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위력은 존재했다
무용계 안팎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현대무용가 류 모 씨의 위력에 의한 추행 사건에 대한 항소심이 지난 6월 26일 선고공판에서 피고인과 검사의 항소가 모두 기각되며 원심 판결 유지로 마무리되었다.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를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류 씨는 지난 1월 1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40시간 이수, 아동·청소년 관련기관 및 장애인 복지시설 취업 제한 3년, 그리고 관할기관에 신상정보 제출을 명령받았다. 검사가 제기한 보호관찰 명령 청구는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재범의 위험성이 높다고 할 근거가 없다며 기각되었다.
항소심은 1심과 마찬가지로 ‘피해자다움’에 대한 재판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렇다 할 객관적 증거 없이 피해자의 진술이 범행에 대한 가장 강력한 논거로 작용하기에 이는 재판 전략 측면에서 당연한 수순이었다. 뒤집어 말하자면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피해자다움’에 대한 공격을 하는 외에는 변변한 전략을 세울 수 없었다는 뜻이다.
1심에서도 다투었던, 연습실에서 피해자가 류 씨와 친밀한 포즈로 찍은 사진에 대한 소모적인 논박이 길게 이어졌고, 항소심의 증인들은 피해자가 평소 “선생님 같은 남자랑 결혼하고 싶다” 같은 말을 했다거나 별명이 류 씨의 ‘빠순이’였을 정도로 그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보였다거나 (다른 학생들은 하지 않는 행위인) 손편지를 썼다거나 하는 증언들을 통해 추행이 피해자의 내심에 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암시를 해 류 씨의 무죄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피해자는 이 모든 증언들이 거짓말이며 류 씨에 대한 엄벌을 청한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결심공판에 제출했다.)
류 씨의 변호인단은 최종 변론에서 피해자가 증거물로 제출한 녹취 파일은 고소를 결심한 이후 사후 녹취된 것이기에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며 피해자는 자의적으로 ‘피해자다움’을 설정하고 고립된 피해자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진술을 왜곡 및 축소했다고 진술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피해자가 표면적으로는 거부하지 않아 내심으로는 비동의한 것이었는지 류 씨로서는 알 수 없었으며, 피해자의 고소로 인해 무용단 운영에 적지 않은 차질을 빚고 있는 데다 연로한 부모를 부양하고 있기에 선처를 바란다는 말로 변론을 마쳤다.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할 만한 위력이 존재했는가는 1심에서부터 항소심에 이르기까지 가장 첨예하게 다툰 주제였다. 류 씨의 1심 재판을 맡았던 서울중앙지법 제31형사부(부장판사 김연학)는 판결문에 위력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죄에서의 위력이라 함은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을 말하고, 유형적이든 무형적이든 묻지 않으므로 폭행·협박뿐 아니라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며, 위력행위 자체가 추행행위라고 인정되는 것도 포함되고, 이 경우에 있어서의 위력은 현실적으로 피해자의 자유의사가 제압될 것임을 요하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대법원 1998. 1. 23. 선고 97도2506 판결 등 참조).
항소심 재판을 맡은 서울고등법원 제8형사부(부장판사 정종관)는 판결에서 류 씨의 추행에 무형과 유형의 두 가지 위력이 모두 있었다고 판단했다.
피해자가 류 씨의 지도를 받던 중 출전한 무용콩쿠르에서 대상을 수상하자 류 씨는 “밥을 사라”고 말하며 단둘이 있을 계기를 만들었고, 콩쿠르 준비를 하는 고등학생들이 있는 시간에 연습실로 불러 함께 몸을 푼 다음 고등학생들이 모두 콩쿠르에 출전하느라 연습실을 떠난 뒤 추행을 했다. 이는 류 씨가 교습자인 자신의 지위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무형의 위력으로 볼 수 있으며, 류 씨는 피해자가 이후에 받을 명시적인 불이익 조치를 표시하진 않았으나 그와 피해자와의 관계, 피해자의 대응 모습과 심리 상태 등을 종합해볼 때 피해자는 그의 지배력과 영향력 아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류 씨는 피해자가 거부하지 못할 것을 알고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또한 재판부는 류 씨가 이성적 감정이 형성되지 않은 관계에서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성적 행위를 시도했기에 추행 그 자체로 위력행위에 해당되며, 피해자가 울면서 “그만 좀 하시면 안 돼요?”라는 등의 간접적 의사 표시를 했음에도 행위를 강행한 것은 유형의 위력행위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양형에 대해서도 신체접촉의 수위가 높아 피해자는 매우 큰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뿐 아니라 무용가로의 꿈을 접기에 이르렀음에도 류 씨는 범행을 부인하고 변명으로만 일관했고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아 반성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 다만 형사처벌의 전력이 없는 초범임을 고려해 검사와 류 씨 양측 항소를 모두 기각하고 원심을 유지한다고 밝혔다.
