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를 중심으로 #ㅇㅇ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난 지 5년, 그리고 서지현 검사의 폭로를 시작으로 이와 같은 성폭력 고발이 미투 운동으로 재점화된 지 3년, 안희정이나 이윤택 같은, 자신이 몸담았던 세계에서 왕으로 군림했던 가해자들에게는 차례로 유죄 판결이 내려져 이제 세상이 달라졌음을 전 국민 앞에 보여주는 듯했다.
일견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라는 슬로건이 실현되어 일상을 되찾은 듯한 착시마저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MeToo 가 매일 같이 쏟아지던 SNS가 N번방 사건에 분노하는 새로운 해시태그로 채워지고 있는 것은 아직 우리가 살고 있는 강간문화 속 현실은 그리 달라진 것이 없으며, 피해자가 되찾아야 할 일상은 앞으로도 숱한 싸움이 도사리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들이다.
예술계에서 성폭력 고발의 목소리는 잦아들었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성폭력이 일어나는 근본 원인인 예술계의 성차별적 문화를 되짚어보고 보다 안전하고 성평등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예술계의 이러한 자생적인 움직임에 대해서는 지난해 11월호 블랙페이지 ‘안전하고 성평등한 예술 환경 만들기’에서 소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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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몇몇 예술가들이 그룹으로 모여 스터디를 하고 행동강령이나 자치규약을 만드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창작 및 향유와 관련된 예술가들의 작업들은 지원사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며, 지원제도가 변하지 않는 한 예술가들의 자생적인 노력만으로 환경이 바뀌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성평등한 문화예술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한문위)에서 지난 4월 8일, 《성평등 예술지원정책의 현황 분석 및 개선안 연구》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촉발된 공정한 예술지원에 대한 현장의 요구, 그리고 미투 운동 이후 문화예술계 내의 성 불평등에서 기인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안 마련을 연구의 주요 배경으로 삼고 있다.
여기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2018년 2월 발간한 보고서 《문화비전 2030-사람이 있는 문화》에서 제안된 9개 전략과제 중 하나인 ‘성평등 문화실현’에는 성차별과 성폭력 없는 문화생태계 조성과 성평등한 문화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한 행정 혁신, 여성 친화적 생태계 및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문화정책이 제시되어 있고 같은 해 10월 한문위에서 그 후속 실행전략으로 발표한 ‘아르코 비전 2030’에는 15대 세부과제에 ‘문화예술계 공정환경 조성 계획’을 포함하고 있다. 성평등 예술 창작환경 조성과 예술계 공정임금에 대한 인식 확산, 예술계 내 성범죄 및 위계폭력 근절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인권 보장 및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조치 마련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지난해 6월 28일부터 12월 27일까지 약 6개월간 연구를 진행한 (주)장앤파트너스그룹에서는 우선 통계청, 여성가족부, 여성정책연구원, 그리고 한문위와 지역문화재단 등 문화 관련 공공기관의 여성과 관련한 통계 데이터를 수집해 분석하고, 성평등 예술지원 관련 해외 주요국 사례를 발굴해 국내 정책과 비교 분석하여 선행연구를 수행했다. 그리고 한문위 예술지원 정책과 제도, 현황을 예술지원사업 대상 예술인과 예술단체의 특징을 여성 예술인 및 예술단체(대표)의 지원율, 선정율 등 지원사업 관련 통계 데이터를 통해 분석하되, 분야별, 지원금액별, 지원형태별 성비 차이를 확인하여 지원사업의 선정과 운영 과정을 성평등 관점으로 다시 바라보았다.
또한 한문위에서는 예술 현장에서의 성평등 요구를 예술정책과 지원제도에 반영하기 위해 ‘성평등 예술지원 소위원회’를 2019년도에 신설했는데, 2명의 한문위 위원과 5명의 민간위원으로 구성된 소위원회(이하 소위)는 지난해 총 16회의 회의와 세 차례의 포럼, 여성 예술인 대상 두 차례의 좌담회를 운영해 성평등 관점에서 한문위 예술지원의 특징을 확인하고 성 불평등 해소를 위한 한문위 예술지원 정책 및 제도를 제안하였다.
