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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칼럼

블랙페이지

무용가들이 말하는 무용 비평의 문제

한국 무용비평의 문제를 다룰 때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발언은 “담론이 없다”라는 것이다. 이렇듯 담론 부재를 문제로 제기하는 바탕에는 대개 두 가지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는데, 하나는 무용비평의 범주 안에서 생산되는 글의 수준이 높지 않다는 것과 비평 생산을 맡고 있는 평론가들이 무용비평에 전념할 환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지적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관계를 갖는다. 평론가들이 무용비평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보니 공연 스케치 수준에 머무는 겉핥기 식 글을 쓰는 것으로 평문을 갈음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일견 설득력 있게 들리는 한편 이른바 ‘무용비평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때까지 비평다운 비평이 나오기 어렵다는 알리바이로 작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굳이 ‘알리바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무용비평에 전념하기 어려운 환경’은 오히려 비평답지 못한 비평이 쏟아지는 근거가 되며,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 바와 같이 ‘무용비평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유토피아가 눈앞에 저절로 도래하는 날은 결코 오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무용비평을 주제로 한 이번 호 블랙페이지의 취재를 진행하면서는 이러한 현실적 알리바이에 대해 지면을 할애하기보다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용가들이 느끼는 무용비평과 비평가들의 문제와 비평의 사각지대를 듣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극히 일부의 목소리를 담아낸 데 지나지 않지만 ‘무용비평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탓하기에는 현재 생산되고 있는 글이 너무나 게으르고 파편적이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1. 비평의 편향성 문제

“저는 이제 비평가들의 글은 읽지 않아요.”

인터뷰에 응해준 무용가 A씨가 자리에 앉자마자 한 말이었다. 무용가들이 생각하는 무용비평의 문제를 들려달라는 자리에서 나온 첫 일성이 비평을 읽지 않는다라니, 처음 접하는 발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황스러웠다. 비평이나 비평가에 대한 개인적인 거부감으로 치부할 수도, 조금 확대해석해 무용계의 반지성주의 흐름으로 볼 수도 있지만 좁은 이너서클 안의 ‘끼리끼리 문화’ 속에서 비평가들의 글을 읽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인터뷰를 시작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무용비평은 작품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무용계에서 생산되는 비평들을 읽어보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사람에 대한 평가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만약 어떤 안무가가 신작을 만들었다고 하면 비평에 기대하는 건 그 안무가의 기존 작품과 비교하며 움직임을 뽑아내거나 구성하는 방식에 변화가 있는지, 연출적인 면이나 인력을 꾸리는 면에서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그런 변화가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같은 얘기일 겁니다. 그런데 막상 나오는 비평은 그렇지 않거든요.”

A씨는 작품에 대한 평가가 사람 대 사람의 관계를 평가하고 평가받는 관계로 재배치하게 만드는 권력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령 어떤 안무가가 신작을 발표했을 때, 그 안무가가 경력이 많은 사람이라서 비평가들이 그의 기존 작품에 대한 데이터가 많은 경우라면 신작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기존 작품들에 대해 누적된 데이터를 가지고 ‘그는 이러이러한 것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신작을 끼워 맞추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작품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는 게 아니라 ‘누구누구가 새로운 무엇무엇을 했네’라는 식으로 비평가들이 가지고 있는 안무가에 대한 기존 인상을 강화하거나 변주하는 데 그친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었다. 즉 안무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존 데이터가 신작을 평가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안무가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로 귀결된다는 얘기였다. 그가 말하는 ‘사람’이 안무가의 작품 ‘스타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지 묻자 A씨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제가 ‘사람’을 평가한다고 말씀드린 부분은 사람 자체에 대한 평가도 있지만 사람의 ‘급’을 나눠 선별적인 비평을 한다는 면도 있습니다. 비평이 절실히 필요한 쪽이 누적된 데이터가 많은 중견 안무가일까요 아니면 이제 막 창작을 시작한 신진 안무가일까요? 신진 안무가가 발표한 작품이 무용계의 주목을 한눈에 받을 만한 대단한 작품이긴 어렵습니다. 어딘가 조악하거나 미숙하기 마련이죠. 그래서 비평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간주되고 실제로 제대로 된 비평을 받지 못합니다.”

신진 안무가에게 비평의 기회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A씨 외에도 여러 무용가가 의견을 보태주었는데, 일단 A씨의 의견을 마저 듣기로 하자. 그의 이야기는 안무가의 경력과 인지도가 가져오는 차별의 문제에 보다 무게중심을 두고 있었다.

