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칼럼의 필자인 김채원 박사는 지금으로부터 한 달여 전 SNS를 통해 본인의 피해 사실을 밝히며 무용계에서 최초로 #미투 운동에 참여한 당사자입니다.
필자는 대학 시절이던 1980년대부터 상습적 성폭행이라는 끔찍한 일을 겪었으나 피해자가 손가락질을 당하던 시대적 환경으로 인해 이러한 사실을 감내해야 했던 안타까운 과거를 갖고 있습니다. 유학을 다녀온 후 모교의 교수모임 회식에 몇 번 불려 나갔던 필자는 얼마 후, 무용과가 속해있던 체육대학의 학장이자 체육회의 거물이었던 교수로부터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필자는 가해교수에게 죄를 추궁하였으나 돌아온 것은 무시와 외면뿐이었습니다. 여러 차례의 아픔을 가진 필자는 힘없는 피해자로서 그 후로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 정도의 트라우마를 안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면, 가해교수는 여전히 체육계의 거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이 글은 이러한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한 피해자의 응어리진 울분과 분노의 발로(發露)입니다. 단지 성폭행을 당했던 피해 사실뿐 아니라 그로 인해 송두리째 망가진 피해자의 삶 전체를 보듬어달라는 슬픈 호소이기도 합니다.
웹진 <댄스포스트코리아>는 무용계의 반성과 변화를 위해 #미투 운동에 나선 필자의 용기를 지지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건강한 무용 생태계로 나아가는 데에 그의 행동과 이 글이 힘이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withyou
2018년 1월 29일, 검찰 내부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게시판 글을 발단으로 한국에 ‘미투 운동’이 시작되었다. 으레 당연시하며 묵과해오던 성폭력. 상하관계의 권력 속에서 침묵하는 것이 살아남는 것임을 자의적, 타의적으로 강제되었던 만큼 사회에 만연하여 곪을 대로 곪았던 상처가 뒤늦게 터져 나온 것이다. 필자 역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십수 년 전, 대학교수와 국악계 원로의 성폭력으로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보았고 지인들로부터 “어쩔 수 없이 참을 수밖에 없지 않으냐”, “고발하면 너만 다친다”라는 자제의 당부를 받았을 뿐이었다. 결국, 스스로를 자책하며 괴로워하다가 대도시를 떠나 환향의 길을 택하였다. 그것만이 살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니다. 누군가는 이로 인해 상처받고 평생을 사랑했던 춤을 포기해야만 했고, 누군가는 이를 빌미로 권력에 편승하여 승승장구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피해자임은 틀림없으며, 모두 사회라는 조직, 예술계라는 조직, 무용계라는 조직 속에서 양산된 결과이다.
성폭력 문제는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한일관계에서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아니 일본이 사죄한다 치더라도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인 위안부 문제가 있다. 타인의 시선에서 본다면 사죄받고 보상받으면 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의 시각에서는 다르다. 그 어떤 보상도 그 어떤 사죄도 피해자의 짓밟히고 찢긴 상처는 낫게 할 수 없다.
가해자들은 얘기한다. “내 말 안 들으면 이 바닥에서 살아남지 못한다”고.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일본이 무지한 조선을 개혁하고 도와줄 터이니 내 말에 따르라면서 이에 저항한 조선의 황후를 살해했다. 그리고 제국을 등에 업은 친일조선인과 그 후손은 승승장구하고 최고의 권력자 조직의 힘을 빌려 이승만 정권 이후에도 잘살고 있다. 그것도 온갖 훈장을 받고 사회적으로 대우받으면서 말이다.
과연 그 시대와 오늘이 다른 것이 무엇인가. 자신이 속한 조직의 상위 권력자가 자기 말을 들어야 성공할 수 있다면서 폭력을 행사한다. “싫으면 나가라 !”이다. 평생을 그 계통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과연 모든 것을 내던지고 나갈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 지옥의 시간은 금방 지나갈 것이라고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며 버텨낸다. 그리고 그러한 실태는 여기저기서 당연하게 일어났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미투 운동’이 시작되었어도 무용계와 체육계는 침묵하고 있다. 그 어떤 분야보다도 다양한 형태로 폭력이 행사되는 곳이 예술과 체육계통이다. 공연티켓의 의무적 강매, 고가의 인사(필자는 마음을 담은 소박한 선물을 준비해간 적 있으나 이것도 선물이라고 가져왔냐는 달갑지 않은 시선에 다시는 찾아가지 않게 된 바 있다), 논문지도의 과잉 사례비, 논문 및 출판물 대필, 시간강사에 대한 착취, 모임이나 회식에서의 접대요구 등이 빈번하고 당연하게 자행되고 있다.
