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로 어떤 논쟁적인 사안이 발생했을 때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중립기어를 잡는다”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양쪽 입장을 다 듣기 전에는 사실관계를 다 파악할 수 없기에 입장 표명을 유보하며 중립적인 위치를 점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이러한 “중립기어”가 유독 자주 등장하는 국면은 성범죄 이슈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다. 심지어 가해와 피해에 대해 섣불리 예단해선 안 된다며 ‘가해지목인’이나 ‘피해호소인’ 같은 해괴한 조어까지 등장해 사용되고 있는 지경이다.
지난 11월 필자는 ‘2020 서울 전통춤 문화제’, ‘2020 전통예술 복원 및 재현사업 - 장홍심류 바라승무’, 서울세계무용축제 기획공연 ‘무연’과 ‘소리가 춤을 부른다’ 일부 참여자의 성비위 관련 사실과 경제범죄 전과에 대해 SNS를 통해 공론화하는 한편 해당 기관의 공식 메일과 민원 등의 경로로 질의하고 관련 내용을 이 지면을 통해 기사화한 바 있다.
‘2020 서울 전통춤 문화제’는 서울시가 주최하여 진행된 행사로, 정엔터테인먼트(정아트앤컴퍼니)에서 행사를 대행하였습니다. 국악방송은 송출대행을 수주하여 중계만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이에 저희 기관은 공연의 촬영 및 유튜브 생중계를 수행하였으며 행사의 프로그램 기획 등에는 참여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이에 행사 주최측인 서울시 문화예술과 예술정책팀에 문의하시는 것을 제안드립니다.
-서울시 문화본부 문화예술과 답변 전문
안녕하세요. 먼저 <2020 서울 전통춤 문화제>로 인해 심려를 끼쳐드려 사과드립니다.
서울시는 해당 민원내용과 관련하여 사전에 인지한 바가 없었으며, 이번 민원을 통해 언급하신 기사를 검색하고 한국춤비평가협회 홈페이지에서 관련 게시글을 보았습니다.
본 건과 관련하여 공식적으로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서울시는 우선 행사 영상본을 편집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시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축제와 행사를 만들기 위해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끝.
‘2020 전통예술 복원 및 재현사업 - 장홍심류 바라승무’ 관련 답변
-한국전통예술협회 답변 전문
1. 이ㅇㅇ 교수님이 한국춤비평가협회에 성폭력 사건으로 고발되어 협회에서 제명된 인사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일이었다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2. 이ㅇㅇ 교수님이 발제자로 참석하게 된 경위와 그를 발제의 적임자로 여기고 초청한 이유에 대한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이번 연구과제에 참여할 전문가나 연구발제자를 선정하는 회의과정에서 이북5도청 무형문화재 위원을 역임하셨던 분들 중에서 몇 분을 전문가회의나 발제자로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연구자 참여에 있어서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답변 전문
1. 말씀 주신 이ㅇㅇ 교수의 성비위 사건에 대한 인지 여부 및 기관의 입장에 대해 전통예술 복원/재현 사업의 바라승무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 한국전통예술협회에서 답신한 내용을 첨부합니다(상기의 한국전통예술협회 답변으로 첨부됨).
2. 관련, 윤단우님의 정당한 문제 제기가 있었던 점을 감안하여 저희 재단이 발간하는 연구과제 통합보고서에는 이ㅇㅇ 교수의 성명 표기를 제외하고자 합니다.
- 성 비위 사건의 사실관계는 본 재단이 판단할 수 없는 점과 아울러 각 과제의 참여자 선정 등 과제 수행에 대해 우리 재단의 개입에 한계가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 과제의 맥락을 감안하여 이ㅇㅇ 교수의 원고는 활용하되 기명 표기는 한국전통예술협회로 할 예정입니다.
3. 향후 성비위, 성폭력 사건 연루된 인사의 참여에 대해서 각별히 유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서울세계무용축제 기획공연 관련 답변
-서울세계무용축제 조직위원회 답변 전문
1. 강ㅇㅇ 전 교수의 출연에 대하여
질문의 취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잘못 때문에 무조건 사회활동을 금할 수는 없다는 측면에서 저희도 여러 가지를 고려했습니다. 강ㅇㅇ 님은 문제의 사건으로 3년간(2010-2013년) 복역했고, 출소 후 7년 만에 처음 무대에 선 것입니다. 본인의 말로는 2006년 공연 이후 14년 만의 무대였다고 합니다.
14년 만의 출연이라는 부분은 논외로 한다 해도, 적어도 출소 후 7년 만에 사회활동을 재개한 것이라면, 이는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근신과 자숙의 태도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아울러 그동안 예술계에서 있었던 비슷한 사례들도 살펴가며 참고했습니다.
물론 이런 성격의 사안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관점이 다를 것입니다. 같은 문제라 해도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판단이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에 관한 일종의 기준을 제시해 주실 수 있다면 앞으로 진중하게 참고하겠습니다.
