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성범죄는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빠르게 대중과 밀접해진 범죄 용어가 됐다. 대중과 밀접해졌다 함은 이 범죄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가 높아졌다는 뜻인 동시에 이 범죄에 대한 피해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공공화장실이나 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수단 등에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범죄가 이루어져 피해자 특정이 쉽지 않거나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해외에 서버를 둔 음란사이트나 웹하드 등을 통해 범죄의 결과물인 영상이나 사진이 퍼져나가는 동안 특정할 수 없는 가해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끔찍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디지털 성범죄라는 용어가 정착되기 전 널리 사용되었던 것은 ‘국산 야동’이나 ‘리벤지 포르노’ 같은 용어들로, 이는 범죄라는 사실을 희석시킬 뿐 아니라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철저히 가해자 중심적인 시각을 반영하고 있었다. 또한 2017년 9월 26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카메라 이용 등 촬영 범죄를 일컫는 용어로 그동안 사용해온 ‘몰카’ 대신 ‘불법촬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몰카’가 예능에서 비롯된 장난스러운 표현으로 범죄의 심각성에 비해 너무 가볍게 느껴지는 한편 범죄 의식을 약화시킨다는 지적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용어의 변화와 더불어 범죄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 역시 빠르게 확산되고 있지만 디지털 성범죄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대검찰청에서 발표한 ‘2018 범죄분석’에 따르면 2008년 963건이던 디지털 성범죄 건수는 2017년 7,880건으로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통신매체를 이용한 범죄가 2008년 378건에서 2017년 1,265건으로 증가한 데 비해 카메라 등 이용 촬영 범죄는 같은 기간 585건에서 6,615건으로 증가해 10년 만에 11배가 넘게 증가한 수치를 보여준다.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스마트폰의 고화질 카메라가 디지털 성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끔찍한 결과다.
[그림]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서 개최한 ‘2019 디지털 성범죄 대응 국제 컨퍼런스 - 디지털 성범죄 체계적 피해지원 방안 및 국제협력’에서 박성혜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 삭제지원팀장의 주제 발표 자료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현황 및 대응’ 중 재인용.
이러한 불법촬영 범죄자로 드러난 이들 가운데에는 법조인, 언론인, 대학교수 등 우리가 흔히 사회지도층이라 일컫는 인사들이 포함돼 있어 충격을 더하고 있다. 2017년에는 서울동부지법 소속 판사 홍성균이 지하철 열차 안에서 여성의 신체를 촬영하다가 주위에 있던 시민의 신고로 체포되었고 지난 7월에는 SBS 전 앵커 김성준이 역시 지하철 열차 안에서 같은 수법으로 여성의 신체를 촬영하다 역시 시민의 신고로 체포되었다. 김성준은 체포 당시 범행을 부인했으나 이후 휴대전화 압수수색을 통해 몰래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여성의 사진이 여러 장 발견되었고, 현재 서울남부지법에서 공판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지난 10월에는 충남대 연구교수 A씨가 교내 화장실과 학교 계단 등에서 여성의 신체를 몰래 촬영한 혐의로 입건된 바 있다. 경찰 조사 결과 A씨의 컴퓨터에서는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가 촬영된 사진과 영상 1,500여 개가 발견되어 범죄가 상습적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짐작케 했다.
법정으로 간 무용계 불법촬영 사건
무용계 역시 디지털 성범죄로부터 안전한 곳은 아니다. 아니, 공연 실황과 연습 과정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사진이나 영상과의 결합이 또 하나의 공연 방식이 되고 있는 무용계는 디지털 성범죄로부터 매우 취약한 분야라 할 수 있다.
작품의 리서치나 연습 진행을 확인하는 의미로 촬영이 이루어지는 동안 촬영자가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를 촬영하지 않으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갖기 어렵고 촬영 후 모니터링을 한다 해도 클라우드 등과 같은 웹 저장장치에 저장할 가능성 또한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을 사용해 표현하는 예술의 특성상 연습이나 공연이 끝나고 탈의실이나 샤워실이 불법촬영 장소가 될 가능성 또한 상존한다.
지난해 4월 인천 부평경찰서에는 현대무용가 김 모씨(32)의 성폭력특례법(카메라 등 이용 촬영) 위반 혐의에 대한 고소장이 접수되었다. 피해자에 따르면 김 씨는 핸드폰, 노트북, 복수의 네이버 클라우드 계정과 구글 드라이브 계정에 수십 건에 달하는 불법촬영 사진과 영상을 저장해두고 있었고 계정별로 여자친구와 동료 여성 무용수, 일반인 여성 등으로 촬영 대상을 따로 분류해 보관하는 등 불법촬영물에 대한 관리도 치밀했다.