“조악한 작품을 발표하는 게 신진 안무가뿐입니까? 중견 안무가의 작품도 경력이나 전작들이 무색하게 수준 미달인 경우가 있죠. 사실 꽤 많습니다. 그런데도 호평을 받거나 호평이 아니더라도 행간의 애정을 읽을 수 있는 비판적인 글을 지면에 싣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비평을 받는 기준이 작품성이 아니라 안무가의 이름값이나 친분에 있다는 근거임을 말해주는 경우죠.”

A씨는 이러한 비평의 편향성 문제가 결국 주례사 비평처럼 비평가와 안무가의 친분을 강화하며 안무가가 발표하는 작품의 질과 상관없이 안무가의 위치를 공고히 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지적했다. 작품과 비평이 상호 건강한 자극을 주고받으며 발전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안무가와 비평가의 인적 관계를 형성하고 이것이 다시 카르텔로 작용하며 신진 안무가의 토양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2. 젊은 창작자가 느끼는 비평의 소외

A씨가 안무가의 경력에 따라 차별적인 비평이 생산되는 문제를 지적했다면 무용가 B씨는 차별의 문제보다 신진 안무가들에게 필요한 비평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비평에서 젊은 창작자들의 ‘앞으로’를 짚어줄 글이 필요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기성 안무가들의 경우 작품을 만들어본 경험이 많기 때문에 다음 작품의 시도가 안무가로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자기 색깔로 풀어내는 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어서일 가능성이 크죠. 최근 들어 드라마투르기가 제작 스태프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지며 작품의 완성도가 더욱 높아진 면도 있고요. 반면 젊은 안무가들의 경우 아직 창작의 경험이 많지 않아 완성도가 떨어지거나 무대에 올리기까지의 과정에서 스스로 체크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는데 이때 가장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 비평가들의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 들죠.”

B씨는 비평이 가장 필요한 집단에 가장 시선이 돌아가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는데, 이는 결국 A씨가 지적한 비평의 편향성 문제와 연결된다. 물론 현재의 무용 공연 현황을 보면 올려지는 공연의 수에 비해 리뷰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고 이는 다시 지면의 부족과 맞닿아 있는 문제다. 그러나 부족한 지면을 채우는 리뷰에서 가장 먼저 배제되는 것이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젊은 안무가들의 작품이라는 지점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최초지원사업처럼 젊은 안무가들이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공연을 올릴 경우, 이 경우야말로 제도적 리뷰 시스템의 동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정사업 안에 평론가 매치까지 끝나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보는 거죠. 이 생각은 저만의 의견이 아니라 작년에 최초예술지원사업 집행 후 서울문화재단에서 창작자들 5명을 초청해 진행한 사업리뷰용 인터뷰에서 나온 공통적인 의견이었어요.”

B씨는 지난해 호평 속에 마무리된 공연이 끝나고 리뷰가 전문지 지면에 실렸을 때, 관객들의 호의적인 평가에 비해 냉정했던 리뷰가 도움이 되었다며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해주었다. 단원들은 작품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리뷰에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단체를 이끄는 입장에서 해당 리뷰를 통해 단체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창작자 입장에서 좋은 리뷰란 공연 후 칭찬으로 일관하는 글보다 창작자가 놓친 점을 읽어낼 수 있는 글이며 그러한 리뷰가 가장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인문학적 해석으로 ‘다음’을 제시할 수 있는 예리함이 절실한데 현장에서 그런 비평을 만나기 어려운 것을 아쉬움으로 꼽았다.


#3. 무용가, 평론가, 관객 간의 소통 문제

무용가 C씨는 비평이 단순한 작품 해설이 되기보다 안무가의 작업에서 어떤 방법으로 주제를 전달하려 했는가에 중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안무가들에게서 비슷한 주제의 작품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을 안무가 각자가 어떤 방법으로 어떤 방향으로 풀어나가는지를 읽을 수 있는 평론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비평을 읽다 보면 객관적인 눈으로 작품을 바라보기보다는 평론가 개인의 감정이입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작품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나 비평이라기보다 개인의 해석을 담은 또 다른 글이 나오는 셈이죠.”

C씨는 국내외를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안 많은 평론가들에게서 비평을 받았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으로 자신의 작업을 이해하고 꿰뚫어본 이들은 평론가가 아니라 개인 블로그에 리뷰를 올리는 일반 관객들이 많았다면서 한국의 관객 수준이 상당히 높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무용 비평 또한 작품 해설에 치중하거나 개인의 감정을 토로하는 글보다 안무가의 새로운 작업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C씨는 유럽에서 비평가의 글이 어떤 식으로 창작자와 관객을 매개하는지 예시를 들며 창작자와 평론가, 관객이라는 공연의 세 주체가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에 대한 관점을 함께 제시했다.