2. 이ㅇㅇ 교수의 출연에 대하여
이ㅇㅇ 교수는 가해자의 가족이지 가해자 자신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무대출연을 문제 삼으신 것은 이 교수가 ‘가스라이팅과 피해사실 축소·부정을 통해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행했다’는 부분 때문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저희로서는 전혀 몰랐던 일입니다. 사건 전체의 개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이ㅇㅇ 교수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이번에 질문을 받고나서야 본인에게 물어봤는데 이ㅇㅇ 교수의 대답은 한마디로 ‘터무니없는 조작’이라는 겁니다. 그런 언행을 한 적이 결코 없으며, 자신이 정말로 피해 학생에게 가스라이팅을 했는지, 회유를 했는지 확인을 요청해온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피해 학생의 일방적인 주장이 신문기사에 인용되고, 주변에서 자신을 2차 가해자로 몰고 가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럽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윤단우 님은 이ㅇㅇ 교수에 대해 “2차 가해를 행한 바 있는 인물입니다”라고 단정적으로 쓰셨습니다. 어느 쪽의 말을 믿어야 할지요? 어쨌든 저희의 입장에서는 윤단우 님이 이ㅇㅇ 교수의 출연에 대해 문제점으로 지적하신 핵심사유가 ‘2차 가해’이기 때문에, ‘2차 가해행위’가 실제로 있었음을 객관적으로 입증해 주셔야만 이번 문제제기의 근거가 성립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3. 감사의 말씀
무용계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공론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시는 윤단우 님의 모습에 늘 공감하며 박수를 보내고 있다는 말씀 드립니다. 아울러 같은 사안이라도 보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도록 만들어 주신 점에 대해서도 감사 드리는 바입니다.
서울무용제 초청공연 관련 논란
한편 서울무용제 초청공연 ‘무.념.무.상(舞.念.舞.想) II’에는 2018년 가천대에서 일어난 제자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되어 직위해제된 이ㅇㅇ 전 교수가 출연해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 서울무용제 조직위원회 측에서는 이 전 교수가 자신을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한 A씨를 고소하여 피의자 신분이 된 A씨가 검찰 조사에 협조하지 않아 내사 종결되었으며 이 전 교수의 성추행 혐의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분을 받은 사실(고소를 진행한 건에 대한 죄명은 확인되지 않음)과 함께 입장문을 받은 사실을 밝혀 논란에 대해 해명했다.
공동체의 상식과 관행이라는 기준
“성적 표현행위의 위법성 여부는 쌍방 당사자의 연령이나 관계, 행위가 행해진 장소 및 상황, 성적 동기나 의도의 유무, 행위에 대한 상대방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인 반응의 내용, 행위의 내용 및 정도, 행위가 일회적 또는 단기간의 것인지 아니면 계속적인 것인지 여부 등의 구체적 사정을 종합하여, 그것이 사회공동체의 건전한 상식과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용인될 수 있는 정도의 것인지 여부 즉 선량한 풍속 또는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것인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위 내용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직장 내 성희롱을 인정하며 ‘성희롱(sexual harassment)’을 법적으로 도입한 사건인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에 대한 1998년 대법원 판결문의 일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사회공동체의 건전한 상식과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용인될 수 있는 정도’이다. 즉, 피해자가 당한 성적 괴롭힘이 피해자 혼자만의 수치심(최근 들어 이를 ‘불쾌감’으로 바꿔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이 아니라 사회공동체의 상식과 관행에 비추어 다른 공동체 구성원들도 수치심을 느낄 만한 행위였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논리다.
이 판결문에 등장한 ‘사회공동체’라는 표현은 글자 그대로 우리 사회를 의미하며 이때의 ‘상식과 관행’은 사회 전체의 성인지 감수성 정도를 가늠하는 잣대로 기능했다. 즉, 피해자가 당한 성적 괴롭힘을 피해자가 느낀 바 그대로 성적 괴롭힘으로 인정하느냐 아니면 친밀함을 표시하는 신체접촉이나 농담으로 받아들이느냐의 기준을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상식과 관행에 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상식과 관행이 어떠하냐에 따라 피해자는 친밀한 신체접촉이나 농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상한 사람이 될 수도, 납득 가능한 피해를 주장하는 정당한 피해자 지위를 획득할 수도 있다.
‘사회공동체’라는 표현이 언제나 사회 전체를 다 포괄하는 것은 아니기에 이 논리는 가해자 측에서 사건을 전략적으로 쟁점화하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2016년 온라인의 해시태그 운동으로 시작된 예술계 내 성폭력 고발이 2018년 미투운동을 거치며 사회 전방위적으로 일어난 분노와 함께 속속 법정으로 향하는 동안 가해자들의 방어 논리는 주로 예술계 ‘관행’이라는 데 집중되었다. 예술계 관행으로 용인되어온 행동이기에 성폭력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다.
신체를 도구로 사용하는 무대예술 계통에서는 이러한 주장에 더욱 힘이 실리며 예술 현장에서 흔히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신체접촉이라거나 연기나 무용을 지도하는 보편적인 방식이라거나, 아니면 경계를 넘는 예술가로서의 자유로운 표현이라는 식으로 호도되기 일쑤였다. 무용계에서 일어난 몇몇 법정 사건에서도 학교 또는 연습실과 공연장 안팎에서 작용하는 무용계 규율과 문화, 태도와 습관 들이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되었다.