류 씨는 결심공판 이후 선고공판 전까지 세 차례의 반성문을 제출하며 피해자를 좀 더 세심하게 배려하지 못한 자신의 불찰이라고 말하는 등 죄를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항소심 결과에 불복해 6월 29일 상고장을 제출했고 이로써 사건은 대법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류 씨의 선고공판에는 필자를 비롯해 1심부터 재판을 줄곧 지켜봐온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의 연대인들이 함께했고 웹툰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J씨가 연대에 참여해 법정 모습을 스케치했다. J씨는 성범죄 법정 풍경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작업으로 성폭력 피해자와 연대하고 있으며, 이날 법정에서 그려진 그림 역시 기록으로 남겨질 예정이다. 그는 자신이 법정 연대활동을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위력관계에 의한 성범죄는 위계질서가 분명한 예술계 전반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해자의 변명도 늘 한결같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재판에 가고, 한 자리를 차지해 앉고, 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현장의 공기를 알리고 재판의 과정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술을 하는 자가 예술을 빌미로 이런 일을 자행한다면, 예술로써 이런 일을 더욱 알리고 막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 성범죄 재판에 참여해 그림을 그려 온라인에 공개하는 연재물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의 감시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J씨가 류 씨의 항소심 선고공판을 방청하며 작업한 스케치들
관련 링크 ▶▶▶ 제자 위력 성추행 현대무용가 항소심 재판 기록
얼마나 적극적으로 저항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적극적으로 동의를 구했는가
무용계의 시선이 류 씨의 사건에 쏠려 있는 동안 현대무용가 천 모 씨는 류 씨보다 보름 늦게 피감독자 간음으로 공소장이 접수되어 재판을 시작했다. 피해자 역시 천 씨가 출강하던 대학의 무용학과 학생으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공판 일정과 횟수, 선고 내용까지 류 씨의 사건과 찍어낸 듯 매우 흡사하다. 천 씨 사건은 지난해 7월 18일 첫 번째 공판이 열린 뒤 총 다섯 번의 공판을 거쳐 지난 5월 21일 1심 판결이 내려졌다. 한 달에 한 번꼴로 공판이 진행되어 6개월 만에 1심이 종결된 류 씨 사건에 비해서는 다소 더딘 진행이었다.
천 씨는 2007년부터 A대 무용학과에 강사로 출강하기 시작해 2016년부터 2018년까지 겸임교수로 근무했고 이 기간 동안 A대 무용학과 졸업생들로 구성된 동문무용단인 B무용단의 대표로도 활동하였다. 당시 B무용단의 예술감독은 A대 무용학과장인 C교수로, 그는 천 씨를 22년 동안 지도해온 스승이었다. 천 씨는 A대 외에도 2014년부터 D예고에도 출강하고 있었는데, 피해자는 2014년 D예고 재학시절 천 씨의 지도를 받은 바 있고 2015년 A대 무용학과에 입학한 뒤 천 씨로부터 2학년 1학기 전공실기 수업을 받는 등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천 씨와 사제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2017년 피해자는 경험삼아 참여했던 뮤지컬 댄서 오디션에 합격해 휴학 여부를 두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천 씨가 안무조감독 및 현장 총책임자를 맡은 E공연단의 공연에 참여해야 할지도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이에 피해자의 아버지는 그에게 C교수나 천 씨에게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유했다. 한국무용가인 피해자의 아버지는 F무용단의 대표로 C교수는 물론 천 씨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류 씨의 추행 사건에서 ‘반수’를 준비하던 피해자에게 학부장 이 모 교수가 자신의 남편인 류 씨를 교습자로 소개해주고 이 인연이 피해자에 대한 류 씨의 성폭력으로 이어진 것과 놀랄 만큼 유사한 전개다.
