 대학 재학생이나 대학 졸업 후 5년 미만의 20대 청년무용가들에게는 이런 유형의 공연 제의가 빈번하게 들어온다. 그러나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청년무용가들은 공연비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춤에 대한 열정을 볼모로 삼아 페이를 지급하지 않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져 온 것이다. 한 청년무용가는 졸업 후 공연에 출연했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졸업 후 일이 없을 때 학교 선배로부터 연락이 와서 그 선배의 공연에 출연하게 되었어요. 졸업 후 처음으로 하는 사회활동이었기에 선배로부터 연락을 받는 것도 영광이었고, 공연 기회를 갖게 된 것도 행운이라고 여겼어요. 행사공연이었는데 첫 페이로 5만원을 받았어요. 이후 공연이 많아졌지만 페이는 그대로였어요. 그런데 몇 개월이 지나서 1인당 10만원 이상 지급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 선배는 지금도 본인이 후배들에게 큰 도움을 준 것처럼 얘기하고 다녀요. 지금도 제 아래 후배들이 그 선배에게 이용당한다고 들었는데, 참 씁쓸하더라고요.”

위의 사례에는 그나마 페이가 있는 경우지만, 몇 달을 연습하고 출연까지 했지만 페이를 지급받지 못한 사례도 있다. 한 사설기관의 열정페이는 노동착취와 다름이 없었다. 그 기관은 정부의 지원금을 받고 행사를 치르면서 소속 무용단을 출연시키고 다른 단체보다 월등히 높은 공연비를 책정하였다. 그리고 지원금을 관리하던 기획사는 그 무용단의 통장으로 공연비를 일괄 이체하였다. 그렇지만 여러 무용수가 출연비를 받지 못하였다. 무용수들은 기획사에게 출연비 지급을 요청하였으나 기획사는 무용단에 이미 지급했으므로 줄 수 없다고 답했다. 무용단의 예술감독은 공연할 기회를 주었으니 그것으로 감사히 여기라느니, 다른 공연에 출연시켜주겠다느니, 운영비가 부족해서 그러니 이해해달라는 식으로 무용수들을 무마시켰다. 무용수들은 자신들의 여러 ‘기회’를 틀어쥐고 있는 단체장에게는 차마 출연비를 요구할 수 없었다. 이렇게 출연자에게 지급해야 할 지원금을 가로채는 것은 엄연히 범법행위이다. 그런데 범법행위에 침묵하거나 심지어 협조하는 사람들이 무용계에는 의외로 많다. 열정페이를 강요하는 사람들은 그 행위가 적폐이며, 방관하거나 침묵하는 것 자체가 적폐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다. 

더 심각한 것은 공연 기회나 강사 자리를 얻기 위하여 교수님들의 운전사 노릇을 자청하거나 선생님들의 반려동물 또는 자제들을 돌보며 자발적으로 열정페이에 나서는 경우일 것이다. 이렇게 무용계 내에 만연한 열정페이 문제에서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는 매우 미묘하다. 아직도 스승과 제자라는 도제식 관계가 강고한 무용계에서 사용자인 ‘선생님’들은 예술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주었다고 주장하고, 노동자인 ‘제자’들은 기회라는 이름으로 착취를 당했다고 주장한다. 예술활동을 예술로 바라보느냐 노동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시선은 엇갈리는데,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일한 것을 두고 ‘배움의 기회’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고 말하며 사용자 입장에 공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댄스포스트코리아에서는 2017년 11월 한 달간 온라인을 통해 무용계 열정페이와 관련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한 달간 설문에 응한 응답자의 수는 불과 85명, 채 100명이 되지 않은 응답 수는 역설적으로 무용인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힘이 얼마나 무섭고 강고한 것인지 짐작케 한다.


[그림 1] 응답자의 무용 관련 종사자 비율

응답자의 98.8%가 무용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거나 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는데, 조사에서는 무용 관련 일을 좀 더 세분화하여 창작 관련 활동과 기획과 연구 등 기타 활동으로 나누었다. 창작활동에서는 무용수로 작품에 출연한 것이 60%로 가장 높은 응답률을 기록했고 기타 활동에서는 기획과 연구, 행정 순으로 나타났다.