성범죄 관련 판결문에 등장했지만 이 ‘사회공동체의 상식과 관행’은 비단 성범죄 국면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예술계에 ‘페이백’이라는 용어로 횡행하는 횡령은 이것이 범죄라는 인식조차 흐리게 하며 결과적으로 경제범죄를 ‘관행’으로 여기는 문화를 조성해왔다. 예술계에서 범죄 전과자들이 법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뒤에도 퇴출되지 않고 복귀에 성공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세계의 상식과 관행이 전과자 복귀의 근거가 되고 있다면 그 상식과 관행이 누구를 위해 존치되어야 하는지도 함께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누구를 위한 중립인가
여성가족부의 2019 성폭력 안전실태조사(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여 3년 주기로 실시)에 따르면 가해자를 ‘친인척 이외의 아는 사람’이라고 응답한 결과가 성추행(폭행 및 협박 수반)이 81.8%, 강간이 80.9%(복수응답 분석결과)로 나타났다. 3년 전인 2016년 조사 결과에서는 성추행(폭행 및 협박 수반)이 70.0%, 강간이 77.7%로 나타났고 2013년 조사 결과에서는 성추행이 67.5%, 강간이 60.1%로 조사가 거듭됨에 따라 아는 사람에 의한 범죄 비율이 높아지는 결과를 보이고 있다. 반대로 폭행이나 협박이 수반되지 않는 성추행이나 신체접촉이 일어나지 않는 불법촬영은 ‘모르는 사람’이 가해자라는 응답이 각각 81.1%(성추행)과 74.9%(불법촬영)로 나타나 대조를 이루었다(2019년 기준).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최나눔 정책팀장은 지난 3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에 ‘친밀한 관계에선 성적 행동이 당연하게 동의돼 있다’는 잘못된 인식이 만연하다”라고 지적하며 “명시적인 폭행이나 협박이 전제돼 있어야 강간·성추행이 성립된다는 인식도 마찬가지”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인식으로 인해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가 일어나는 일이 다반사라는 것이다(「오랜 친구가, 친자식 예뻐서···성폭력 80% ‘아는 사람’」, <중앙일보> 2020년 3월 15일자 기사).
또한 성폭력이 일어나는 장소를 살펴보면 강간이나 유사강간, 강제추행 등 성폭력의 수위나 정도가 심해질수록 집이 범행 장소가 되는 비율이 높아지는 특징을 보인다. 지난해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집에서 강간이 일어난 경우가 45.8%, 숙박업소 및 공중목욕탕은 31.8%, 유흥접객업소는 5.6%로 나타났고, 유사강간은 집이 43.9%, 숙박업소 및 공중목욕탕이 19.6%, 유흥접객업소가 10.4% 순이었다.
강제추행의 경우 집이 14.1%, 숙박업소 및 공중목욕탕이 8.4%, 유흥접객업소가 21.5%로 앞서의 두 범죄와 다소 양상이 다르게 나타났는데, 지하철 등 대중교통수단과 대합실이 15.1%, 길거리가 18.2% 등인 것으로 비추어 여성가족부 조사 결과와 달리 폭행이나 협박이 수반된 추행과 수반되지 않은 추행 모두가 집계되어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강간 및 유사강간이 집이나 숙박업소, 유흥접객업소 등과 같이 내밀한 공간에서 집중적으로 범행이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강제추행은 길거리와 대중교통수단을 비롯해 사무실, 학교, 의료기관, 금융기관 등 위력이 작동하는 공간, 유원지 등 위락시설, 백화점이나 할인마트 등 쇼핑시설, 주차장, 공중화장실, 교도소 등 구금장소에 이르기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의 접근이 가능한 거의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폭력은 형법으로 다뤄지는 강력범죄임에도 위 통계가 확인시켜주는 것처럼 집과 같은 매우 내밀한 공간에서 아는 사람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 범죄가 아니라 사적 관계 안에서의 애정사건으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범행 장소에 피해자와 가해자 둘만 있을 때 범행이 발생하는 빈도가 높으며 따라서 목격자나 이렇다 할 증거가 없는 경우도 많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진술은 첨예하게 대립하기 일쑤이고, 검경 조사와 공판 과정에서 확실한 증거도 목격자도 없이 양측 진술만을 가지고 사건을 판단해야 하는 상황도 비일비재하다.
그렇기에 성폭력 사건에서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위치를 점하는 것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제3자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이 상식이라 믿는 것과 자신이 몸담은 세계의 관행을 종합하여 피해자 또는 가해자의 진술을 판단한다. 그렇다면 이 판단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숙고하여 내려진 것인가? 피해자 측과 가해자 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며 증거도 증인도 없는 상황에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 서는 것은 가능한가? 피해자 측과 가해자 측이 발 딛고 선 지형이 기울어져 있을 때 중립 혹은 객관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중립기어’를 잡으면 자동차는 기울어진 방향으로 내려간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안전한’ 중립지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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