“유럽에서는 유명 일간지에 평론가들이 공연 후 아주 날카로운 평론을 기고하면서 별을 함께 달아서 평가를 합니다. 별이 5개 달리면 아주 좋은 공연이고 3개 정도면 가볼 만한 공연이라는 의미죠. 그런데 별을 5개 받는 공연은 한 해 동안의 공연을 통틀어도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창작자들이 평가에 인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에게 더 열심히 연구하고 작업하라는 일종의 격려를 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대중적인 매체에 평론가들의 글이 실리면 일반 관객들을 그 글을 보고 공연을 찾아가게 됩니다. 일반 관객과 예술가 그리고 평론가의 삼각 구도가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고 있는 것이지요.” 

C씨는 관객이 배제된 채 무용가와 평론가 사이에서만 비평이 유통되는 한국 무용계에서도 비평이 창작자만을 위한 좁은 범위의 컨텐츠로 머무르기보다는 일반 관객과 호흡 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최근 대중화를 부르짖으면서도 대중과 소통할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는 무용가들이 함께 귀 기울여야 할 의견이다.


#4. 비평의 세대교체 필요

“젊은 창작자들이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데 비해 비평은 시류를 못 따라가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아요. 무용수들이나 안무가의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무대는 점점 젊어지고 있는데 비평은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여태까지 써오던 대로 낡은 틀에 맞춰 늙은 글을 생산하고 있다는 인상이죠.”

무용가 D씨는 무용 비평의 가장 큰 문제를 젊은 평론가의 부재로 꼽았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젊은’이라는 수식어가 평론가의 생물학적 나이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무용계에서 시도되고 있는 여러 변화들을 얼마나 제대로 읽어내고 그 의미를 발견하느냐 하는 생각의 나이를 수식한다고 설명했다. 

“젊은 창작자들의 작업에서 기존에 보던 것과 다른 트렌드, 그러면서도 그들 사이의 어떤 공통된 흐름이 발견된다고 쳐요. 그러면 평론가들은 이걸 젊은 창작자들이 기성세대와 다르게 새롭게 시도하는 무언가라고 생각하고 이 시도에 대해 의미를 발견하고 이름을 붙여주려는 게 아니라 ‘이런 게 요즘 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거냐’라는 식으로 진지하지 않고 전문적이지 못한 어떤 걸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어요. 나이 든 평론가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한데, 본인이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는 고인 물이 되진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죠.”

D씨는 비평으로 생산되는 ‘늙은 글’의 문제가 비단 그 ‘늙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글에서 나이를 드러내며 창작자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있다고 짚었다. 평가의 주체로 나서는 평론가들에 의해 무용가들이 대상화되면서 비평이 권력화된 기존의 문제 위에 무용 현장이 세대교체와 함께 점점 젊어지고 있는 데 비해 평론가들은 젊은 필진이 성장하지 못한 채 고령화되어가면서 현장과 평단 사이의 나이 격차가 보다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물리적인 나이 격차는 안 그래도 스승과 제자 사이의 위계가 뚜렷한 무용계의 유교적 질서 안에서 이미 비평 권력을 가진 평론가들이 무용계의 ‘어른’으로 떠받들어지는 수직구조로 이어진다는 게 그의 진단이었다.

“젊은 평론가가 없다는 문제가 단지 늙어가는 평론가들이 늙은 글을 생산해낸다는 문제만은 아니에요. 글이 늙었다 해도 그 안에 깊이가 있다면 문제가 될 게 없죠. 문제는 나이 든 평론가들이 생산하는 글이 이제 전혀 예리하지 않은데 아무도 그에 대한 지적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비평이 예리하지 않다면 비평으로서의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 아닌가요?”

D씨의 말은 의문형으로 끝났지만 기실 그의 말이 질문이 아니라는 것은 그와 나 모두 알고 있었다. 젊은 평론가가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진단은 서두에 언급한 ‘무용 비평에 전념하기 어려운 환경’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지만 이에 대한 고민의 싹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무용계의 우울한 초상이다.


#5. 무용 매체에 대한 불신

무용가 E씨는 무용전문지는 아예 읽지 않으며, 포털 사이트에서 일간지에 실리는 공연 리뷰는 가끔 찾아 읽지만 만족스러운 리뷰를 읽은 기억이 거의 없다고 대답했다. 앞서 비평가들의 글을 읽지 않는다고 말한 A씨 못지않게 당황스러운 발언이었다. 무용전문지를 읽지 않는 이유에 대해 먼저 질문했다.

“대학 때 학과에서 무용월간지 강매를 했었어요. 관심이 있든 없든 구독을 해야 하는 분위기였죠. 아직 비평이 뭔지도 몰랐을 때였지만 첫 인상부터가 좋을 수가 없었던 거죠. 지금도 분위기가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매체 형편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해서야 누가 그 매체를 신뢰할까라는 의심이 있어요. 매체를 불신하게 되니 매체에 실린 글에 대해서도 신뢰할 수 없게 됐어요.”