[그림 2] 무용 관련 업무 내용(창작활동 관련)


[그림 3] 무용 관련 업무 내용(기타 활동)

충격적인 것은 무용과 관련된 일을 할 때 무급으로 일하기를 요구받거나 페이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응답이 무려 86.9%에 달했다는 사실이었다. 페이를 약속받은 경우에도 지급받지 못했다는 응답이 무려 47%로 절반 가까이에 육박해 대가 없는 노동이 만연한 무용계의 새삼스러운 현실을 다시금 환기시켰다.


[그림 4] 무용계 페이 관련 피드백 실태 1

페이 지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페이를 받지 못한 채 일을 그만두었다는 응답이 38.5%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35.4%는 페이를 지급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기타 응답의 주관식 답변에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일을 계속하거나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넘어갔다는 응답도 20%에 달해 페이 미지급에 대한 제도적 해결책이 미비한 현실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림 5] 무용계 페이 관련 피드백 실태 2

페이 지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는 무용수로 공연에 출연했을 때가 62.7%로 과반 이상의 응답을 차지했고 페이 수준 또한 최저시급보다 낮은 수준이라는 응답이 61.7%로 나타났는데 이 응답은 주관식 질문인 무용 관련 일을 한 이유와 연결해 생각해볼 수 있다. 페이가 없거나 최저시급보다 낮은 수준의 페이를 받으면서도 무용 관련 일을 한 이유로 응답자들은 공연을 하고 싶어서, 그래도 춤을 출 수 있어서, 자아실현을 위하여 등의 다양한 답을 내놓았는데, 이 질문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 단어는 ‘교수님’과 ‘선생님’이었다. 교수님이 하라고 해서, 윗사람의 말을 거절할 수 없어서, 선생님의 부탁이었기 때문에, 그분께 춤을 배웠기 때문에, 스승과 제자라는 수직적 구조 때문에 등 대부분의 응답이 교수 또는 스승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무용계 구조와 관련 있는 답변들이었다. 이 답변들은 ‘예술은 좋아서 하는 것’이라거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 같은 세간의 통념을 정면으로 배반하고 있다.


[그림 6] 페이 지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대처

설문의 주제인 ‘열정페이’에 대해서도 응답자들은 이 단어가 ‘대가 없는 노동’이라는 인식을 명확히 갖고 있었다. 교수가 자기 실적을 쌓기 위해 학생의 시간과 재능을 착취하는 것, 무대에 설 기회를 명분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 경험이라는 명분에 따라 이루어지는 열정 착취 등 주관식 응답의 대부분에 ‘착취’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림 7] 페이 지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무용계에서는 노동자에게 경험과 능력을 쌓을 기회를 제공했다는 사용자의 주장과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는 노동자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고용 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되는 ‘사용자’와 ‘노동자’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술노동’에 대한 공론의 장이 마련되지 않은 무용계에서 ‘열정페이’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필요한 이유다.


[그림 8] 무용 관련 일을 하면서 지급 또는 약속받는 페이 수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예술인들의 인권과 복지문제가 문화정책의 중요한 사안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예술가들의 노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으며, 기성세대나 사용자들의 열정페이에 대한 인식도 개선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정책과 논의과정으로부터 현장에 도달하는 시간은 더디게 가며, 지금도 무용계 그늘에서는 열정페이가 계속되고 있다. 아직은 스스로가 대처방안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의 춤, 열정,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고자 한다면 사용자와 반드시 ‘계약서’를 체결해야 한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공연계를 위한 표준계약서가 비치되어 있다. 그러나 기존 표준계약서는 약간 수정한 것에 지나지 않아 어려운 법률적 용어가 난무하며, 저작권이나 촬영권 등 공연계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아 예술가들이 활용하기에는 다소 불편함이 있다. 따라서 댄스포스트코리아 취재팀은 현직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예술가 친화형으로 공연계약서를 만들어 보았다. 계약서라는 것은 계약하는 당사자 간에 지켜야 할 권리와 의무를 기재한 것이며, 계약 내용에 동의하고 상호 사인을 한 이후에는 법적인 효력이 발생한다. 앞으로 공연이나 일에 임할 때는 자신의 시간과 노동을 사용하는 자가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다음과 같은 계약서를 체결하고 시작하기 바란다.





글_ 블랙페이지 취재팀(대표 에디터 윤단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