몇 해 전 대학 무용과의 성폭력 고소사건이 있었지만, 피해자만이 삶과 예술에서 피해자로 살게 될 뿐이었다. 성폭력 사건뿐이 아니다. 유명한 모 여대 교수는 뇌물수수혐의로 실형까지 살았지만 이후 국제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쳐 그의 무용은 외국의 한인사회에서 기본 틀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피해자는 침묵을 종용받는다. 왜? 살고 싶으면 침묵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 종용이 아니다. 크게는 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 피해자는 가해자 개인뿐 아니라 가해자가 속한 조직에 의해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신고하든 항의를 하든 피해자는 피해자일 뿐이다. 더욱이 피해자는 자신의 인격조차 매도당한다. 꽃뱀, 사기꾼, 이상한 사람, 세상 물정 모르는 인간, 안하무인 등등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까지 들으며 2차, 3차 피해를 보게 된다.
일제에 항거한 독립 운동가들은 같은 조직원일지라도 동지의 허물을 비판하고 과보를 받게 한다. 그것은 대의를 위한 처형이 될 수도 있었다. 비록 극단적이며 매몰차고 인정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조국광복이라는 대의를 위한 선택이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이들의 정신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조직 내의 허물을 눈 가리고 아웅 하듯 덮어버리지 말고 가감 없이 드러내어 비판받을 것은 비판받게 하는 것이 조직과 조직원을 오래도록 지켜내는 길이 아닐까. 덮어버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리라. 특히 무용비평가집단과 교수집단은 스스로 성찰하고 썩은 상처를 도려내야 할 것이다. 침묵과 묵인은 다 같이 죽는 길일뿐이다.
필자의 경험상, 피해자가 용기 내어 항의하면 가해자들의 대부분은 인정하지 않고 “무슨 일이 있었지?”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응하거나 “넌 왜 그런 말을 하느냐! 듣기 거북하니 하지 마라”라며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였다. 더욱이 최근 미투 운동의 확산에 용기를 내어 SNS에 고발 메시지를 올리자 여전히 피해자의 인격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뿐이랴. 친한 지인조차 전화해서 “그런 메시지는 내렸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한국인의 인식수준이 아직도 저급하단 생각에 한숨만 나온다. 그것도 대부분이 남자들이다. 가해자가 대부분 남자이다 보니 피해자의 상처를 충분히 읽어내지 못한다. 태생적인 한계일까. 아니면 같은 남자라서 가해자를 이해하는 것일까.
하지만 남자 중에도 피해자가 있다. 그들은 같은 상처를 지녔기 때문인지 공감 능력이 일반 남자들과는 다르다. 다만 피해 당시의 기억에 조금 차이가 있는 듯하다. ‘혐오스럽다’와 ‘묘하게 야릇하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것은 실제 피해자들에게서 들은 증언이다. 남자와 여자의 생리적 차이 때문인지 정답은 알 수 없다. 다만 미투 운동의 현황들을 보면서 대체로 여성들 위주로 진행되고 있으며, 남성들은 방관자의 입장에 있는 듯 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미투 운동의 지역별, 단체별 조직화 역시 여성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여성해방이라는 것이 여성의 활동만으로 가능한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분명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 함께 일구어야 이루어진다.
서지현 검사의 고발 이후 모든 대중매체의 대폭적인 관심은 피해자에게 있었으나 정작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는지를 조명하는 프로그램은 없다. 우리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역사적 상처에 대해 위로와 보상을 부르짖지만, 해방 이후의 그들 삶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 위로와 보상은 당시의 피해와 그 이후의 피해 모두를 어루만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서지현 검사, 김지은 정무비서 이외에도 많은 피해자의 삶의 그늘에 숨어있는 아픔까지 살펴야 한다.
한국무용협회의 ‘미투 운동’에의 입장발표를 시작으로 무용계의 여러 사람들이 힘을 모으자는 논의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용계이지만 단체들은 대체로 남성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기에 ‘미투 운동’에의 동참과 지지에서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든다. 다행스럽게도 한국무용협회는 ‘미투 운동’이 단순히 성폭력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불평등과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라고 밝히면서 무용인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의 보도를 내놓았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일시적으로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힘을 가진 자, 권력을 가진 자들은 제자나 후배에 상관없이 자신들보다 가진 것이 없거나 낮은 위치에 있는 자들 모두를 하나의 소중한 인격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여성이든 단지 성적대상으로 보아서는 절대 안 되며, 그러한 자는 인간으로서 자격 없는 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밖에 안 된다. 당연히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하겠지만, 그 이전에 이를 용납하는 조직적 묵인에 대한 철저한 대처가 우선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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