예술지원제도 안에서의 공연예술계 성평등 현황
보고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두 번째 포럼의 주제이기도 했던 한문위 지원사업 대상 예술인들의 성비 분석이었다. 이를 포럼에서는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였는가?’라는 제목하에 ‘2016~2019 아르코 지원제도 성평등 팩트체크’라는 부제를 달아놓았다. 포럼이 열리기 전 소위에서는 2017년 한문위 지원사업에 선정된 76건(시각예술 17건, 공연예술 59건)의 사업을 파일럿 데이터로 삼아 심층 분석에 들어갔는데, 적은 표본이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지표를 읽을 수 있었다.
공연예술에서 무용 창작산실 올해의 레퍼토리를 살펴보면 인적 구성은 선정된 8개 단체 중 남성 대표자가 5개 단체(62%), 여성 대표자가 3개 단체(37%)였으며, 기획은 남성이 1명(12%), 여성 7명(87%), 피디는 남성 3명(10%), 여성 18명(85%), 스태프는 남성 33명(80%), 여성은 3명(19%)으로, 직종에 있어 성별 편향된 현상이 나타남을 알 수 있었다. 예산안에서 인건비 항목을 보면 단체의 대표가 남성일 경우 대표와 안무가 등 창작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책정된 단가는 평균 250만 원대이고, 출연진은 100만 원 이하, 스태프들은 평균 130~150만 원대였다. 반대로 대표가 여성일 경우 남성 스태프들에게 평균 300~400만 원대의 인건비가 지급되어 단가가 보다 높은 역할에 남성들이, 단가가 낮은 역할에 여성들이 많이 포진해 있는 경향성을 보였고, 직종의 분포에서도 피디나 기획처럼 서류 작업이 많은 수동적인 역할은 주로 여성들이, 안무 등 창작에서 권한을 갖는 역할은 남성들이 맡고 있는 경향성을 보여 남성에게 권력이 쏠리는 결과를 나타냈다.
파일럿 데이터 분석을 마치고 2차 포럼에서 발표된 성비 분석 데이터는 공연예술, 시각예술, 문학으로 분류되어 무용 쪽 통계가 따로 추출되진 않았지만 예술가 개인과 단체, 전공자 성비라는 관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결과가 도출되었다.
(단위: 백만원)
[그림1] 공연예술 분야 사업별 평균 지원금액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성평등 예술지원정책의 현황분석 및 개선안 연구》 중 발췌 인용)
공연예술 분야 지원사업은 크게 예술창작지원, 국제교류지원, 예술인력육성, 문화예술향유지원의 네 가지 파트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지원금이 집행되는 파트는 문화예술향유지원 쪽이었다. 지원사업에 익숙한 시각으로 본다면 특별할 것 없는 데이터지만 이를 사업별 성비 분석 데이터를 보고 나서 다시 들여다보면 여태 보이지 않았던 것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일단 성비 분석 데이터를 먼저 보기로 하자.
(단위: %)
[그림2] 아르코 공연예술 분야 지원 성별 구성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성평등 예술지원정책의 현황분석 및 개선안 연구》 중 발췌 인용)
막대그래프상에서는 그다지 큰 차이로 보이진 않지만 남성 예술가들이 신청 건수 비율보다 선정 건수 비율이 좀 더 높은 데 비해 여성 예술가들은 신청 건수 비율보다 선정 건수 비율이 좀 더 낮은 것을 알 수 있다. 여성 예술가들이 신청한 지원사업에서 좀 더 많이 탈락한다는 뜻이다. 선정 금액을 보면 이 차이는 좀 더 벌어지는데, 이는 다시 후술하겠지만 지원액이 큰 문화예술향유지원에 선정되는 것은 개인이 아닌 단체들이고 단체장들은 남성의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단위: %)
[그림3] 공연예술 분야 성별 구성비와 아르코 공연예술 분야 지원 성별 구성비 비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성평등 예술지원정책의 현황분석 및 개선안 연구》 중 발췌 인용)
위 그래프는 2016년부터 19년까지 지원사업에 선정된 예술인의 성비와 2017년 문체부에서 실시한 예술인 실태조사, 2018년 현재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 활동내역이 등록된 예술인(예술인패스 기준), 그리고 역시 2018년 현재 예술대학 졸업생의 성비를 비교한 것이다. 그래프의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살펴간다면 예술대를 졸업한 여성들은 현장 진입에 실패하며 일부가 탈락하고, 현장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여성들은 다시 지원사업에서 탈락해 활동 기회를 상실하는, 공연예술계 여성들의 현실을 읽을 수 있다.