천 씨는 상담을 요청하는 피해자를 A대 앞으로 불러낸 다음 모텔로 데려가 맥주를 마시며 한 시간 반 동안 진로에 대한 상담을 해주었다. 그러고는 피해자가 긴장을 늦추고 있는 틈을 타 신체접촉을 시도했다. 피해자가 “왜 그러세요”라고 말하며 천 씨를 양손으로 밀치는 등 거부의사를 표시했지만 천 씨는 이를 무시하고 행위를 강행했다.
재판을 맡은 서울동부지법 형사9단독(조국인 판사)은 천 씨가 자신의 지위와 피해자에 대해 갖고 있는 영향력 등 무형의 위력으로 피해자의 의사를 억압하여 사실상 자신의 보호 내지 감독하에 있는 피해자를 간음한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천 씨는 사건 당일 피해자에게 모텔에 가자고 제안하거나 그에 대한 승낙을 받은 사실이 없고, 자신의 차량을 이용해 모텔로 이동했으며, 피해자와는 알고 지낸 지 약 5년이 되었고 피해자의 부모와도 면식이 있는 등 피해자는 천 씨와 성관계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기에 피해자가 천 씨와 함께 모텔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정은 공소사실을 인정함에 있어 별다른 장애요소가 되지 않았다. 즉, 피해자가 모텔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고 해서 천 씨와의 성관계에 동의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피감독자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피감독자간음죄에 있어서의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는 ‘사실상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상황에 있는 사람’도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우리의 일반 사회통념이나 실정 그리고 그와 같은 상황하에 있는 사람의 성적 자유가 부당하게 침해되는 것을 보호하려는 법의 정신에 비추어 타당하다(대법원 1976. 2. 10. 선고 74도 1519 판결 등 참조).
재판부는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졌다는 천 씨 측 주장을 기각하고 그가 교육 기타 관계로 인해 자신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피해자에 대해 위력으로 간음했음을 인정하고 집행유예 없는 징역 1년 6개월 선고에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와 아동·청소년 관련기관 및 장애인 복지시설 취업 제한 3년을 명했다. 또한 관할기관에도 신상정보를 제출해야 한다. 천 씨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제기했고 항소심은 서울동부지법 제3형사부로 넘어가 7월부터 공판이 재개된다.
블랙페이지에서는 지난 5월호에서 무용계 성폭력 실태를 조사해 그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통계에 따르면 성폭력 위험에 가장 취약한 집단은 미성년자를 포함한 무용 전공 학생들이었다. 성폭력 피해를 당한 시기는 초중고 시절이 24.6%, 대학 무용과 시절은 47.4%로 70%가 넘는 응답률을 나타냈다. 성폭력 가해자 그룹은 대학의 교수 또는 강사진이라는 응답이 25.4%로 가장 높았는데, 류 씨와 천 씨의 성폭력 사건이 결코 돌발적이거나 일탈적인 사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다. 범행이 일어나기 전 피해자와 돈독한 신뢰를 쌓아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지배한 다음 성폭력을 저지르는 그루밍 성범죄라는 면에서 죄질이 더욱 나쁘다. (그루밍 성범죄는 일반적으로 교사와 학생, 성직자와 신도, 복지시설의 운영자와 아동, 의사와 환자 등의 관계에서 많이 나타난다고 보고되고 있다.)
류 씨는 지방에서 올라와 무용계에서 학연 등의 별다른 기반 없이 활동해왔기에, 천 씨는 한국무용가인 피해자의 아버지가 현재 국내 유수의 무용단 대표이기에 자신들은 ‘위력’을 행사할 지위에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도덕적 책임 외에 법적 책임은 질 것이 없다는 입장도 동일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들의 주장을 기각하고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인정했다. 그들은 보호·감독해야 할 학생을 대상으로 성폭력을 저질렀고, 그들의 무용계 내 실질적인 지위가 어떠하든 그 영향력과 지배력하에 놓인 피해자들은 이로 인해 오랫동안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받았다.
이번호에서는 지난호의 성폭력 실태 조사 결과 보고에 이어 몇 가지 유의미한 사례들을 소개할 계획이었으나 류 씨와 천 씨의 재판 결과가 나옴에 따라 이 내용은 지면상 다음 호로 넘기기로 한다. 블랙페이지에서는 앞으로도 이러한 성폭력을 일어나게 하는 무용계 내 권력의 작동관계를 예의주시하며 성평등한 무용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무용인들의 노력에 힘을 보탤 것이다.
글_블랙페이지 취재팀(대표 에디터 윤단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