E씨는 무용가들 대부분이 무용 매체에 관심이 없고 제대로 읽지 않으며 그나마 매체의 기사나 리뷰를 읽는 경우는 자신에 관한 글이 실렸을 때 찾아보는 정도라면서 무용가와 무용 매체 사이에 ‘상생’이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인터뷰해주거나 자기 공연에 대한 리뷰가 실렸을 때만 매체를 찾아 읽는 무용가들 행태가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무용 매체들 대부분이 무용가들이 매체를 찾아 읽을 만큼의 동력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고 했다. 

“기사는 일단 내용이 너무 허술하고 정보량이 많지도 않은 데다 매체와 무용가의 친분이 그대로 보이는 경우가 많아요. 매체다운 매체가 없다는 생각이 들죠. 그리고 리뷰 같은 경우는, 한동안은 제가 본 공연에 대한 리뷰가 궁금해서 열심히 찾아보던 때가 있었는데 매체에 실린 리뷰가 더 실망스러울 때가 많았어요. 저는 너무 따분해서 앉아 있기 괴로웠는데 무슨 세기의 걸작이라도 나온 듯이 칭찬을 한다거나, 반대로 저는 굉장히 흥미로운 시도라고 생각하면서 봤는데 엄청난 혹평을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저나 제 주변 친구들이 본 것과는 반대되는 관점의 리뷰들이 나오는 걸 보면서 매체 리뷰에 대한 신뢰도 잃게 됐죠.”

매체에 실린 리뷰를 불신하는 것은 E씨만이 아니라 인터뷰에 응해준 무용가들 모두가 자신이 본 것과 다른 관점의 리뷰를 발견하고 당혹스러웠다는 경험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무용가들과 평론가들 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걸 발견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일간지 리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을 이어갔다.

“포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간지 리뷰는 대부분 대형 공연들이잖아요. 일간지는 대극장에서 올려지는 유명한 작품들이라야 리뷰도 써주는구나 하고 자괴감이 들 때가 많아요. 그나마도 한국무용이나 현대무용은 별로 없고 대부분 발레 공연 리뷰인데 리뷰에 깊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줄거리 좀 써놓고 주역무용수 누구누구가 잘했다고 마무리되는 식이라서 패턴도 거의 정해져 있고요. 그래도 포털에 올라가면 조회수가 나오는 편이니까 그 리뷰 읽어봤냐고 주변 사람들과도 얘기하는데, 이 정도 글을 굳이 읽어야 하나 하는 허탈감이 있어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E씨가 가장 자주 입에 올린 단어는 ‘신뢰’였다. 문화부 기자들이 주로 쓰는 일간지 리뷰는 무용을 다루는 폭이 좁고 깊이가 없다는 점에서, 무용 전문매체에 실리는 평론가들의 리뷰는 관점이 편협하다는 점에서 신뢰할 수 없다면서 요즘은 블로그에 올려진 일반 관객들의 리뷰가 훨씬 더 날카롭고 진실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매체에서 관객들의 공연 리뷰를 받는 지면을 만든다면 ‘고인 물’이 되어버린 비평에 신선한 자극이 될 수도 있으라는 의견을 덧붙였다.


무용가들이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이야기들은 대체로 비슷했다. 실제 만남에서는 이보다 긴 이야기들이 오고 갔지만 결국 이야기가 수렴되는 방향은 세대교체 없이 늙어가는 평단과 고착화된 권력 구조의 문제였다. 이 권력 구조의 문제에 대해서는 작품을 평가하는 주체로서 발휘하는 비평의 권력 문제도 있지만 지원금 사업에서 심사의 주체로 참여함으로써 무용가들의 창작에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는 권력의 문제가 더 크다는 데에는 모두가 한 목소리가 되었다.

시대 변화에 발 맞추지 못하고 있는 현 무용 비평의 태도로는 무용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작업들을 담아낼 수 없으며, 이대로라면 현장과 비평의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이 힘을 행사하고 있는 이상 이러한 권력 구조는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무용가들은 비평의 문제점들을 이야기하면서도 앞날을 매우 어둡게 전망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기성 평단이 전혀 위기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듯 보이고 대안이 될 수 있을 만한 젊은 필진 그룹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라 했다. 무용계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성찰하는 글은 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자성을 요구하며 마무리되지만 정작 자성이 필요한 이들이 내어놓는 반성의 목소리는 들은 기억이 없다. 반성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고인 물의 운명은 변화의 거대한 물결 뒤로 사라지는 것뿐이다.


글_ 블랙페이지 취재팀(대표 에디터 윤단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