(단위: %)
[그림4] 공연예술분야 지원 성별 구성비
(지원금액 3천만 원 이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성평등 예술지원정책의 현황분석 및 개선안 연구》 중 발췌 인용)
(*그림 3과 4에서 예술대 졸업생 성비가 다르게 표시된 것은 그림4의 졸업생 데이터가 공연예술이 아닌 시각예술 데이터로 잘못 들어갔기 때문이다. 보고서의 인쇄 실수로 보인다.)
그리고 지원금액 3천만 원 이상의 고액 사업에서는 남성이 증가하는 비율을 보이는데, 이는 앞서도 설명한 것처럼 고액 사업에 선정되는 것은 대부분 개인이 아닌 단체들이고 단체장 비율은 남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를 다시 사업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단위: %)
[그림5] 공연예술 분야 사업별 개인/단체 구성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성평등 예술지원정책의 현황분석 및 개선안 연구》 중 발췌 인용)
무용 분야에서 가장 지원금액이 높은 무용 창작산실이나, 신나는 예술여행 같은 문화예술향유지원사업, 공연장 운영을 지원하는 공연예술 특성화극장운영, 비평을 생산하는 공연예술 비평연구 활성화지원사업 등은 압도적인 비율로 단체가 선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위: %)
[그림6] 공연예술 분야 개인/단체 구성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성평등 예술지원정책의 현황분석 및 개선안 연구》 중 발췌 인용)
지원사업에 선정된 개인 예술가 비율은 여성이, 단체장 비율은 남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래프인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단체가 고액 지원사업에 선정되는 비율이 높고 그 단체의 장이 주로 남성이라고 해서 지원금의 수혜를 입는 것이 모두 남성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 보고서에서는 문화예술계 유리천장이라는 시각을 내세우며 예술계에서 어떤 기관에 들어가지 않는 한 단체나 조직을 이끌어 가는 리더가 되는 것이 상위 그룹 권력자인데 개인 예술가에 있어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단체 대표는 남성들이 많은 부분에 대한 원인 분석을 위해 질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여성 예술가들이 임신과 출산, 육아를 하며 예술을 병행하기가 어려워 경력 단절로 이어지기 쉬운데, 현재의 돌봄 인프라가 특정 기업에 고용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을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육아휴직제도나 경력복귀를 지원하는 새로일하기센터 등의 각종 제도적 지원책이 예술인의 직업 활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따라서 예술계 내에 돌봄에 대한 안전망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보다 섬세한 고민이 필요하다.
성주류화 관점에서의 새로운 질문, 훌륭한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계는 다른 분야에 비해 여성들이 많이 진출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분야이기 때문에 그동안 성평등이나 성주류화에 대한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원사업에서 심의위원 전원이 여성으로 구성되고도 선정 대상은 전원이 남성인 경우가 드물지 않게 일어날 정도로 성별이 기준이 되는 관점조차 없었다. 창작자의 작업에서도 매우 추상적이고 작가주의적 주제에 치우쳐 젠더 특정적인 시각이 담긴 작품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여기에는 페미니즘이 유행이 지난 주제라는 인식과 아직 말하기 불편한 주제라는 상반된 인식이 공존한다.)
보고서는 ‘훌륭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금 던지며 기존의 전통적인 정의 방식이 아니라 성 주류화 전략 차원에서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예술이나 문화라는 이름으로 성폭력이나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측면이 강했고 이는 성범죄가 일어나기 좋은 토양이 되어 왔지만, 이제 이러한 점에서 ‘훌륭한 예술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새롭게 되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글_ 블랙페이지 취재팀(대표 에디터 윤단우)
*블랙페이지 취재팀에서는 2018년 미투 운동과 함께 시작했던 무용계 성폭력 실태 조사를 다시 진행합니다. 이제야 고발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한 현재, 몇몇 사건들을 파편적으로 접하고 공분하는 것이 아닌 무용계 성폭력의 양태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설문에 응답하는 외에 추가로 제보할 내용이 있거나 인터뷰를 원하시는 분은 blackpage.dance@gmail.com 으로 메일 주십시오. 설문은 물론 추가 제보나 인터뷰에서 개인 정보와 관련된 내용은 비밀이 엄수되니 안심하고 응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설문조사 링크 ▶▶▶ 무용계 블랙페이지를 쓰다 - 성폭력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