피해자가 확인한 불법촬영물은 2014년부터 2017년까지 거의 4년간에 걸쳐 촬영된 것으로 그 내용물은 여자친구들의 나체 사진과 성관계 영상을 비롯, 연습실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동료 여성 무용수들이나 무용콩쿠르에서 자신의 출전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참가자들의 가슴이나 엉덩이 등 특정 신체 부위를 선별적으로 촬영한 사진 등이었다. 김 씨가 한국과 유럽을 오가며 프리랜서 무용수로 활동한 탓에 피해는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발생했다.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외출한 외국인 여성을 스토킹하며 가슴 부위를 촬영한 영상이 발견되는가 하면 외국에서 교제를 시작한 여자친구도 불법촬영의 대상이 되었다. 김 씨가 직접 찍은 것은 아니지만 SNS에 올라온 일반인 여성들의 얼굴 사진을 캡처해 정액을 쏘는 사진과 합성해 ‘움짤’을 만든 것도 발견되었다.
경찰은 신고가 접수된 뒤에도 한 달이 지나도록 조사에 착수하지 않고 피의자 김 씨에게 네이버 클라우드를 확인하겠다고 미리 고지해주는 등의 행위로 피해자를 도리어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고소인이 확인한 피해자는 고소인 본인을 포함해 총 3명이었지만 검찰이 기소 대상으로 삼은 사건은 피해자 2명에 대한 촬영 건으로, 법정 다툼은 지난해 11월 30일 서울동부지법에 공소장이 접수되고 나서 올해 11월 1일 선고가 내려지기까지 근 1년여간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동안 무용계에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집착했기 때문이라는 악성 루머가 퍼지며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도 자행되었다.
무용인들은 촬영물 유포 가능성과 증거 인멸이라는 불안감 속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진행해야 했던 피해자에게 연대했다. 승소 가능성이나 후환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함께 고소인으로 나서지 못한 다른 피해자들과 사건에 대해 뒤늦게 인지한 피해자의 동료 무용수들, 또 다른 무용계 성폭력 사건에 연대하고 있는 무용인 그룹 등이 작성한 13건의 탄원서가 법정에 제출되어 피해자의 싸움에 힘을 보탰다. 탄원서를 통해 김 씨의 불법촬영 사실 외에도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등의 사기범죄가 추가로 고발되기도 했다.
지난 11월 1일 선고에서 재판부는 김 씨의 반성 없는 모습에 준엄한 비판을 하며 집행유예 없는 징역 10월과 함께 성폭력치료프로그램 40시간 이수, 아동·청소년관련기관 취업제한 3년을 명령했다. 유럽에 머물던 김 씨는 재판을 위해 일시 귀국했다 법정 구속되었다.
김 씨가 구속되었다고 해서 사건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11월 5일 김 씨는 선고에 불복해 항소장을 제출했고 11월 8일 검사 측에서도 항소장과 항소이유서를 제출해 사건은 항소심으로 넘어갔다. 항소심 공판은 내년 1월부터 곧장 속행된다.
하지만 피해자를 괴롭히는 것은 길어지는 법정 다툼이 아니라 반성하지 않는 가해자가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고소 사실에 앙심을 품고 사적인 보복을 자행하거나 복수의 의미로 보유하고 있는 영상과 사진을 유출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다. 가해자가 구속된 뒤에도 피해자는 여전히 끝나지 않는 공포 속에서 떨고 있다. 항소심으로 간 이 사건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무용인들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글_ 블랙페이지 취재팀(대표 에디터 윤단우)
*블랙페이지 취재팀에서는 2018년 미투 운동과 함께 시작했던 무용계 성폭력 실태 조사를 다시 진행합니다. 이제야 고발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한 현재, 몇몇 사건들을 파편적으로 접하고 공분하는 것이 아닌 무용계 성폭력의 양태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설문에 응답하는 외에 추가로 제보할 내용이 있거나 인터뷰를 원하시는 분은 blackpage.dance@gmail.com 으로 메일 주십시오. 설문은 물론 추가 제보나 인터뷰에서 개인 정보와 관련된 내용은 비밀이 엄수되니 안심하고 응답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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